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어른, 부자, 가난한 사람 가리지 않고 ‘죽음‘은 공평하게 찾아온다. 그러나 죽음을 향하는 길까지 평등한 것은 아니다. 치료비가 없어, 돌봐줄 사람이 없어, 병든 몸을 의탁할 공간이 없어 비참하고 외롭고 초라하게 죽음을 맞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말기암 환자 보호시설 ‘샘물의 집‘과 ‘샘물호스피스선교회‘ 회장인 원주희 목사(49)는 마지막 가는 죽음의 길이 누구에게나 평등하길 소망하는 사람, 모든 환자들이 끝끝내 존엄함을 지키며 눈감는 순간까지 진정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이다. 그가 말기암 환자를 8년째 무료로 돌보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려 애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목사는 죽음과는 무관할 성싶은 20대 중반 처음 ‘죽음‘과 조우했다. 그것은 ”죽음은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바로 내 눈앞에 있다”는 자각이었다. 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하고 의정장교로 전방부대에서 복무하던 시절, 지뢰 폭발사고로 다친 병사를 치료하고, 사고사로 죽는 병사를 목격하면서 그는 죽음이 삶과 더불어 있음을 절감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한창 고민한 그때, 그는 군 앰뷸런스를 타고 급히 환자를 옮기다 전복사고를 당했다. ”고관절을 크게 다쳐 군 병원에 입원했지요. 그런데 통증은 약물로 완화할 수 있었지만 죽음의 공포는 좀처럼 해소되지 않더군요. 어느 날 군부대 종교인들이 병문안을 와 제 손을 잡고 찬송가를 부르며 위로해주는데 그 따뜻한 손길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대학시절 약으로 질병을 치료하고 고통을 멈출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는 의학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심적 고통을 치료해 줄 영적 치료의 필요성을 이때 절실히 깨달았다.
서른여섯 나이에 10년간 운영해 온 약국을 정리하고 신학대학에 입학한 그는 죽음에 직면한 환자들을 도울 방법을 고민하다 세브란스병원의 호스피스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세브란스병원에서 호스피스 교육을 받고 자원봉사를 시작했죠. 그런데 호스피스 프로그램이 가정방문 형식으로 돼 있어 환자가 원하는 만큼 충실한 의료서비스를 받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무래도 환자가 집에 있으니까 시ㆍ공간적 제약이 따르지요.”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환자가 가정과 같은 편안함을 느끼며 24시간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하는 거였다.
신학대학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은 원 목사는 본격적으로 말기암 환자 보호시설을 세울 부지를 물색했다. 아는 교회 장로 한 사람이 선뜻 내준 용인의 농가를 사비로 수리하던 때 동네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몹쓸 병으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우리 동네에 받아들일 수 없다.” 용인시 내에서만 같은 이유로 쫓겨다니길 세 차례, 현재 ‘샘물의 집‘이 위치한 용인시 백암면 고암리는 네 번째 찾은 보금자리다. 다행히 이 마을 주민들이 이해해 주어 겨우 둥지를 튼 것이다.
1993년 발족한 샘물호스피스선교회는 ‘샘물의 집‘에 침상 18개와 예배실, 장례식장 등을 갖추고 의료기관에서 ‘치료 불가‘ 판정을 받은 말기암 환자를 돌보고 있다. 지금까지 이곳을 거친 환자는 1000여명. 매월 평균 30~40명의 환자가 이곳에서 보살핌을 받는다. 의사 1명과 간호사 8명의 의료진 외에 행정과 주방일 등을 맡은 상주인원이 16명에 이른다. 또 선교회 호스피스 교육을 통해 배출한 7000여명의 자원봉사자 중 10% 정도가 요일별로 이곳을 찾아 자원봉사 활동을 편다.
”처음엔 24시간 상주하며 환우들을 돌볼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 우리 부부가 일을 도맡았죠. 지금은 짐을 크게 던 셈이지요.”
환자 돌보는 일과 후원자 모집 등 선교회 안팎 일로 바쁜 원목사의 아내 한광숙씨(47)는 약사 남편을 둔 아내로서 누리던 삶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회상한다. ”사재를 털어 출발한 만큼 가족 모두가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무(無)에서 시작해야 했습니다. 10년간 누려온 안락함을 내던진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더군요. 아이들에게 피아노학원도 그만두게 했지요.” 하지만 두 딸은 지금 어엿한 자원봉사자로 일을 돕는다.
지난 여름 대학 특수교육학과를 졸업한 큰딸 종은씨(22)는 3개월간의 수능 공부 끝에 의대 세 곳에 입학원서를 제출해 놓았다. ”무료봉사에 가까운 대우를 받고 의사가 이곳에서 버티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딸아이가 그 사정을 알고 의대에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았습니다. 결과야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대견할 따름입니다.” 신학대학 3학년에 재학중인 둘째 딸 종민씨(20) 역시 틈나는 대로 이곳에서 환자를 돌본다.
지난해에만 220명의 장례식을 치른 원목사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한(恨)을 품고 이 땅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환우들은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치고,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안은 채 이곳을 찾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신앙에 의지해 점차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주변을 정리한 뒤 죽는 순간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행복한 모습으로 떠나는 걸 보면 보람을 느낍니다.”
실제 이곳을 거쳐간 환자의 가족 중 많은 이들이 고마움을 표한다. 한 환자 가족은 홈페이지(www.hospice.or.kr)에 ”현재 샘물의 집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임○○ 환우의 딸입니다. 퉁퉁 부어오른 다리로 두려움에 떨다, 이젠 아름답게 변하여 천국의 문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엄마 모습을 보면서 주님 안에서의 승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란 글을 남기기도 했다.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일 뿐”이라는 원목사는 무엇보다 사회적 관심이 부족함을 안타까워한다. ”우리와 유사한 프로그램으로 운영되는 독립시설이 전국적으로 5개에 불과합니다. 환자 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요. 국가에서 시설만이라도 마련하고 운영은 자격이 되는 민간단체에 위탁한다면 많은 말기암 환자와 그 가족들의 부담을 덜 수 있을 겁니다. 한해 동안 죽어 가는 5만명의 말기암 환자를 국가적 차원에서 돌봐준다면 그들의 가족 수십만 명이 걱정을 덜고 제 몫을 하며 사회활동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보건복지부가 할 일 아닐까요.”
원목사는 직접 체험한 ‘님비 현상‘에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나타낸다. ”언제 누가 암에 걸릴지 모릅니다. 당장 내게 닥친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역지사지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당초 취재에 응하길 주저했던 원목사는 ”말기암 환자에게 이곳의 정보를 줄 정도로만 기사가 나갔으면 좋겠다”고 원했었다. ”환자들이 저를 편안하게 생각해 서로 친근해져야 하는데 자꾸 매스컴에 알려지면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지 걱정됩니다. 이런 곳이 있음을 알려야 필요한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겠지만....”
시한부 환자를 돌보고 그들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늘 죽음을 정리하고 사는 가족‘이 된 원목사 식구들. 원목사는 ”하루하루의 삶이 의미 있고, 그에 감사할 줄 알게 된 것이 바로 죽음이 우리 가족에게 준 가장 값진 인생의 선물”이라 말한다.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말기암 환자 보호시설 ‘샘물의 집‘과 ‘샘물호스피스선교회‘ 회장인 원주희 목사(49)는 마지막 가는 죽음의 길이 누구에게나 평등하길 소망하는 사람, 모든 환자들이 끝끝내 존엄함을 지키며 눈감는 순간까지 진정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이다. 그가 말기암 환자를 8년째 무료로 돌보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려 애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목사는 죽음과는 무관할 성싶은 20대 중반 처음 ‘죽음‘과 조우했다. 그것은 ”죽음은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바로 내 눈앞에 있다”는 자각이었다. 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하고 의정장교로 전방부대에서 복무하던 시절, 지뢰 폭발사고로 다친 병사를 치료하고, 사고사로 죽는 병사를 목격하면서 그는 죽음이 삶과 더불어 있음을 절감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한창 고민한 그때, 그는 군 앰뷸런스를 타고 급히 환자를 옮기다 전복사고를 당했다. ”고관절을 크게 다쳐 군 병원에 입원했지요. 그런데 통증은 약물로 완화할 수 있었지만 죽음의 공포는 좀처럼 해소되지 않더군요. 어느 날 군부대 종교인들이 병문안을 와 제 손을 잡고 찬송가를 부르며 위로해주는데 그 따뜻한 손길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대학시절 약으로 질병을 치료하고 고통을 멈출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는 의학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심적 고통을 치료해 줄 영적 치료의 필요성을 이때 절실히 깨달았다.
서른여섯 나이에 10년간 운영해 온 약국을 정리하고 신학대학에 입학한 그는 죽음에 직면한 환자들을 도울 방법을 고민하다 세브란스병원의 호스피스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세브란스병원에서 호스피스 교육을 받고 자원봉사를 시작했죠. 그런데 호스피스 프로그램이 가정방문 형식으로 돼 있어 환자가 원하는 만큼 충실한 의료서비스를 받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무래도 환자가 집에 있으니까 시ㆍ공간적 제약이 따르지요.”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환자가 가정과 같은 편안함을 느끼며 24시간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하는 거였다.
신학대학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은 원 목사는 본격적으로 말기암 환자 보호시설을 세울 부지를 물색했다. 아는 교회 장로 한 사람이 선뜻 내준 용인의 농가를 사비로 수리하던 때 동네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몹쓸 병으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우리 동네에 받아들일 수 없다.” 용인시 내에서만 같은 이유로 쫓겨다니길 세 차례, 현재 ‘샘물의 집‘이 위치한 용인시 백암면 고암리는 네 번째 찾은 보금자리다. 다행히 이 마을 주민들이 이해해 주어 겨우 둥지를 튼 것이다.
1993년 발족한 샘물호스피스선교회는 ‘샘물의 집‘에 침상 18개와 예배실, 장례식장 등을 갖추고 의료기관에서 ‘치료 불가‘ 판정을 받은 말기암 환자를 돌보고 있다. 지금까지 이곳을 거친 환자는 1000여명. 매월 평균 30~40명의 환자가 이곳에서 보살핌을 받는다. 의사 1명과 간호사 8명의 의료진 외에 행정과 주방일 등을 맡은 상주인원이 16명에 이른다. 또 선교회 호스피스 교육을 통해 배출한 7000여명의 자원봉사자 중 10% 정도가 요일별로 이곳을 찾아 자원봉사 활동을 편다.
”처음엔 24시간 상주하며 환우들을 돌볼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 우리 부부가 일을 도맡았죠. 지금은 짐을 크게 던 셈이지요.”
환자 돌보는 일과 후원자 모집 등 선교회 안팎 일로 바쁜 원목사의 아내 한광숙씨(47)는 약사 남편을 둔 아내로서 누리던 삶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회상한다. ”사재를 털어 출발한 만큼 가족 모두가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무(無)에서 시작해야 했습니다. 10년간 누려온 안락함을 내던진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더군요. 아이들에게 피아노학원도 그만두게 했지요.” 하지만 두 딸은 지금 어엿한 자원봉사자로 일을 돕는다.
지난 여름 대학 특수교육학과를 졸업한 큰딸 종은씨(22)는 3개월간의 수능 공부 끝에 의대 세 곳에 입학원서를 제출해 놓았다. ”무료봉사에 가까운 대우를 받고 의사가 이곳에서 버티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딸아이가 그 사정을 알고 의대에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았습니다. 결과야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대견할 따름입니다.” 신학대학 3학년에 재학중인 둘째 딸 종민씨(20) 역시 틈나는 대로 이곳에서 환자를 돌본다.
지난해에만 220명의 장례식을 치른 원목사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한(恨)을 품고 이 땅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환우들은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치고,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안은 채 이곳을 찾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신앙에 의지해 점차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주변을 정리한 뒤 죽는 순간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행복한 모습으로 떠나는 걸 보면 보람을 느낍니다.”
실제 이곳을 거쳐간 환자의 가족 중 많은 이들이 고마움을 표한다. 한 환자 가족은 홈페이지(www.hospice.or.kr)에 ”현재 샘물의 집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임○○ 환우의 딸입니다. 퉁퉁 부어오른 다리로 두려움에 떨다, 이젠 아름답게 변하여 천국의 문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엄마 모습을 보면서 주님 안에서의 승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란 글을 남기기도 했다.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일 뿐”이라는 원목사는 무엇보다 사회적 관심이 부족함을 안타까워한다. ”우리와 유사한 프로그램으로 운영되는 독립시설이 전국적으로 5개에 불과합니다. 환자 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요. 국가에서 시설만이라도 마련하고 운영은 자격이 되는 민간단체에 위탁한다면 많은 말기암 환자와 그 가족들의 부담을 덜 수 있을 겁니다. 한해 동안 죽어 가는 5만명의 말기암 환자를 국가적 차원에서 돌봐준다면 그들의 가족 수십만 명이 걱정을 덜고 제 몫을 하며 사회활동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보건복지부가 할 일 아닐까요.”
원목사는 직접 체험한 ‘님비 현상‘에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나타낸다. ”언제 누가 암에 걸릴지 모릅니다. 당장 내게 닥친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역지사지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당초 취재에 응하길 주저했던 원목사는 ”말기암 환자에게 이곳의 정보를 줄 정도로만 기사가 나갔으면 좋겠다”고 원했었다. ”환자들이 저를 편안하게 생각해 서로 친근해져야 하는데 자꾸 매스컴에 알려지면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지 걱정됩니다. 이런 곳이 있음을 알려야 필요한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겠지만....”
시한부 환자를 돌보고 그들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늘 죽음을 정리하고 사는 가족‘이 된 원목사 식구들. 원목사는 ”하루하루의 삶이 의미 있고, 그에 감사할 줄 알게 된 것이 바로 죽음이 우리 가족에게 준 가장 값진 인생의 선물”이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