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같은 얘기다. 이 땅에 도연명이 그리던 무릉도원이 있다니.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에 무릉리와 도원리가 있다. 두 동네가 어우러지면 무릉도원이 된다. 더욱이 두 동네를 휘감고 주천강(酒泉江)이 흐르고 있다. 술샘강이라니, 술 좋아하던 도연명도 상상치 못한 이름이다.
주천강은 주천(酒泉)이라는 샘 때문에 생겼다. 주천은 수주면 바로 옆의 주천면 주천리에 실재한다. 조선 25대 철종 임금의 태실이 있던 망산(望山)이 주천강 쪽으로 흘러 내려간 발치께에 술샘이 있는데, 그곳엔 전설이 담겨 있다. 술샘에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양반이 가면 맑은 청주가 나오고 상놈이 가면 탁주가 나왔다. 청주가 먹고 싶어진 상놈이 하루는 꾀를 냈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뒷짐 지고 양반걸음으로 거들먹거리며 샘을 찾아갔다.
청주가 나올 줄 알고 샘물을 떠봤더니 여전히 탁주였다. 화가 난 상놈은 샘을 향해 바위를 집어던졌다. 그 뒤로 영영 술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술샘을 망쳤다는 설도 있다. 술샘 근처에 절이 있었는데, 그 절에서 천한 출신의 고아를 거둬 키웠다. 그 고아는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는 금의환향하여 술샘에 이르러 자기의 변한 신분을 확인하고 싶었다. 샘물을 떠보니, 청주가 아니라 여전히 탁주였다. 화가 난 그는 술샘을 부셔 버렸다. 그 뒤로 술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세상에, 술이 나오는 샘이라니 땅 속 어딘가에 발효된 과일이나 곡물이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술이 나온단 말인가.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옛 사람들은 지어 놓고, 그 샘터까지 지목해 놓았으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왜 이런 얘기가 나왔을까. 곰곰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술이 그토록 먹고 싶어서만은 아니었을 게다. 영월 지방은 석회암 지대라 석회암 광산이 있고, 석회암 동굴이 많은 지역이다. 평양에 가면 주암산(酒巖山)이 있는데, 그 산의 바위 틈에서 술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 그곳의 지질도 석회암이다. 그런 공통점으로 역추적을 해보건대, 석회암 지하수가 때로 부옇고 때로 맑게 나왔을 수 있다. 그래서 상놈이 가면 탁주처럼 보이고, 양반이 가면 청주처럼 보이고, 그래서 생긴 얘기가 아닐까? 게다가 그 물이 술처럼 아릿한 맛이 돌았거나, 그 물로 술을 빚으니 맛이 좋았거나….
지금 술샘에서는 맑은 물이 흘러나오는데, 떠먹기는 좀 겁이 나서 물 냄새만 맡아보니 역시 술은 아니다. 이쯤 되면 술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주천에 유명한 술이 없습니까? 전해 내려오는 술이 없습니까” 하고 수소문을 했다. 주천면에 동강더덕술 공장이 있다지만, 그곳은 주정에다 더덕을 우린 술이다. 전통 방식이 아니다. 내가 찾고 싶은 것은 발효시킨 전통 술이었다. 그러던 중 ‘영월신문’ 발행인에게서 무릉리에 술 잘 빚는 아주머니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영월군에서 기자들이 모이면 그 아주머니 술을 특별히 주문해 먹는다고 했다.
무릉리로 그 아주머니를 찾아갔다. 장순일씨였다. 올해 예순 살이다. 그녀는 친정 올케에게서 술을 배웠는데, 20년 전 부녀회장을 맡으면서 경로잔치나 마을 행사에 쓰려고 술을 빚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영월 단종제의 맛자랑에 술을 냈다가 호평을 받았다. 그 뒤로는 해마다 단종제 때에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쓸 술을 빚었다. 15년 동안 맡았던 부녀회장직을 그만둔 지 5년이 지났는데, 올해도 40말을 빚어 단종제에 냈다. 그녀는 영월에서 가장 소문난 술의 명인이었다. 물론 그는 술도가를 운영하지 않는다. 그저 마을 행사나 이웃 잔치에 부조 차원에서 술을 빚을 뿐이고, 어쩌다 소문 듣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찹쌀 재료비 정도만 받고 음료수 패트병에 담아준다.
장순일씨는 찹쌀·옥수수·엿기름·황기·누룩을 사용해서 술을 빚었다. 술은 뿌연 탁주였다. 그러나 식혜 빛이 돌 정도로 맑고 쌀알도 동동 떴다. 찹쌀로 빚어서 감칠 맛이 나고, 탄산가스가 들어 있어서 ‘싸아’ 한데 뒷맛은 향긋했다. 도수는 12∼13도쯤 될까, 탁주로는 센 편이었다. 혀 끝에 남는 향이 뭐냐고 묻자, 황기 때문이라고 했다.
뒷맛이 당기는 게 결코 범상치 않은 술이다. 무릉리 술이라고 누군가 신선주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고 한다. 무릉도원 신선주라니 그럴싸하다.
똑같은 술도 누구와 마시느냐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지고, 어디서 마시느냐에 따라 또 달라진다. 무릉도원에 왔으니,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비경이 있을 것 같다. 무릉리의 유래를 들을 겸해서 면사무소를 찾아갔더니, 조선시대 명필 양사언이 이 고을에 와서 도화꽃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이라고 탄성을 질렀다는 곳이 있다고 했다. 그곳은 요선암(邀仙巖)이었다.
신선을 만나는 바위라는 뜻이다. 요선암에는 요선정(邀仙亭)이 있고, 고려시대 마애석불이 있었다. 마애석불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커다란 복주머니 형상의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복주머니 부처에게 기도하면, 주머니에서 금방이라도 복을 꺼내 줄 것만 같다.
이 요선정과 요선암은 요선계원들의 소유물이다. 요선계는 300년 전에 이 지방의 토호인 원주 이씨, 원주 원씨, 청주 곽씨의 원로들이 만든 계였다. 향약이 두루 퍼지던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마을 계로 관혼상제에 필요한 물건을 공동 관리하고 규약을 만들어 주민들을 이끌었다. 그 조직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요선계의 총무인 이상국씨는 요선계 규약을 펼쳐보이는데, 마을에서 큰죄를 지은 사람은 영출(永黜, 영원히 추방)한다고 했다. 그러나 청주 세 동이, 탁주 세 동이, 큰 주안상 세 상을 내면 그 죄를 면해준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무거운 벌에 견주어 너무 쉽게 용서해 주는 것 같았다. 그 당시 다른 동네는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무릉도원다운 흥미로운 사면제도다.
주천강을 내려다보면서 요선정에서 무릉도원 신선주를 기울이니, 신선이 따로 없다. 더욱이 요선정에 걸린 숙종대왕 어제시(御製詩) 현판이 술맛을 더욱 돋운다. 숙종이 지은 7언 율시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술을 들고 올라와 아이에게 술 따르게 하고 취해 난간에 몸을 맡긴 채 낮잠에 잠기노라” (携登宮 呼兒酌 醉倚欄干白日眠)
주천강은 주천(酒泉)이라는 샘 때문에 생겼다. 주천은 수주면 바로 옆의 주천면 주천리에 실재한다. 조선 25대 철종 임금의 태실이 있던 망산(望山)이 주천강 쪽으로 흘러 내려간 발치께에 술샘이 있는데, 그곳엔 전설이 담겨 있다. 술샘에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양반이 가면 맑은 청주가 나오고 상놈이 가면 탁주가 나왔다. 청주가 먹고 싶어진 상놈이 하루는 꾀를 냈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뒷짐 지고 양반걸음으로 거들먹거리며 샘을 찾아갔다.
청주가 나올 줄 알고 샘물을 떠봤더니 여전히 탁주였다. 화가 난 상놈은 샘을 향해 바위를 집어던졌다. 그 뒤로 영영 술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술샘을 망쳤다는 설도 있다. 술샘 근처에 절이 있었는데, 그 절에서 천한 출신의 고아를 거둬 키웠다. 그 고아는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는 금의환향하여 술샘에 이르러 자기의 변한 신분을 확인하고 싶었다. 샘물을 떠보니, 청주가 아니라 여전히 탁주였다. 화가 난 그는 술샘을 부셔 버렸다. 그 뒤로 술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세상에, 술이 나오는 샘이라니 땅 속 어딘가에 발효된 과일이나 곡물이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술이 나온단 말인가.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옛 사람들은 지어 놓고, 그 샘터까지 지목해 놓았으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왜 이런 얘기가 나왔을까. 곰곰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술이 그토록 먹고 싶어서만은 아니었을 게다. 영월 지방은 석회암 지대라 석회암 광산이 있고, 석회암 동굴이 많은 지역이다. 평양에 가면 주암산(酒巖山)이 있는데, 그 산의 바위 틈에서 술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 그곳의 지질도 석회암이다. 그런 공통점으로 역추적을 해보건대, 석회암 지하수가 때로 부옇고 때로 맑게 나왔을 수 있다. 그래서 상놈이 가면 탁주처럼 보이고, 양반이 가면 청주처럼 보이고, 그래서 생긴 얘기가 아닐까? 게다가 그 물이 술처럼 아릿한 맛이 돌았거나, 그 물로 술을 빚으니 맛이 좋았거나….
지금 술샘에서는 맑은 물이 흘러나오는데, 떠먹기는 좀 겁이 나서 물 냄새만 맡아보니 역시 술은 아니다. 이쯤 되면 술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주천에 유명한 술이 없습니까? 전해 내려오는 술이 없습니까” 하고 수소문을 했다. 주천면에 동강더덕술 공장이 있다지만, 그곳은 주정에다 더덕을 우린 술이다. 전통 방식이 아니다. 내가 찾고 싶은 것은 발효시킨 전통 술이었다. 그러던 중 ‘영월신문’ 발행인에게서 무릉리에 술 잘 빚는 아주머니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영월군에서 기자들이 모이면 그 아주머니 술을 특별히 주문해 먹는다고 했다.
무릉리로 그 아주머니를 찾아갔다. 장순일씨였다. 올해 예순 살이다. 그녀는 친정 올케에게서 술을 배웠는데, 20년 전 부녀회장을 맡으면서 경로잔치나 마을 행사에 쓰려고 술을 빚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영월 단종제의 맛자랑에 술을 냈다가 호평을 받았다. 그 뒤로는 해마다 단종제 때에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쓸 술을 빚었다. 15년 동안 맡았던 부녀회장직을 그만둔 지 5년이 지났는데, 올해도 40말을 빚어 단종제에 냈다. 그녀는 영월에서 가장 소문난 술의 명인이었다. 물론 그는 술도가를 운영하지 않는다. 그저 마을 행사나 이웃 잔치에 부조 차원에서 술을 빚을 뿐이고, 어쩌다 소문 듣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찹쌀 재료비 정도만 받고 음료수 패트병에 담아준다.
장순일씨는 찹쌀·옥수수·엿기름·황기·누룩을 사용해서 술을 빚었다. 술은 뿌연 탁주였다. 그러나 식혜 빛이 돌 정도로 맑고 쌀알도 동동 떴다. 찹쌀로 빚어서 감칠 맛이 나고, 탄산가스가 들어 있어서 ‘싸아’ 한데 뒷맛은 향긋했다. 도수는 12∼13도쯤 될까, 탁주로는 센 편이었다. 혀 끝에 남는 향이 뭐냐고 묻자, 황기 때문이라고 했다.
뒷맛이 당기는 게 결코 범상치 않은 술이다. 무릉리 술이라고 누군가 신선주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고 한다. 무릉도원 신선주라니 그럴싸하다.
똑같은 술도 누구와 마시느냐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지고, 어디서 마시느냐에 따라 또 달라진다. 무릉도원에 왔으니,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비경이 있을 것 같다. 무릉리의 유래를 들을 겸해서 면사무소를 찾아갔더니, 조선시대 명필 양사언이 이 고을에 와서 도화꽃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이라고 탄성을 질렀다는 곳이 있다고 했다. 그곳은 요선암(邀仙巖)이었다.
신선을 만나는 바위라는 뜻이다. 요선암에는 요선정(邀仙亭)이 있고, 고려시대 마애석불이 있었다. 마애석불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커다란 복주머니 형상의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복주머니 부처에게 기도하면, 주머니에서 금방이라도 복을 꺼내 줄 것만 같다.
이 요선정과 요선암은 요선계원들의 소유물이다. 요선계는 300년 전에 이 지방의 토호인 원주 이씨, 원주 원씨, 청주 곽씨의 원로들이 만든 계였다. 향약이 두루 퍼지던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마을 계로 관혼상제에 필요한 물건을 공동 관리하고 규약을 만들어 주민들을 이끌었다. 그 조직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요선계의 총무인 이상국씨는 요선계 규약을 펼쳐보이는데, 마을에서 큰죄를 지은 사람은 영출(永黜, 영원히 추방)한다고 했다. 그러나 청주 세 동이, 탁주 세 동이, 큰 주안상 세 상을 내면 그 죄를 면해준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무거운 벌에 견주어 너무 쉽게 용서해 주는 것 같았다. 그 당시 다른 동네는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무릉도원다운 흥미로운 사면제도다.
주천강을 내려다보면서 요선정에서 무릉도원 신선주를 기울이니, 신선이 따로 없다. 더욱이 요선정에 걸린 숙종대왕 어제시(御製詩) 현판이 술맛을 더욱 돋운다. 숙종이 지은 7언 율시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술을 들고 올라와 아이에게 술 따르게 하고 취해 난간에 몸을 맡긴 채 낮잠에 잠기노라” (携登宮 呼兒酌 醉倚欄干白日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