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일 남북 역사학자들은 분단 이후 최초로 평양에서 공동 학술행사를 개최했다. 3·1절 82주년 기념으로 열린 이 토론회에는 강만길 상지대 총장 등 남한 역사학자 21명이 참가했고, 남북 역사학자들은 일제 침략의 불법성을 밝히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3월2일에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규탄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민족공동체 복원이라는 큰 뜻에 양측 역사학계는 전혀 이견이 없었다.
이 행사에 참가한 안병욱 교수(가톨릭대 한국사)는 “50년이 넘는 분단의 세월을 통해 강요된 단절 상태와 극단적인 적대관계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으며 민족공동체적 기반도 어렵지 않게 복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확인이었다”(문화일보 3월13일자)고 벅찬 감동을 전했다.
그러나 정두희 교수(서강대 사학과)는 지난 4월 자신의 저서인 ‘하나의 역사 두 개의 역사학’(소나무 펴냄)을 통해 남북 역사학의 학문적 통합 가능성을 부인하고 나섰다. “남북문제에 관한 한 가슴 속에서는 뜨거운 민족 동질성에 대한 확신을 품되, 냉철한 이성적 분별력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는 말은 학자로서 당연한 주장이었지만, 남북교류로 한껏 고조된 역사학계의 통합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하나의 역사 두 개의 역사학’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정교수는 개화기 이후 남북한 한국사 개설서를 꼼꼼히 비교한 후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남북 역사학계의 시각과 서술 내용이 너무도 극명하게 대조된다”면서 심지어 “주체사상이라는 하나의 관념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북한에서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흔히들 남북한은 수천 년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서로의 동질성을 강조하지만, 남북이 공유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과거일 뿐이다”(정두희).
이런 논란 속에 남북정상회담 1주년을 맞아 한국역사연구회가 ‘북한 역사학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6월22일 세종문화회관 컨벤션센터)을 열었다. 한국역사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방기중 교수(연세대 사학과)는 “50여 년간 다른 체제하에서 남북한의 연구 경향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전제로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서로 다른 점을 부각시키기보다 공유할 수 있는 성과에 초점을 두었다”고 취지를 설명하며 ‘통일역사학’의 신호탄을 올렸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심포지엄은 “남북이 하나의 역사로 가야 한다”는 당위성을 확인하는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한국역사연구회측은 지난 1년간 연구팀을 가동해 북한 역사학계의 구성과 활동(김광운), 시대구분론(권요용·도면회), 반침략투쟁사(김순자·신주백), 정치제도사(연갑수), 사상사(박광용), 생활풍속사(박현순) 등 북한 역사학의 쟁점을 골고루 섭렵하고 남북한 학계에 상호 유입해 통설로 자리잡은 연구 성과들이 있는지 점검하는 데 주력했다.
지난 3월 평양학술대회에 참가한 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가 첫 발표자로 나서 ‘북한 역사학계의 구성과 활동’ 전반을 소개했다. 그는 북한 역사학계가 조선노동당의 지도 아래 활동하였으며, 역사학자들은 일정한 조직이나 단체에 소속되어 연구·교수·집필 활동을 한다고 밝혔다. 특히 당중앙위원회 직속기관으로 1956년 창설한 ‘당역사연구소’는 ‘혁명전통’에 대한 전문적 연구를 하는 동시에 관련 연구자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런 지도체제하에서 북한의 역사학은 크게 혁명역사와 일반역사(편사학)으로 나뉜다. ‘우리가 역사를 학습하자는 것은 왕이나 봉건통치배들의 역사를 알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민의 투쟁의 역사, 창조의 역사를 알자는 것’이라는 교시에도 나타나듯 북한의 역사연구는 자연히 ‘혁명역사’에 무게가 실려 있다.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소유하게 해준다’는 북한의 역사학이 남한 역사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혼란과 고민을 안긴 것도 사실이다.
지난 93년 북한의 단군릉 발굴사건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놓고도 논란이 분분하다. 북한은 93년 1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단군묘로 불린 평양시 강동군의 한 무덤을 발굴했고 그 결과 단군 무덤임을 확인했다고 주장해 왔다. 단군릉의 발굴은 단지 단군이 신화에서 역사로 자리바꿈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고조선이 기원전 1000년 전반기에 랴오닝성(遼寧省) 일대에서 건국했다는 기존설을 폐기하고 기원전 3000년 이전에 평양에서 건국했다는 새로운 논리가 세워지는 등 한국 고대사를 완전히 다시 써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 북한은 단군릉 발굴 이후 평양 일대 유적 발굴작업을 본격화하여 대동강 유역이 인류의 발상지며 조선인의 발원지, 나아가 신석기 청동기문화, 고대 천문학의 중심지라는 대동강문화론(세계 4대 문명은 5대 문명으로 개칭해야 한다고 주장)을 펼친다.
이에 대해 한신대 권오용 교수는 “북한이 90년대에 접어들어 외교적 고립과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체제 우월성을 강조할 필요를 느끼면서 단군릉 복원에 나섰다”며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강 유역이 인류 기원지의 하나이며 한민족의 발상지고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중심지, 나아가 고구려, 발해, 고려로 이어지는 국가들이 모두 평양을 중시했다는 점을 부각하면서 한국사의 정통은 남한이 아닌 북한이라는 주장을 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권교수는 이로써 북한역사학은 역사연구 방법론에서 최소한의 과학성과 실증성마저 포기하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비판하면서도, “북한학계가 이런 주장을 편 배경과 앞으로 전개할 상황에 대한 파악은 북한 사회에 대한 이해의 한 방편이 될 것”이라고 일부 연구가치를 인정했다. 권교수와 공동으로 ‘북한역사학의 시대구분론’을 연구한 서울대 규장각 도면회 연구원 역시 “북한이 유물사관에 의한 시대구분 방식을 버리고 1980년대 이후 주체사관으로 바꾼 것은 현실 정치권력의 역사적 필연성을 입증하는 데 주력한 것으로 이를 ‘역사학의 타락’으로 비판하기 전에 북한 나름의 ‘민족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이념적 변화라고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나마 남북역사학에서 가장 소통 가능성이 높은 분야가 ‘대외관계사’다. 김순자씨(연세대 강사)는 “대외관계사는 이민족의 압력과 침략에 대한 ‘민족’의 자주성 수호, 일제의 식민사학에서 주장한 한민족사의 타율성 극복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어 남북한의 이념적 차이가 있음에도 양쪽 역사학계가 공통점을 찾기에 가장 쉬운 분야”라고 설명했다. 그 가운데 북한의 근현대 반침략투쟁사 부분을 연구한 신주백씨(고려대 강사)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 북한 역사학계가 확립한 반침략투쟁의 논쟁과 성과는 1960년대 후반부터 일본을 통해 한국에 유입해 한국 근대사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1980년대 후반 국내에서 일기 시작한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은 바로 이런 북한연구 성과를 직수입하면서 가능했다.
북한의 사상사를 정리한 박광용 교수(가톨릭대 국사학) 역시 북한과 남한이 이미 오래 전부터 학문적 교류를 해왔다고 말한다. 북한학계의 사상사 연구 성과 중 남한 학계에 유입해 ‘통설’로 자리잡은 분야로 다산사상과 북학사상, 기철학, 양명학의 근대적 성격 연구 등을 꼽을 수 있다. 박교수는 “남북한 역사학은 분단된 민족국가의 통일을 지향하는 ‘계몽주의적 근대성’ 정립의 과제를 함께 짊어졌다”는 공통성을 앞세운다. 그러나 그도 “남한학계 연구는 사료의 실증성과 내재적 발전론을 증명하는 과학성을 중시하는 반면, 북한학계는 혁명전통과 민족문화유산으로 대표되는 공공성을 중시한다”고 근본적 차이를 인정했다.
박종기 교수(국민대 사학)의 사회로 진행한 종합토론에는 12명의 발표자와 토론자가 모두 나서 남북한 역사학의 통합 가능성을 모색했다. 김순자씨는 “이혼한 부부가 다시 결합하려 할 때 서로 합의한 부분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라면서 비교적 공통점이 많은 생활사와 대외관계사 부분에서 공동연구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반면 연갑수씨는 “양쪽의 시각이 많이 벌어진 게 사실이지만, 단순히 차이를 확인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차이점 중에서 핵심을 도출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도면회씨는 여전히 남북 역사학의 통합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는 “역사학이 국민국가 단위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광복 이후 각각의 국민국가를 형성한 남북한이 별개의 역사를 갖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면서 “남한 학계가 일방적으로 북한을 짝사랑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심포지엄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50년 이상 결별한 남북역사가 재결합할 지점을 찾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행사에 참가한 안병욱 교수(가톨릭대 한국사)는 “50년이 넘는 분단의 세월을 통해 강요된 단절 상태와 극단적인 적대관계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으며 민족공동체적 기반도 어렵지 않게 복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확인이었다”(문화일보 3월13일자)고 벅찬 감동을 전했다.
그러나 정두희 교수(서강대 사학과)는 지난 4월 자신의 저서인 ‘하나의 역사 두 개의 역사학’(소나무 펴냄)을 통해 남북 역사학의 학문적 통합 가능성을 부인하고 나섰다. “남북문제에 관한 한 가슴 속에서는 뜨거운 민족 동질성에 대한 확신을 품되, 냉철한 이성적 분별력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는 말은 학자로서 당연한 주장이었지만, 남북교류로 한껏 고조된 역사학계의 통합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하나의 역사 두 개의 역사학’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정교수는 개화기 이후 남북한 한국사 개설서를 꼼꼼히 비교한 후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남북 역사학계의 시각과 서술 내용이 너무도 극명하게 대조된다”면서 심지어 “주체사상이라는 하나의 관념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북한에서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흔히들 남북한은 수천 년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서로의 동질성을 강조하지만, 남북이 공유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과거일 뿐이다”(정두희).
이런 논란 속에 남북정상회담 1주년을 맞아 한국역사연구회가 ‘북한 역사학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6월22일 세종문화회관 컨벤션센터)을 열었다. 한국역사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방기중 교수(연세대 사학과)는 “50여 년간 다른 체제하에서 남북한의 연구 경향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전제로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서로 다른 점을 부각시키기보다 공유할 수 있는 성과에 초점을 두었다”고 취지를 설명하며 ‘통일역사학’의 신호탄을 올렸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심포지엄은 “남북이 하나의 역사로 가야 한다”는 당위성을 확인하는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한국역사연구회측은 지난 1년간 연구팀을 가동해 북한 역사학계의 구성과 활동(김광운), 시대구분론(권요용·도면회), 반침략투쟁사(김순자·신주백), 정치제도사(연갑수), 사상사(박광용), 생활풍속사(박현순) 등 북한 역사학의 쟁점을 골고루 섭렵하고 남북한 학계에 상호 유입해 통설로 자리잡은 연구 성과들이 있는지 점검하는 데 주력했다.
지난 3월 평양학술대회에 참가한 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가 첫 발표자로 나서 ‘북한 역사학계의 구성과 활동’ 전반을 소개했다. 그는 북한 역사학계가 조선노동당의 지도 아래 활동하였으며, 역사학자들은 일정한 조직이나 단체에 소속되어 연구·교수·집필 활동을 한다고 밝혔다. 특히 당중앙위원회 직속기관으로 1956년 창설한 ‘당역사연구소’는 ‘혁명전통’에 대한 전문적 연구를 하는 동시에 관련 연구자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런 지도체제하에서 북한의 역사학은 크게 혁명역사와 일반역사(편사학)으로 나뉜다. ‘우리가 역사를 학습하자는 것은 왕이나 봉건통치배들의 역사를 알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민의 투쟁의 역사, 창조의 역사를 알자는 것’이라는 교시에도 나타나듯 북한의 역사연구는 자연히 ‘혁명역사’에 무게가 실려 있다.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소유하게 해준다’는 북한의 역사학이 남한 역사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혼란과 고민을 안긴 것도 사실이다.
지난 93년 북한의 단군릉 발굴사건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놓고도 논란이 분분하다. 북한은 93년 1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단군묘로 불린 평양시 강동군의 한 무덤을 발굴했고 그 결과 단군 무덤임을 확인했다고 주장해 왔다. 단군릉의 발굴은 단지 단군이 신화에서 역사로 자리바꿈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고조선이 기원전 1000년 전반기에 랴오닝성(遼寧省) 일대에서 건국했다는 기존설을 폐기하고 기원전 3000년 이전에 평양에서 건국했다는 새로운 논리가 세워지는 등 한국 고대사를 완전히 다시 써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 북한은 단군릉 발굴 이후 평양 일대 유적 발굴작업을 본격화하여 대동강 유역이 인류의 발상지며 조선인의 발원지, 나아가 신석기 청동기문화, 고대 천문학의 중심지라는 대동강문화론(세계 4대 문명은 5대 문명으로 개칭해야 한다고 주장)을 펼친다.
이에 대해 한신대 권오용 교수는 “북한이 90년대에 접어들어 외교적 고립과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체제 우월성을 강조할 필요를 느끼면서 단군릉 복원에 나섰다”며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강 유역이 인류 기원지의 하나이며 한민족의 발상지고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중심지, 나아가 고구려, 발해, 고려로 이어지는 국가들이 모두 평양을 중시했다는 점을 부각하면서 한국사의 정통은 남한이 아닌 북한이라는 주장을 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권교수는 이로써 북한역사학은 역사연구 방법론에서 최소한의 과학성과 실증성마저 포기하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비판하면서도, “북한학계가 이런 주장을 편 배경과 앞으로 전개할 상황에 대한 파악은 북한 사회에 대한 이해의 한 방편이 될 것”이라고 일부 연구가치를 인정했다. 권교수와 공동으로 ‘북한역사학의 시대구분론’을 연구한 서울대 규장각 도면회 연구원 역시 “북한이 유물사관에 의한 시대구분 방식을 버리고 1980년대 이후 주체사관으로 바꾼 것은 현실 정치권력의 역사적 필연성을 입증하는 데 주력한 것으로 이를 ‘역사학의 타락’으로 비판하기 전에 북한 나름의 ‘민족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이념적 변화라고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나마 남북역사학에서 가장 소통 가능성이 높은 분야가 ‘대외관계사’다. 김순자씨(연세대 강사)는 “대외관계사는 이민족의 압력과 침략에 대한 ‘민족’의 자주성 수호, 일제의 식민사학에서 주장한 한민족사의 타율성 극복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어 남북한의 이념적 차이가 있음에도 양쪽 역사학계가 공통점을 찾기에 가장 쉬운 분야”라고 설명했다. 그 가운데 북한의 근현대 반침략투쟁사 부분을 연구한 신주백씨(고려대 강사)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 북한 역사학계가 확립한 반침략투쟁의 논쟁과 성과는 1960년대 후반부터 일본을 통해 한국에 유입해 한국 근대사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1980년대 후반 국내에서 일기 시작한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은 바로 이런 북한연구 성과를 직수입하면서 가능했다.
북한의 사상사를 정리한 박광용 교수(가톨릭대 국사학) 역시 북한과 남한이 이미 오래 전부터 학문적 교류를 해왔다고 말한다. 북한학계의 사상사 연구 성과 중 남한 학계에 유입해 ‘통설’로 자리잡은 분야로 다산사상과 북학사상, 기철학, 양명학의 근대적 성격 연구 등을 꼽을 수 있다. 박교수는 “남북한 역사학은 분단된 민족국가의 통일을 지향하는 ‘계몽주의적 근대성’ 정립의 과제를 함께 짊어졌다”는 공통성을 앞세운다. 그러나 그도 “남한학계 연구는 사료의 실증성과 내재적 발전론을 증명하는 과학성을 중시하는 반면, 북한학계는 혁명전통과 민족문화유산으로 대표되는 공공성을 중시한다”고 근본적 차이를 인정했다.
박종기 교수(국민대 사학)의 사회로 진행한 종합토론에는 12명의 발표자와 토론자가 모두 나서 남북한 역사학의 통합 가능성을 모색했다. 김순자씨는 “이혼한 부부가 다시 결합하려 할 때 서로 합의한 부분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라면서 비교적 공통점이 많은 생활사와 대외관계사 부분에서 공동연구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반면 연갑수씨는 “양쪽의 시각이 많이 벌어진 게 사실이지만, 단순히 차이를 확인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차이점 중에서 핵심을 도출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도면회씨는 여전히 남북 역사학의 통합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는 “역사학이 국민국가 단위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광복 이후 각각의 국민국가를 형성한 남북한이 별개의 역사를 갖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면서 “남한 학계가 일방적으로 북한을 짝사랑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심포지엄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50년 이상 결별한 남북역사가 재결합할 지점을 찾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