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행원의 아들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1980년대에 이탈리아 미디어 산업의 대부분을 장악, 단기간에 미디어 황제가 되었다. 그의 급부상은 전 총리 베티노 크락시 등 거물 정치인들의 후원, 그리고 고위층과 연결된 비밀 결사단체 ‘P2’ 등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마피아 보스였던 스테파노 본타데가 베를루스코니의 ‘TV 왕국’ 건설 자금을 지원했다는 것이 전직 마피아들의 증언이다.

지난해 5월에 치러진 이탈리아 총선 당시 국민들은 베를루스코니의 재집권에 대해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선거 자체가 베를루스코니의 미디어 독재 아래 실시되었기에 이러한 반응은 사실 당연한 것이었다. 단적으로 베를루스코니가 인터넷을 통한 선거운동을 벌이자 상대 좌파진영의 대변인은 “1200만권의 자서전을 인쇄해 각 가정에 돌렸으니 종이가 있을 턱이 없다”며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이 같은 우려들을 현실로 만들고 말았다. 총리가 된 베를루스코니는 3개 국영방송(RAI 1, 2, 3)까지 동시에 장악했다. 유럽 어느 나라에도 여론을 형성하고 계도할 각종 미디어를 총리가 장악한 경우는 없다. 이탈리아의 작가 움베르토 에코는 “미디어 재벌 총수의 선택이 마침내 이탈리아의 민주주의를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에코의 지적은 옳았다. 저급한 TV 프로그램들이 점차 이탈리아의 안방을 점령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탈리아 주간지 ‘기독교가족’은 TV 방송의 경향에 대해 “야만인을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평가한다. 이탈리아 TV 프로그램은 대부분 경품 잔치의 연속,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 스포츠와 천박한 쇼 프로그램 등으로 뒤범벅되어 있다. 여기에 나체의 미녀들이 등장해 선정성을 더한다. 심지어 축구 등 스포츠 경기나 가족시간대조차 아슬아슬한 차림새의 소녀들이 활개친다. 저속한 성적 개그들도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유명한 쇼걸이 붉은 핫팬츠를 벗으면 사회자가 코를 들이대는 장면까지 여과 없이 방송되는 지경이다.

TV정책을 담당하는 공보부 장관은 이런 편파보도 주장들에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총리가 프로그램의 제왕인 까닭에 문제의 해결이 쉽지 않다. 베를루스코니는 국영·민영 방송(시청률 42%)을 통해 시청자의 90% 이상을 그의 통제권 아래 두었다. 결과적으로 방송을 통한 여론 형성은 총리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탈리아의 미디어 재벌과 여당의 실수 등을 보도하는 매체는 외국 언론뿐이다. 독일의 언론은 “그렇다면 독일에서는 독일 미디어 재벌인 레오 키르히가 총리가 되어야 하나”라고 반문하며 이탈리아의 현실을 비꼬았다. 또 선거 당시 스페인의 일간지 ‘엘 문도’와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돈세탁, 판사 매수, 마피아와의 결탁 등 범죄 의혹설을 제기하며 베를루스코니가 총리에 부적합한 인물이라고 공격했다.
베를루스코니는 언론의 공정성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자 공정보도를 감시하기 위한 특별위원회 구성을 제의했다. 미국, 영국, 독일의 전문가 3명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는 언론의 편파보도 등 공익에 반하는 행위들을 조사할 계획이다. 그러나 베를루스코니는 민영방송의 매각 주장에 대해서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현재 베를루스코니는 임기 5년인 총리 외에 외무장관직도 겸하고 있다. 정치와 언론 양측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그가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가 세인의 관심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