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이는 혀 수술을 할 필요가 없는데요.”(의사) “영어학원에서 발음이 제대로 안 된다고 왕따당하는데 어떡해요.”(어머니)
“엄마 무서워. 나 수술하기 싫어.”(아이)
“글쎄 아주머니, 이 아이는 설소대 성형술을 한다 해도 발음 교정 효과가 거의 없다니까요. 우리말 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잖아요. 혀가 짧아 그런 게 아닙니다.”(의사)
11월20일 오전 서울지역 K대학병원 이비인후과 외래 진료실. 의사와 환자 보호자 사이에 30분 동안 입씨름이 벌어지고 있다.
“아이의 혀는 지극히 정상이고 어떤 수술도 필요 없다”는 전문의의 설명이 영 못마땅한지 꼬마의 어머니는 신경질적인 반응까지 보인다. 그가 의사에게 종용하는 ‘설소대 성형술’(절개술)이란 혀와 혀 밑을 연결해 주고 인대 역할을 하는 ‘설소대’라는 기관을 절단해 혀 길이를 늘려주는 수술을 말한다. 이 수술을 아이에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수술은 혀가 정상인보다 기형적으로 짧아 언어소통에 지장이 있는 사람에게만 시술하는 희귀한 수술이다. 정상인에게 시술하면 발음 교정 효과는 거의 없는 것으로 의학계에 보고되어 있다.
이날 K대학 병원을 찾은 이모군(8·서울시 강남구 신사동)은 어린이 전문 영어교육 학원인 W학원을 만 4세부터 다닌 ‘영재형’의 아이. 흔히 쓰이는 간단한 대화는 영어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가 늘었지만 평소 ‘L’자와 ‘R’자 구별을 제대로 못해 학원 강사들의 지적을 받아왔다. 이군 어머니 김모씨(36)는 “3학년부터 학교에서 영어수업을 받아야 하는데 발음이 나빠 아이들에게 조롱받을까 걱정되고, 또 영어로만 수업한다는데 발음이 유창하면 좋지 않느냐”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한술 더 떠 김씨는 “아이가 다니는 학원에도 수술한 아이가 서너 명 되는데 대학병원에서 괜히 유난 떠는 것 같다”며 의사의 ‘까탈스러움’을 힐난했다.
결국 이날 늦은 오후 이군은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B이비인후과에서 설소대 성형술을 받았다. 수술 시간은 단 30분. 건강보험 적용 대상이 아니어서 수술비도 50만원이나 들었다. 이틀이 지난 후 김씨에게 발음이 좋아졌느냐고 물었더니 “수술 후 ‘L’자 발음이 또렷해진 것 같다. 수술 부위가 완전히 아물면 발음이 더욱 좋아질 것”이라며 기뻐했다.
이군이 수술받은 B이비인후과 원장 박모씨에게 대학병원 전문의의 수술 거부 사례를 밝히며 “필요 없는 수술을 한 것 아니냐”고 묻자 “이군의 혀가 다른 사람보다 짧은 게 사실이고 일종의 유행이다. 보호자가 원하고 부작용도 크게 없는데 의사가 거부할 이유가 없다. 한 달에 7, 8명의 아이들이 설소대 성형술을 받고 있다”며 화를 냈다. 이어 그는 “강남구 서초동 K, 대치동 L, 성남시 분당구 C…” 등등 강남지역과 분당지역에 있는 이비인후과와 일부 치과의원 이름까지 들며 “다른 곳에서도 다 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아주대 의대 이비인후과 고중화 교수(음성외과 전공)는 “5세 미만의 아동 중 완전히 혀가 달라 붙어 조음장애가 발생된(설소대 단축증) 아동에게만 이 수술이 가능하다. 수술 여부는 조음검사와 자음 정확도 검사 등을 거친 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모의 비뚤어진 영어 조기교육 ‘환상’이 가져오는 풍토는 이처럼 ‘엽기적’이다. 동심을 멍들게 하고 아이들의 건강까지 갉아먹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영어 발음이 조금 어눌하다고 7, 8세밖에 안 된 아이에게 ‘혀 늘리기 수술’을 시키는가 하면, 학원 다니고 개인 지도 받는 것도 모자라 집에서 영어만 쓰도록 강요받은 아이가 정신질환에 걸린 사례도 있다.
영어를 배우다 우리말까지 못하게 된 아이에서부터 영어에 대한 과도한 부담감 때문에 머리가 한움큼씩 빠지는 원형탈모증에 걸린 아이까지, 각 대학병원 소아과와 정신과는 왜곡된 영어 조기교육 열풍에 희생된 아이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차 있다. 강남과 분당 등 서울지역과 대도시지역 소위 ‘명문 8학군’ 부모들 사이에 불고 있는 ‘초인 만들기’ ‘영재 만들기’ 영어교육 광풍(狂風)은 정도를 넘어서도 한참 넘어섰다는 게 교육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 실태를 피해 사례별로 보자.
최근 강북삼성병원 정신과를 찾은 김태균군(가명·10)은 왼쪽 머리의 대부분이 빠지고 눈꺼풀이 이유 없이 경련을 일으키는 증상(틱현상)을 보이고 있다. ‘선천성 원형탈모증’을 의심하고 피부과를 전전했지만 원인을 밝히지 못해 결국 정신과를 찾았다.
전문의 상담 결과 일주일에 다섯 번가는 영어학원 때문에 누적된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밝혀졌다. 또한 사설학원에서 6개월간 영어지도자 과정을 거친 어머니가 집에서조차 영어로만 말할 것을 종용한 것이 김군에게는 치명타가 됐다. 어머니에 대한 아이의 말없는 항변이 탈모증으로 나타난 것. 김군은 담당의사에게 “영어는 이제 꼴도 보기 싫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아빠의 영어공부 성화에 못 이겨 지난 여름방학 동안 혼자 미국 어학연수를 다녀온 서울 D초등학교 5학년 김안나양(가명·11)도 원형탈모증이 생겨 서울대병원을 찾은 케이스. 어린 나이에 혼자 나선 여행의 두려움과 기대에 미치지 못한 연수 효과에 대한 부모의 채근이 결국 이런 화를 불러왔다. 각 대학 병원 전문의들에 따르면 영어학습 스트레스에 의한 탈모증으로 주요 종합병원을 찾는 어린이 탈모환자가 하루 평균 3, 4명에 이르고 있다는 것.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노경선 교수는 “피부과 전문의들이 정신과로 가라 하면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우리 아이는 정신병자가 아니라며 투덜거린다. 영어유치원이나 영어학원 다니는 게 싫고 무섭다는 아이들에게 ‘재미있다더니 이제 와 딴소리냐’며 윽박지르기만 하는 어머니를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사는 홍지현씨(가명·32·여)는 걸핏하면 짜증내고 배가 아프다고 투정하는 다섯 살 난 아들을 데리고 소아과를 돌아다니다 결국 11월 초 신촌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를 찾았다. 진단명은 ‘시행불안증’. 2개월 전부터 보내기 시작한 최고급 어린이 영어학원이 문제였다. 올해 초 아이를 대기자 명단에 올리고 6개월을 기다려 얻은 결과인 탓에 홍씨의 기대는 그만큼 컸다. 수업료만도 월 80만원. 그런데 홍씨의 이런 기대는 아이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영어유치원에서 1년간 배운 단어카드 수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급 수업방식이 아이를 놀라고 무섭게 한 것. 이후 아이는 학원을 가지 않으려 한 것은 물론, 집에서조차 꼼짝 않고 사람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다. 진료 의사는 “영어학원의 주입식 교육에 질려 학원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에 거부 반응을 보인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학병원 소화기 내과 외래에는 심지어 성인병인 스트레스에 의한 신경성 위염 증세를 호소하는 영·유아 또한 속출하는 상황이다. 물론 원인은 과도한 영어학습 부담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이다. 실제 육아 관련 정보제공 업체나 소아과와 신경정신과 병원의 인터넷 사이트에는 하루에도 10~30여건의 조기 영어교육 관련 영·유아 스트레스 관련 문의가 빗발치는 상태다.
대소변도 못 가리고 같은 말만 반복해요
“신동이었던 아이가 바보가 돼버렸습니다.” 성남시 분당구에 사는 김영진씨(32) 가족은 요즘 절망에 빠져 있다. 올 들어 둘째 아들 민호(5)가 갑자기 대소변도 못 가리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 두 돌이 지나면서 형(7)이 보는 영어교육용 비디오 테이프에 흥미를 가지는 것 같아 영재성을 키우기 위해 하루종일 학습비디오를 틀어준 게 화근이었다.
세 돌 넘어가면서 영어 알파벳과 간단한 단어를 정확히 기억하고 말하는 것을 보고 비디오 교육뿐만 아니라 카드식 교육도 병행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민호는 간단한 자신의 의사조차 표현하지 못하게 된 것은 물론, 대소변도 가리지 못했다. 고작 하는 말은 카(CAR) 등의 영어단어뿐. 그것도 별 의미 없이 중얼거리는 것일 뿐, 자동차 놀이에만 열중해 가족이 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민호의 질환은 대학병원 소아정신과의 정밀 검진 결과, 유사 자폐증인 ‘유아 비디오 증후군’으로 진단됐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신의진 교수는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비디오를 보여줌으로써 조기교육의 효과를 얻거나 시간을 벌겠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이 시기에는 다양한 체험학습이 뇌 발달에 더 바람직하다”고 당부한다.
우리말을 잊어버렸어요
과도한 조기영어 열풍이 가져온 부작용 중 가장 대중적인 질환은 뜻밖에도 언어장애다. 의사소통을 하자고 시작한 영어학습 때문에 오히려 모국어를 잊어가는 현상이 일어난 것. 각 대학병원 소아정신과와 언어치료 전문 클리닉에는 현재 4, 5명씩의 내원 환자가 항상 대기하고 있다.
언어치료 전문 클리닉인 H클리닉에서 치료받고 있는 현주양(6·서울시 서초구 서초동)도 두 가지 이상의 단어를 결합해 의미 있는 문장을 만들지 못하는 언어장애를 앓고 있는 케이스. 일주일에 단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는 영어 과외 수업을 받다 보니 우리말을 잊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또래 친구들로부터 따돌림당했고, 그러다 결국 정신과를 찾았다. 신석호정신과병원의 신석호 원장은 “문제는 언어장애가 전체적인 학습장애, 또래간 교우관계 장애로까지 이어져 종래에는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히는 것”이라며 조기 영어교육의 허상을 비판했다.
“엄마 무서워. 나 수술하기 싫어.”(아이)
“글쎄 아주머니, 이 아이는 설소대 성형술을 한다 해도 발음 교정 효과가 거의 없다니까요. 우리말 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잖아요. 혀가 짧아 그런 게 아닙니다.”(의사)
11월20일 오전 서울지역 K대학병원 이비인후과 외래 진료실. 의사와 환자 보호자 사이에 30분 동안 입씨름이 벌어지고 있다.
“아이의 혀는 지극히 정상이고 어떤 수술도 필요 없다”는 전문의의 설명이 영 못마땅한지 꼬마의 어머니는 신경질적인 반응까지 보인다. 그가 의사에게 종용하는 ‘설소대 성형술’(절개술)이란 혀와 혀 밑을 연결해 주고 인대 역할을 하는 ‘설소대’라는 기관을 절단해 혀 길이를 늘려주는 수술을 말한다. 이 수술을 아이에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수술은 혀가 정상인보다 기형적으로 짧아 언어소통에 지장이 있는 사람에게만 시술하는 희귀한 수술이다. 정상인에게 시술하면 발음 교정 효과는 거의 없는 것으로 의학계에 보고되어 있다.
이날 K대학 병원을 찾은 이모군(8·서울시 강남구 신사동)은 어린이 전문 영어교육 학원인 W학원을 만 4세부터 다닌 ‘영재형’의 아이. 흔히 쓰이는 간단한 대화는 영어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가 늘었지만 평소 ‘L’자와 ‘R’자 구별을 제대로 못해 학원 강사들의 지적을 받아왔다. 이군 어머니 김모씨(36)는 “3학년부터 학교에서 영어수업을 받아야 하는데 발음이 나빠 아이들에게 조롱받을까 걱정되고, 또 영어로만 수업한다는데 발음이 유창하면 좋지 않느냐”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한술 더 떠 김씨는 “아이가 다니는 학원에도 수술한 아이가 서너 명 되는데 대학병원에서 괜히 유난 떠는 것 같다”며 의사의 ‘까탈스러움’을 힐난했다.
결국 이날 늦은 오후 이군은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B이비인후과에서 설소대 성형술을 받았다. 수술 시간은 단 30분. 건강보험 적용 대상이 아니어서 수술비도 50만원이나 들었다. 이틀이 지난 후 김씨에게 발음이 좋아졌느냐고 물었더니 “수술 후 ‘L’자 발음이 또렷해진 것 같다. 수술 부위가 완전히 아물면 발음이 더욱 좋아질 것”이라며 기뻐했다.
이군이 수술받은 B이비인후과 원장 박모씨에게 대학병원 전문의의 수술 거부 사례를 밝히며 “필요 없는 수술을 한 것 아니냐”고 묻자 “이군의 혀가 다른 사람보다 짧은 게 사실이고 일종의 유행이다. 보호자가 원하고 부작용도 크게 없는데 의사가 거부할 이유가 없다. 한 달에 7, 8명의 아이들이 설소대 성형술을 받고 있다”며 화를 냈다. 이어 그는 “강남구 서초동 K, 대치동 L, 성남시 분당구 C…” 등등 강남지역과 분당지역에 있는 이비인후과와 일부 치과의원 이름까지 들며 “다른 곳에서도 다 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아주대 의대 이비인후과 고중화 교수(음성외과 전공)는 “5세 미만의 아동 중 완전히 혀가 달라 붙어 조음장애가 발생된(설소대 단축증) 아동에게만 이 수술이 가능하다. 수술 여부는 조음검사와 자음 정확도 검사 등을 거친 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모의 비뚤어진 영어 조기교육 ‘환상’이 가져오는 풍토는 이처럼 ‘엽기적’이다. 동심을 멍들게 하고 아이들의 건강까지 갉아먹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영어 발음이 조금 어눌하다고 7, 8세밖에 안 된 아이에게 ‘혀 늘리기 수술’을 시키는가 하면, 학원 다니고 개인 지도 받는 것도 모자라 집에서 영어만 쓰도록 강요받은 아이가 정신질환에 걸린 사례도 있다.
영어를 배우다 우리말까지 못하게 된 아이에서부터 영어에 대한 과도한 부담감 때문에 머리가 한움큼씩 빠지는 원형탈모증에 걸린 아이까지, 각 대학병원 소아과와 정신과는 왜곡된 영어 조기교육 열풍에 희생된 아이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차 있다. 강남과 분당 등 서울지역과 대도시지역 소위 ‘명문 8학군’ 부모들 사이에 불고 있는 ‘초인 만들기’ ‘영재 만들기’ 영어교육 광풍(狂風)은 정도를 넘어서도 한참 넘어섰다는 게 교육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 실태를 피해 사례별로 보자.
최근 강북삼성병원 정신과를 찾은 김태균군(가명·10)은 왼쪽 머리의 대부분이 빠지고 눈꺼풀이 이유 없이 경련을 일으키는 증상(틱현상)을 보이고 있다. ‘선천성 원형탈모증’을 의심하고 피부과를 전전했지만 원인을 밝히지 못해 결국 정신과를 찾았다.
전문의 상담 결과 일주일에 다섯 번가는 영어학원 때문에 누적된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밝혀졌다. 또한 사설학원에서 6개월간 영어지도자 과정을 거친 어머니가 집에서조차 영어로만 말할 것을 종용한 것이 김군에게는 치명타가 됐다. 어머니에 대한 아이의 말없는 항변이 탈모증으로 나타난 것. 김군은 담당의사에게 “영어는 이제 꼴도 보기 싫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아빠의 영어공부 성화에 못 이겨 지난 여름방학 동안 혼자 미국 어학연수를 다녀온 서울 D초등학교 5학년 김안나양(가명·11)도 원형탈모증이 생겨 서울대병원을 찾은 케이스. 어린 나이에 혼자 나선 여행의 두려움과 기대에 미치지 못한 연수 효과에 대한 부모의 채근이 결국 이런 화를 불러왔다. 각 대학 병원 전문의들에 따르면 영어학습 스트레스에 의한 탈모증으로 주요 종합병원을 찾는 어린이 탈모환자가 하루 평균 3, 4명에 이르고 있다는 것.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노경선 교수는 “피부과 전문의들이 정신과로 가라 하면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우리 아이는 정신병자가 아니라며 투덜거린다. 영어유치원이나 영어학원 다니는 게 싫고 무섭다는 아이들에게 ‘재미있다더니 이제 와 딴소리냐’며 윽박지르기만 하는 어머니를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사는 홍지현씨(가명·32·여)는 걸핏하면 짜증내고 배가 아프다고 투정하는 다섯 살 난 아들을 데리고 소아과를 돌아다니다 결국 11월 초 신촌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를 찾았다. 진단명은 ‘시행불안증’. 2개월 전부터 보내기 시작한 최고급 어린이 영어학원이 문제였다. 올해 초 아이를 대기자 명단에 올리고 6개월을 기다려 얻은 결과인 탓에 홍씨의 기대는 그만큼 컸다. 수업료만도 월 80만원. 그런데 홍씨의 이런 기대는 아이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영어유치원에서 1년간 배운 단어카드 수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급 수업방식이 아이를 놀라고 무섭게 한 것. 이후 아이는 학원을 가지 않으려 한 것은 물론, 집에서조차 꼼짝 않고 사람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다. 진료 의사는 “영어학원의 주입식 교육에 질려 학원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에 거부 반응을 보인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학병원 소화기 내과 외래에는 심지어 성인병인 스트레스에 의한 신경성 위염 증세를 호소하는 영·유아 또한 속출하는 상황이다. 물론 원인은 과도한 영어학습 부담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이다. 실제 육아 관련 정보제공 업체나 소아과와 신경정신과 병원의 인터넷 사이트에는 하루에도 10~30여건의 조기 영어교육 관련 영·유아 스트레스 관련 문의가 빗발치는 상태다.
대소변도 못 가리고 같은 말만 반복해요
“신동이었던 아이가 바보가 돼버렸습니다.” 성남시 분당구에 사는 김영진씨(32) 가족은 요즘 절망에 빠져 있다. 올 들어 둘째 아들 민호(5)가 갑자기 대소변도 못 가리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 두 돌이 지나면서 형(7)이 보는 영어교육용 비디오 테이프에 흥미를 가지는 것 같아 영재성을 키우기 위해 하루종일 학습비디오를 틀어준 게 화근이었다.
세 돌 넘어가면서 영어 알파벳과 간단한 단어를 정확히 기억하고 말하는 것을 보고 비디오 교육뿐만 아니라 카드식 교육도 병행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민호는 간단한 자신의 의사조차 표현하지 못하게 된 것은 물론, 대소변도 가리지 못했다. 고작 하는 말은 카(CAR) 등의 영어단어뿐. 그것도 별 의미 없이 중얼거리는 것일 뿐, 자동차 놀이에만 열중해 가족이 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민호의 질환은 대학병원 소아정신과의 정밀 검진 결과, 유사 자폐증인 ‘유아 비디오 증후군’으로 진단됐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신의진 교수는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비디오를 보여줌으로써 조기교육의 효과를 얻거나 시간을 벌겠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이 시기에는 다양한 체험학습이 뇌 발달에 더 바람직하다”고 당부한다.
우리말을 잊어버렸어요
과도한 조기영어 열풍이 가져온 부작용 중 가장 대중적인 질환은 뜻밖에도 언어장애다. 의사소통을 하자고 시작한 영어학습 때문에 오히려 모국어를 잊어가는 현상이 일어난 것. 각 대학병원 소아정신과와 언어치료 전문 클리닉에는 현재 4, 5명씩의 내원 환자가 항상 대기하고 있다.
언어치료 전문 클리닉인 H클리닉에서 치료받고 있는 현주양(6·서울시 서초구 서초동)도 두 가지 이상의 단어를 결합해 의미 있는 문장을 만들지 못하는 언어장애를 앓고 있는 케이스. 일주일에 단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는 영어 과외 수업을 받다 보니 우리말을 잊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또래 친구들로부터 따돌림당했고, 그러다 결국 정신과를 찾았다. 신석호정신과병원의 신석호 원장은 “문제는 언어장애가 전체적인 학습장애, 또래간 교우관계 장애로까지 이어져 종래에는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히는 것”이라며 조기 영어교육의 허상을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