주간동아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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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원을 따도 다음날엔 빈털터리”

‘賭神’ 김승건씨 카지노 10년 유전… 도박중독 인생 파멸 한국인 동남아에 수두룩

  • < 안영배 기자 > ojong@donga.com

    입력2004-10-05 16: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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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억원을 따도 다음날엔 빈털터리”
    국제적 도박도시 마카오의 리스보아 호텔 카지노 VIP룸. 단 한 판의 게임에 한국 돈으로 최소 베팅 20만원에서 100만원, 최고 베팅 5000만원에서 1억2000만원을 걸 수 있는 VIP 테이블이다 보니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카지노 매니저의 안내로 바카라(게임의 일종) 테이블에 앉은 20대 중반의 한국인 청년이 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이 병풍을 두른 듯 그를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침 삼키는 소리만 간간이 들린다. 샤프질(카드를 섞는 일)을 하는 딜러의 표정이 자못 심각하다.

    한국인 청년이 카드를 커트하자 딜러는 손님들에게 카드를 돌려 오픈했다. “플레이어 파이브(5), 뱅커 식스(6).” 무거운 침묵을 가르고 나온 딜러의 목소리에 주위 사람들이 광둥어로 “도산(賭神)! 도산!” 하며 한국인 청년을 추켜세웠다. 그가 아홉 시간에 걸쳐 벌인 마지막 66번째 게임에서 뱅커(손님) 쪽에 베팅, 한 끗 차로 플레이어(딜러) 쪽을 이긴 것이다.

    마지막에는 장기 팔고 몸 팔고

    청년이 미소 지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칩을 20만 홍콩달러로 10개씩 묶고 계산해 보니 6700만 홍콩달러. 한국 돈으로 70억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단돈 6000홍콩달러(600만원)로 시작해 벌어들인 금액이다.



    1992년 4월 카지노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신기록을 세운 도신(賭神)은 이렇게 탄생했다.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드라마의 주인공은 김승건씨(35). 홍콩의 여행사에서 관광가이드로 활동하던,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 일이다.

    그런 그가 최근 ‘카지노 천국’(금토)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카지노 인생유전 10년의 경험을 책으로 펴냈다. 국내에서도 폭발적으로 번져가는 도박 열풍이 너무 위험스러워 이를 경고하기 위해 자신의 도박중독 인생을 공개하게 됐다는 것이다.

    “70억원을 번 뒤 어떻게 됐냐고요? 바로 그 다음날로 홍콩으로 돌아가는 여비만 남긴 채 다 털렸습니다. 그게 도박의 세계예요.”

    “70억원을 따도 다음날엔 빈털터리”
    사연은 이랬다. 그가 거액을 따자 카지노 총매니저가 접근해 리스보아 호텔의 특급 스위트룸 키를 주며 공짜니까 얼마든지 머물러도 좋다고 했다. 김씨를 붙잡아두려는 생각에서였다. 꾐에 넘어간 김씨는 50평이 넘는 화려한 스위트룸에서 늘어지게 잠을 잔 다음 일어나자마자 VIP룸을 찾았다. 그리고는 카지노측에서 손님으로 가장해 들여보낸 전문 도박꾼과 바카라 게임을 벌이다 결국 전날 딴 돈을 다 잃고 만 것.

    나중에 알고 보니 카지노에서는 한국이나 일본의 ‘엽전’(돈 많은 사람)들이 오면 손님으로 가장한 도박꾼에게 칩을 줘 들여보내 슬슬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약을 올려 결국 돈을 잃게 하는 심리작전을 편다는 것이었다. 전문 도박꾼은 카지노가 무한정 제공하는 돈으로 사정없이 작전을 구사하니 게임에서 손님이 이길 승산은 제로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돈을 따서 바로 집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번 도박에서 엄청난 돈을 따는 황홀한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절대 그 도박장에서 몸을 뺄 수 없다고 한다. 바로 도박 중독증 때문이다.

    “대부분의 카지노들이 그렇듯 리스보아 카지노에 들어간 사람들은 밖으로 나갈 때 한두 번씩 똑같은 경험을 합니다. 분명 나가는 문이 있는데 정작 밖으로 나가려고 출입구를 찾다 보면 돌고 돌아 제자리에 되돌아오곤 해요. 여기에는 이유가 있어요. 단 몇 분, 몇 초라도 카지노 안에 사람들을 가둬놓으면 1원이라도 더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후 수없이 경험했지만 도박꾼의 마음은 순간순간 변하게 마련입니다. 돈을 따서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던 중에도 그림이 좋으면 한 번 더 돈을 걸게 되고, 그러다 돈을 따면 딴 대로, 잃으면 잃은 대로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게 돼요.”

    이렇게 해서 가진 돈 다 날리고 카지노장에서 손님들에게 구걸하며 살아가는 ‘뒷전 인생’들도 마카오에서는 낯선 풍경이 아니라고 한다. 한국인만 해도 뒷전 인생들이 한 달 평균 40~50명에 이른다는 것.

    “마카오에 상하이방이라는 마피아 조직이 있어요. 도박 중독자들에게 하루 이자만 4%를 붙여 돈을 빌려주는데, 카지노에 빠진 사람들이 그 돈을 못 갚으면 이자에 이자를 붙여 원금의 100배로 빚이 늘어납니다. 그때 사채업자들은 그 사람들의 신장이나 간, 심지어는 눈의 각막까지 떼어내 팔아먹어요. 김씨 성을 가진 한국 노인 한 분은 폐가 없이 마카오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여자들도 카지노를 돌며 몸을 팔아 빚을 갚는데, 나중에는 중국의 부유한 노인에게 아주 팔려가기도 하지요.”

    “70억원을 따도 다음날엔 빈털터리”
    김씨 역시 상하이방에 잘못 걸려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4박5일간 바카라 게임에서 승부를 건 뒤 죽음에서 겨우 빠져나온 경험이 있다.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는지 김씨는 잠깐 몸을 부르르 떨며 사연을 얘기한다.

    “저는 70억원의 카지노 환상에 빠져 홍콩으로 돌아간 후 여행업을 하던 어머니와 누나의 돈을 모조리 빼돌려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카지노를 돌았습니다. 물론 수십억원을 단 몇 시간에 따는 기적도 있었지만 다 털리고 카지노 뒷전 인생으로 떠돌다가 1997년 다시 가족에게 돌아갔습니다. 어머니에게 다시는 도박에 손대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중독증에서 헤어날 수 없어 또다시 가족 돈 3억원을 빼돌려 마카오로 갔지요. 그 돈을 다 잃자 상하이방에게 3억5000만원을 빌리게 됐어요. 그들은 나의 신원을 파악하고 있었던지 군소리 않고 빌려주더군요. 물론 그 돈을 다 잃자 상하이방에서는 지체 없이 조직원들을 풀어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볼모로 잡았어요. 돈을 안 주면 죽여버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씨가 있는 돈을 다 써버린 후라 어머니 수중에 현금이 있을 리 없었다. 김씨의 어머니는 모든 것을 체념하며 상하이방 부두목에게 자신과 김씨 외할머니의 목숨을 담보로 1000만 홍콩달러를 2주 기한의 수표로 끊어주고, 대신 아들에게 700만 홍콩달러를 건넸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카지노에 가서 네가 이기면 빚을 갚고, 지면 세 사람이 함께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다”며 흐느꼈다. 그렇게 해서 상하이방에 이끌려 마카오 카지노로 들어간 김씨는 4박5일간 죽음의 바카라 레이스를 한 끝에 빌린 돈을 다 갚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상하이방 부두목은 그날 김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카지노에서 돈 버는 사람은 카지노 업주와 에이전트밖에 없다. 이후 카지노에 절대 발을 들여놓지 말라. 당신 어머니한테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이후 당신을 철저히 체크하겠다.”

    김씨는 자신의 오장육부를 팔아가며 도박에 미친 사람들보다 가족 목숨까지 담보로 잡힌 자신이 더 비열한 인간이라고 자책했다. 이후 그는 도박에 완전히 손을 끊었고 현재는 홍콩에서 여행업을 하고 있다.

    김씨는 지금도 마카오, 필리핀 일대에는 자신처럼 도박에 미친 한국인들이 떠돌고 있다고 밝힌다. 그중에는 한국의 유명 탤런트, 개그맨, 음반업자는 물론 목사나 승려 출신도 있다는 것. 특히 종교직에 몸담고 있는 일부 사람은 현지의 빈민구호 사업에 쓴다며 신도들로부터 돈을 가져와 카지노에 쏟아붓는 사례까지 있다고 한다.

    그는 한국의 카지노 붐에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내국인에게 개방된 강원랜드 같은 카지노산업은 동남아 카지노 조직과 연계돼 더욱 확대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고, 조만간 커다란 사회적 문제를 불러일으킬 것은 불 보듯 뻔하다는 것. 국내에서도 ‘카지노 후유증’이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김씨의 경고가 예사롭지는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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