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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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여성사 다시 써야 할 판

정지영씨 논문 학계 뜨거운 관심 … 여성호주 존재·과부 재혼 성행 등 담아 기존상식 뒤집기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5-01-03 15: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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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여성사 다시 써야 할 판
    17세의 청상과부가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피해 자신의 집으로 들어온 선비 이용묵을 붙잡으며 이렇게 하소연한다.

    “양가의 규수로 열세 살에 시집와 열네 살에 과부가 되어 이제 3년이 지났습니다. 부모가 가엾게 여겨 개가를 권하는데, 생각해 보니 어린 나이로 청상과부가 되어 남녀 음양의 이치를 모르고 하늘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어기면서 수절하기보다는 차라리 개가해 천리인정(天里人情)에 부합되게 사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되어 개가를 결심했습니다. 제 배필은 제가 선택하겠다고 마음먹고, 부모님께 말씀드려 큰 길가에 집 짓고 지나가는 남자들을 보아 왔습니다. 그런데 매일 지나가는 선비님을 보고 마음이 끌렸는데, 마침 소나기가 내려 들어오시니 천생연분인 듯하옵니다. 저를 받아주십시오.”

    이 이야기는 조선 후기 문헌들을 정리한 김현룡의 ‘한국문헌설화’에 수록돼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 과부가 수절하는 대신 재가를 원했고, 부모도 이를 적극 권하고 도왔으며, 아예 저잣거리에 집을 얻어놓고 과부 스스로 배필을 골랐다는 점이다. 자신의 목에 은장도를 찌를 준비를 하며 한밤의 불청객을 비장하게 노려보거나, 긴긴 밤 외로움에 떨며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동전을 굴리며 한숨짓는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 과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조선 후기 여성사 다시 써야 할 판
    지난 8월 서강대에서 ‘조선 후기 여성호주(戶主)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지영씨(광운대·국민대 강사)는 학위논문 가운데 과부 관련 부분을 재정리해 9월8일 ‘문화사학회’에서 ‘조선 후기 과부의 또 다른 선택’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두 논문 모두 학계에서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여기서 정씨는 “은장도는 조선 후기 과부들에게 요구된 정절에 대한 강박증을 상징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적극적으로 새 삶을 찾는 17세 청상과부의 경우가 보통 여성들의 삶에 더 가깝다”고 했다.

    지금까지 조선시대 여성연구는, 적어도 조선 전기까지는 여성의 지위가 결코 낮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주력해 왔다. 즉 조선 전기 여성들은 자유롭게 재혼했고 남성과 동등한 상속분을 가지며 가족 내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가졌다. 그러다 조선 중기 성종대에 재가한 여성의 자손은 관직에 진출할 수 없다는 법이 만들어진 후부터 과부의 수절은 양반가를 중심으로 당연한 미풍양속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씨의 주장대로라면 17세기 이후 유교가 지배이념으로 확고히 자리잡으면서 조선 중기 이후 모든 여성의 지위가 일반적으로 낮아졌다는 해석은 상당 부분 재검토돼야 한다.

    이 시기에 여성의 권리가 축소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이라고 해서 다 같은 입장은 아니었다. 자식을 위해 수절을 택할 수밖에 없던 양반 여성들과 달리, 벼슬길에 연연하거나 물려받을 재산이 변변치 않은 양인 이하 하층민 여성들은 제도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살았다.

    조선 후기 여성사 다시 써야 할 판
    정지영씨는 이런 사실을 17~18세기 단성(현 경상남도 단청) 고을의 호적대장을 연구하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호적은 신분에 관계없이 당시 그 지역에 살던 양반, 양인, 천인 등 거의 대부분을 망라하는 생생한 기록으로 시대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다. 정씨는 1678년, 1717년, 1759년, 1789년 네 시기의 단성 지역 호적대장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가부장적 질서가 완전히 뿌리내린 18세기 후반까지도 여성호주가 6.7%(1789년)나 존재했음을 밝혀냈다. 또 17세기 중반까지 양인 계층 과부 중에 끝까지 수절한 경우는 16~18%에 불과했다. 반면 양반층은 이 무렵 이미 재혼하지 않고 과부로 사는 길이 대세였다. 어쨌든 은장도와 열녀문이 모든 과부의 이야기는 아니었던 셈이다.

    호주는 호적대장에서 호(戶)의 맨 앞에 기재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가족의 대표를 의미한다. 조선시대 호주 밑에는 처와 자식뿐만 아니라 노비, 고공(고용인)까지 포함되어 한 호를 구성했다. 즉 조선시대 호적대장은 오늘날 주민등록부와 비슷하게 실제 거주자를 중심으로 작성되었다.

    문제는 남편이자 아버지이면서 노비와 고공을 거느린 호주가 사망했을 때 누가 호주를 승계하느냐였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직계비속 남자)이 호주를 승계하는 전통은 18세기 이후에야 만들어졌다. 17세기 말까지도 성별에 관계없이 그 호의 연장자를 호주로 기재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다 18세기 초 장성한 아들이 있는 과부는 호주로 기재할 수 없다는 행정지침이 내려지면서 여성호주의 비율은 눈에 띄게 감소한다. 그럼에도 아들이 16세 미만이면 바로 호주승계를 하지 않고 여전히 집안의 연장자를 호주로 기재하는 전통이 남아 있었다. 정씨는 조선시대 호적제도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곧장 호주가 이어지고, 아들의 연령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 지금의 호적제도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여성호주의 존재와 함께 호적대장에 나타난 조선 후기 과부의 삶은 우리의 상식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즉 모든 여성이 죽어서 시집 귀신이 되지는 않았던 것. 오히려 과부가 되면 거처를 친가(18세기 초까지 친가와 시가의 비율이 비슷했다)로 옮기는 경우가 많았다. 친아버지나 친오빠에게 의탁해 사는 쪽이 재혼하기에 용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8세기 초까지는 양반가에서조차 과부가 되면 친정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18세기 중·후반으로 오면 친가로 돌아가는 양반 과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부계질서가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과부가 계속 시댁에 머문다는 것은 수절을 선택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양인 과부들은 18세기 후반까지도 여전히 친가와 시가를 반반씩 선택했고, 천인으로 가면 시기를 불문하고 친가로 가는 쪽이 3배나 많았다.

    조선 후기 여성사 다시 써야 할 판
    과부가 재가했을 때 자녀 문제는 어떻게 했을까. 우선 과부가 전남편의 아이를 데리고 재가하는 사례가 점차 늘어났다(1678년 전체 재혼 중 29%, 1789년 54.5%). 또 아이를 데리고 온 과부가 초혼인 남자와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은 의외다. 최근 재혼 여성과 초혼 남성의 결합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뉴스가 화제지만 17세기에도 애 딸린 과부가 총각과 재혼하는 사례가 있었다. 흔히 말하는 ‘돈 많은 과부’들은 신분이 조금 낮더라도 어린 총각을 재혼 상대로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전처 소생의 자녀가 있는 홀아비와 전남편의 아이를 기르는 과부가 재혼했을 경우 자식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예상 밖으로 남편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은 다른 호로 보내 떨어져 살게 한 반면, 여성이 전남편과의 사이에 낳은 아이들은 성(姓)이 달라도 새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예를 들어 1678년 현내면에 살던 관노 수룡은 당시 43세로 옥이라는 이름의 30세 과부와 결혼한다. 옥이는 결혼하면서 13세가 된 아들 일선을 데리고 왔는데, 수룡에게도 전처와의 사이에 낳은 후동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수룡은 재혼과 동시에 아들 후동을 결혼한 누나 집으로 보내 따로 살게 했다. 이처럼 여성들의 양육권은 재혼 후에도 보장됐다.

    정씨는 지금까지 연구에서 조선 후기 여성은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로 그려졌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학자로서 조선 전기까지 그토록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던 여성들이 왜 조선 후기에 힘없이 남성중심적 질서 속에서 꼬리를 내렸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의문에서 출발한 두 편의 논문 ‘조선시대 여성호주 연구’와 ‘조선 후기 과부의 또 다른 선택’은, 조선 후기 여성들이 각자의 처지(양반, 양인, 천인, 어머니, 며느리, 딸)에 따라, 또 사회 분위기에 따라 적절한 선택을 하며 협상과 타협 속에서 삶을 꾸려갔다고 결론을 맺는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조선 후기 여성사는 일부 양반들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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