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용’.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가 작곡가 윤이상을 가리켜 한 말이다. 윤이상을 이처럼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독일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일컬어졌던 윤이상은 의당 우리의 자랑이어야 했음에도 끝내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지난 1995년 11월3일 베를린에서 타계했다.
지난 67년 벌어진 동백림 사건은 그의 인생을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몰아넣었다. 유럽의 여러 유학생들이 연루된 이 사건에서 윤이상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당시 독일 대통령과 카라얀, 슈톡하우젠 등 저명한 음악가들의 석방 요구로 2년 만에 풀려나 독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예술가의 영혼에 견딜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윤이상은 “동백림 사건에 대한 분노를 치유하는 데만 10년이 걸렸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윤이상의 고향이 경남의 항구도시인 통영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1920년 통영으로 이주한 윤이상은 통영에서 서당과 보통학교를 다녔다. 광복 후에는 통영문화협회를 설립해 문화사업을 했고 통영여자고등학교의 음악교사를 지내기도 했다. 현재 통영의 여러 초등학교에서 그가 작곡한 교가를 부르고 있다.
정치적 이유로 음악조차 연주할 수 없었던 탓에 윤이상의 흔적은 이 땅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고향 통영에서도 그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통영 도천동 집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만 윤이상의 집터와 기념비,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항구의 적산가옥들 사이에서 그의 모습을 그려볼 뿐이다. 이 고적한 항구도시에서 젊은 날의 윤이상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베를린에서 만년을 보낸 윤이상은 조상의 뼈가 묻힌 고향을 무척이나 그리워했다고 한다.
통영에서는 지난 99년부터 윤이상을 기리는 음악제가 조용히 열리고 있다. 통영문화재단과 국제윤이상협회가 99년 5월 윤이상의 음악을 위주로 하는 제1회 통영현대음악제를 연 것이다. 2002년부터 이 음악제는 통영국제음악제로 이름을 바꾸고 대규모 국제 행사로 탈바꿈한다. 우선 사흘간의 음악제 일정이 열흘로 늘어난다. 통영시는 지난 2월 이미 도천동 거리 800여m를 ‘윤이상 거리’로 명명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또 통영국제음악제 추진위원회가 재단법인으로 전환될 예정이다. 법인 이사장에는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이 내정되었다.
2002년 3월8일부터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에는 빈 소년합창단, 정명훈과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 등이 내한해 ‘광주여 영원히!’를 비롯해 윤이상의 여러 작품을 국내 초연할 계획이다. 부산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영화도시로 거듭났고, 광주가 비엔날레로 미술도시가 되었듯 통영을 윤이상 음악의 도시로 만들겠다는 것이 통영시의 각오다.
한발 더 나아가 통영시는 이 음악제를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열리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같은 세계적 음악축제로 키운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윤이상 거리 가운데에 있는 통영시청 별관이 윤이상 페스티벌 하우스로 거듭난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시청 별관은 현재 비어 있는 상태다. 이곳에 실내악 연주홀, 기념관, 프레스센터, 연습실 등이 들어서게 된다. 또 페스티벌 하우스 뒤편의 야산에 동굴음악당을 건립할 계획도 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하우스 역시 암벽을 깨고 산속에 연주홀을 앉힌 연주회장이다. 동굴음악당은 박성용 명예회장의 숙원이기도 해 그 실현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통영국제음악제를 준비하고 있는 한국 연주자들이 윤이상의 음악을 연주할 만한 역량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동안 윤이상의 음악은 연주상의 어려움 때문에 대다수 연주자들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그러나 11월28일 열린 통영국제음악제 D-100 연주회 ‘윤이상-자유에의 헌정’ 무대에 오른 연주자들은 미묘하고 신비롭게 움직이는 윤이상 특유의 음향을 능숙하게 표현했다. 특히 독일 지휘자인 J. 리브레히트가 지휘한 창원시립교향악단은 윤이상의 실내교향곡 2번 ‘자유에의 헌정’에 담긴 폭발적인 에너지를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서울의 교향악단도 아닌 창단 10년 안팎의 지방 교향악단이 이처럼 능숙한 연주력을 보여준 점은 정말 의외였다. 창원시립교향악단은 통영국제음악제의 주관 오케스트라다.
“윤이상의 곡들은 표현주의적 색채가 강하며 민족혼이 느껴지는 음악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한국의 연주자들이 열린 마음으로 소화해냈다고 봅니다.” 교향곡 2번을 지휘한 리브레히트는 창원시향의 연주력에 큰 만족을 표시했다.
또 20, 30대의 젊은 연주자들이 주축이 된 TIMF 앙상블의 연주에서도 윤이상 음악에 대한 의지와 열의가 느껴졌다. 적어도 통영에서 윤이상 음악은 더 이상 ‘뭐가 뭔지 모를 난해한 음악’이 아니었다. 연주자들에게나 청중에게나 윤이상은 ‘우리 고장이 배출한 자랑스러운 이름’이었다.
“아버지의 음악에 대해 이 같은 사랑을 표현해 주시는 통영의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세계인들이 ‘통영’ 하면 윤이상이라는 작곡가의 고향이라는 사실부터 떠올릴 수 있도록 통영국제음악제가 성공적으로 뻗어나가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고향을 찾은 윤이상의 딸 윤정씨(51)도 어눌한 한국말로 감사를 표현했다. 윤정씨는 내년 3월 통영국제음악제 일정에 맞추어 다시 내한할 예정이다.
통영국제음악제가 이처럼 활성화된 데는 통영국제음악제 추진위원회 김승근(35) 사무국장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서울대학교에서 국악을 전공한 김사무국장은 베를린 음대에서 작곡 공부를 하던 91년에 처음 윤이상을 만났다. 이후 그는 윤이상 바이올린 협주곡 3번 초연 등 주요 연주회를 빠지지 않고 쫓아다니며 윤이상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았다. “음악에서는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린 예술가인 동시에 사적으로는 다정다감한 할아버지였다”고 윤이상을 추억하는 김사무국장은 아예 통영으로 거주지를 옮겨 음악제 일에 매달리고 있다.
동백림 사건 이후 윤이상의 음악이 한국에서 다시 연주되기 시작한 것은 20년이 채 못 된다. 82년 제7회 대한민국음악제에서 이틀간 ‘윤이상 작곡의 밤’이 열렸던 것이다. 서슬퍼런 5공화국 시절에 이러한 연주회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그해 8월 북한에서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가 초연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윤이상을 가장 괴롭힌 것은 예술이 아니라 정치적 잣대로 그의 음악을 재려는 행동들이었다.
94년 여름 윤이상음악축제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윤이상의 귀국은 거의 확실시되고 있었다. 귀국을 고대하고 있던 윤이상은 한 음악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조국의 흙 가까이 입을 대고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충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정치적 계산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다음해 겨울 윤이상은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제 고향이 자신에게 바치는 충정을 본다면 윤이상은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도 그는 더 이상 정치적 논리가 아닌 음악 자체로 자신을 받아들인 고향에 기꺼움을 표시했을 것이다. 내년 3월 통영이 윤이상의 음악으로 뒤덮일 때, 예술가의 고독한 혼은 분명 그리던 고향을 찾아올 것 같다. 반세기 가까운 그리움이 이제야 그 숙원을 풀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지난 67년 벌어진 동백림 사건은 그의 인생을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몰아넣었다. 유럽의 여러 유학생들이 연루된 이 사건에서 윤이상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당시 독일 대통령과 카라얀, 슈톡하우젠 등 저명한 음악가들의 석방 요구로 2년 만에 풀려나 독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예술가의 영혼에 견딜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윤이상은 “동백림 사건에 대한 분노를 치유하는 데만 10년이 걸렸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윤이상의 고향이 경남의 항구도시인 통영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1920년 통영으로 이주한 윤이상은 통영에서 서당과 보통학교를 다녔다. 광복 후에는 통영문화협회를 설립해 문화사업을 했고 통영여자고등학교의 음악교사를 지내기도 했다. 현재 통영의 여러 초등학교에서 그가 작곡한 교가를 부르고 있다.
정치적 이유로 음악조차 연주할 수 없었던 탓에 윤이상의 흔적은 이 땅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고향 통영에서도 그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통영 도천동 집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만 윤이상의 집터와 기념비,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항구의 적산가옥들 사이에서 그의 모습을 그려볼 뿐이다. 이 고적한 항구도시에서 젊은 날의 윤이상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베를린에서 만년을 보낸 윤이상은 조상의 뼈가 묻힌 고향을 무척이나 그리워했다고 한다.
통영에서는 지난 99년부터 윤이상을 기리는 음악제가 조용히 열리고 있다. 통영문화재단과 국제윤이상협회가 99년 5월 윤이상의 음악을 위주로 하는 제1회 통영현대음악제를 연 것이다. 2002년부터 이 음악제는 통영국제음악제로 이름을 바꾸고 대규모 국제 행사로 탈바꿈한다. 우선 사흘간의 음악제 일정이 열흘로 늘어난다. 통영시는 지난 2월 이미 도천동 거리 800여m를 ‘윤이상 거리’로 명명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또 통영국제음악제 추진위원회가 재단법인으로 전환될 예정이다. 법인 이사장에는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이 내정되었다.
2002년 3월8일부터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에는 빈 소년합창단, 정명훈과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 등이 내한해 ‘광주여 영원히!’를 비롯해 윤이상의 여러 작품을 국내 초연할 계획이다. 부산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영화도시로 거듭났고, 광주가 비엔날레로 미술도시가 되었듯 통영을 윤이상 음악의 도시로 만들겠다는 것이 통영시의 각오다.
한발 더 나아가 통영시는 이 음악제를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열리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같은 세계적 음악축제로 키운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윤이상 거리 가운데에 있는 통영시청 별관이 윤이상 페스티벌 하우스로 거듭난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시청 별관은 현재 비어 있는 상태다. 이곳에 실내악 연주홀, 기념관, 프레스센터, 연습실 등이 들어서게 된다. 또 페스티벌 하우스 뒤편의 야산에 동굴음악당을 건립할 계획도 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하우스 역시 암벽을 깨고 산속에 연주홀을 앉힌 연주회장이다. 동굴음악당은 박성용 명예회장의 숙원이기도 해 그 실현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통영국제음악제를 준비하고 있는 한국 연주자들이 윤이상의 음악을 연주할 만한 역량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동안 윤이상의 음악은 연주상의 어려움 때문에 대다수 연주자들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그러나 11월28일 열린 통영국제음악제 D-100 연주회 ‘윤이상-자유에의 헌정’ 무대에 오른 연주자들은 미묘하고 신비롭게 움직이는 윤이상 특유의 음향을 능숙하게 표현했다. 특히 독일 지휘자인 J. 리브레히트가 지휘한 창원시립교향악단은 윤이상의 실내교향곡 2번 ‘자유에의 헌정’에 담긴 폭발적인 에너지를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서울의 교향악단도 아닌 창단 10년 안팎의 지방 교향악단이 이처럼 능숙한 연주력을 보여준 점은 정말 의외였다. 창원시립교향악단은 통영국제음악제의 주관 오케스트라다.
“윤이상의 곡들은 표현주의적 색채가 강하며 민족혼이 느껴지는 음악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한국의 연주자들이 열린 마음으로 소화해냈다고 봅니다.” 교향곡 2번을 지휘한 리브레히트는 창원시향의 연주력에 큰 만족을 표시했다.
또 20, 30대의 젊은 연주자들이 주축이 된 TIMF 앙상블의 연주에서도 윤이상 음악에 대한 의지와 열의가 느껴졌다. 적어도 통영에서 윤이상 음악은 더 이상 ‘뭐가 뭔지 모를 난해한 음악’이 아니었다. 연주자들에게나 청중에게나 윤이상은 ‘우리 고장이 배출한 자랑스러운 이름’이었다.
“아버지의 음악에 대해 이 같은 사랑을 표현해 주시는 통영의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세계인들이 ‘통영’ 하면 윤이상이라는 작곡가의 고향이라는 사실부터 떠올릴 수 있도록 통영국제음악제가 성공적으로 뻗어나가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고향을 찾은 윤이상의 딸 윤정씨(51)도 어눌한 한국말로 감사를 표현했다. 윤정씨는 내년 3월 통영국제음악제 일정에 맞추어 다시 내한할 예정이다.
통영국제음악제가 이처럼 활성화된 데는 통영국제음악제 추진위원회 김승근(35) 사무국장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서울대학교에서 국악을 전공한 김사무국장은 베를린 음대에서 작곡 공부를 하던 91년에 처음 윤이상을 만났다. 이후 그는 윤이상 바이올린 협주곡 3번 초연 등 주요 연주회를 빠지지 않고 쫓아다니며 윤이상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았다. “음악에서는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린 예술가인 동시에 사적으로는 다정다감한 할아버지였다”고 윤이상을 추억하는 김사무국장은 아예 통영으로 거주지를 옮겨 음악제 일에 매달리고 있다.
동백림 사건 이후 윤이상의 음악이 한국에서 다시 연주되기 시작한 것은 20년이 채 못 된다. 82년 제7회 대한민국음악제에서 이틀간 ‘윤이상 작곡의 밤’이 열렸던 것이다. 서슬퍼런 5공화국 시절에 이러한 연주회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그해 8월 북한에서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가 초연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윤이상을 가장 괴롭힌 것은 예술이 아니라 정치적 잣대로 그의 음악을 재려는 행동들이었다.
94년 여름 윤이상음악축제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윤이상의 귀국은 거의 확실시되고 있었다. 귀국을 고대하고 있던 윤이상은 한 음악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조국의 흙 가까이 입을 대고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충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정치적 계산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다음해 겨울 윤이상은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제 고향이 자신에게 바치는 충정을 본다면 윤이상은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도 그는 더 이상 정치적 논리가 아닌 음악 자체로 자신을 받아들인 고향에 기꺼움을 표시했을 것이다. 내년 3월 통영이 윤이상의 음악으로 뒤덮일 때, 예술가의 고독한 혼은 분명 그리던 고향을 찾아올 것 같다. 반세기 가까운 그리움이 이제야 그 숙원을 풀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