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4·11총선을 앞두고 일어난 ‘북풍사건’과 관련, 중요 증언자가 등장했다. 96년 4월 당시 육군 1사단(판문점 후방지역 관할)사령부 정보처 정보항공장교(보통 정보보좌관이라 부름)로 근무했던 윤길상 예비역 육군소령(3사 19기)이 바로 그 주인공. 북풍 사건이 일어나던 날 1사단 일직사령을 섰던 그는 당시 상황을 사단급에서는 최초로 상부에 보고했던 인물이다. 1982년 9월 소위로 임관한 윤 전소령은 97년 10월31일 수도군단 정보대대 종합분석장교를 끝으로 전역했다.
5월4일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두시간 동안 윤 전소령을 만났다.
북한군이 최초로 판문점에 진입한 날짜는?
“96년 4월4일 저녁 식사 후인 6시30분~8시30분이다. 1사단 일직사령을 서고 있던 중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파견 나가 있던 1사단 12연대 소속 연락장교(중위)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았다.”
연락장교로부터 받은 최초 상황보고의 내용은?
“‘JSA(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 북한군 1, 3, 5, 7초소에 40~50명으로 추정되는 무장병력이 들어왔다. 보통 일이 아닌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내용은 상부에 15분내에 보고해야 하는 특이 사항이었다. 나는 즉시 사단장에게 구두로 보고를 했고, 군단과 합참에 팩스를 보내 상황을 알렸다. 사단장(이강언소장·육사 25기)은 상황파악을 위해 20시40분쯤 철모를 쓰고 벙커에 왔다.”
4월4일이 확실한가.
“4월5일은 식목일로 휴무일이었다. 사단 규정상 휴무일에는 중령급이 일직사령을 서고 토요일이나 휴무일 전날에는 소령급이 일직사령을 서게 돼 있다. 95년 10월 임진강에 무장공비가 침투, 한명이 사살되고 두명이 도주한 사건이 있었다. 이후 사단장이 ‘휴무일 전날에는 정보나 작전보좌관이 일직사령을 서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국방부가 북한군이 판문점에 최초 진입했다고 발표한 5일은 내가 일직사령을 설 수 없는 날이다. 4일이 틀림없다.”
그러나 당시 국방부는 북한군이 최초로 판문점에 진입한 날은 5일이라고 발표했고, 지금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데….
“아니다. 1사단 사령부 상황일지, 1군단과 3군 사령부 정보상황일지 및 합참 지휘통제실-정보사 상황일지, 정보본부 정보상황일지 등에 기록돼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일지 자체를 조작했을 수도 있다. 당시 근무한 장교들의 진술 및 필적을 확인하면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상황일지 조작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당시 현지 상황은 어땠나?
“JSA지역을 제외한 모든 전선은 평온했다. 북한군 작업병력, 수색-정찰병력 등에 이렇다할 변화가 없었다. 우리측 민간인들도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비무장지대에 들어가 영농활동을 계속했다. 대남 방송에서도 특이점이 없었다.
10년 이상을 정보분야에서 근무한 정보전문가 입장에서 볼때 워치콘이 격상될 정도로 위협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합참에 근무할 때도 북한군이 진지에 투입되는 등 96년 4월 상황과 비슷한 경우가 세번 있었다. 95년에는 전 전선에 걸쳐 북한군 수백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나무를 자르고 지뢰를 밟아 부상한 적도 있다. 그러나 당시 워치콘은 격상되지 않았다.
미군측에서는 당시 상황을 전부 CCTV로 찍었다. 당시 1사단 김쭛쭛 정보참모가 입수, 사단장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나도 본 적이 있다. 미군측이 지금도 갖고 있을 그 테이프에는 시간도 찍혀 있다.”
워치콘이 격상된 때는 언제인가?
“워치콘 격상은 엄청난 의미다. 특수정보 팩스가 따로 온다. 4월7일 오후로 기억한다. 직접 사단장에게 보고했다. 특이했던 점은 전문에 5일부로 대치한다는 문구가 첨부돼 있었다. 이런 전례가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속으로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었다.”
윤 전소령은 “최전방 부대 정보실무자로서 사태가 심각했다면 가장 먼저 느꼈을 것이다. 당시 평상시 대비 이상 징후로만 파악하였으나 상급부대 정황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 의아했었다”고 말했다.
윤 전소령의 이같은 증언은 지난 4월18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96년 북풍은 실제보다 과장되고 조작됐다”고 주장한 김남국 예비역 육군대령(육사 28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윤 전소령의 증언으로 ‘96북풍’의 실체를 둘러싼 논란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5월4일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두시간 동안 윤 전소령을 만났다.
북한군이 최초로 판문점에 진입한 날짜는?
“96년 4월4일 저녁 식사 후인 6시30분~8시30분이다. 1사단 일직사령을 서고 있던 중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파견 나가 있던 1사단 12연대 소속 연락장교(중위)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았다.”
연락장교로부터 받은 최초 상황보고의 내용은?
“‘JSA(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 북한군 1, 3, 5, 7초소에 40~50명으로 추정되는 무장병력이 들어왔다. 보통 일이 아닌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내용은 상부에 15분내에 보고해야 하는 특이 사항이었다. 나는 즉시 사단장에게 구두로 보고를 했고, 군단과 합참에 팩스를 보내 상황을 알렸다. 사단장(이강언소장·육사 25기)은 상황파악을 위해 20시40분쯤 철모를 쓰고 벙커에 왔다.”
4월4일이 확실한가.
“4월5일은 식목일로 휴무일이었다. 사단 규정상 휴무일에는 중령급이 일직사령을 서고 토요일이나 휴무일 전날에는 소령급이 일직사령을 서게 돼 있다. 95년 10월 임진강에 무장공비가 침투, 한명이 사살되고 두명이 도주한 사건이 있었다. 이후 사단장이 ‘휴무일 전날에는 정보나 작전보좌관이 일직사령을 서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국방부가 북한군이 판문점에 최초 진입했다고 발표한 5일은 내가 일직사령을 설 수 없는 날이다. 4일이 틀림없다.”
그러나 당시 국방부는 북한군이 최초로 판문점에 진입한 날은 5일이라고 발표했고, 지금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데….
“아니다. 1사단 사령부 상황일지, 1군단과 3군 사령부 정보상황일지 및 합참 지휘통제실-정보사 상황일지, 정보본부 정보상황일지 등에 기록돼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일지 자체를 조작했을 수도 있다. 당시 근무한 장교들의 진술 및 필적을 확인하면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상황일지 조작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당시 현지 상황은 어땠나?
“JSA지역을 제외한 모든 전선은 평온했다. 북한군 작업병력, 수색-정찰병력 등에 이렇다할 변화가 없었다. 우리측 민간인들도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비무장지대에 들어가 영농활동을 계속했다. 대남 방송에서도 특이점이 없었다.
10년 이상을 정보분야에서 근무한 정보전문가 입장에서 볼때 워치콘이 격상될 정도로 위협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합참에 근무할 때도 북한군이 진지에 투입되는 등 96년 4월 상황과 비슷한 경우가 세번 있었다. 95년에는 전 전선에 걸쳐 북한군 수백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나무를 자르고 지뢰를 밟아 부상한 적도 있다. 그러나 당시 워치콘은 격상되지 않았다.
미군측에서는 당시 상황을 전부 CCTV로 찍었다. 당시 1사단 김쭛쭛 정보참모가 입수, 사단장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나도 본 적이 있다. 미군측이 지금도 갖고 있을 그 테이프에는 시간도 찍혀 있다.”
워치콘이 격상된 때는 언제인가?
“워치콘 격상은 엄청난 의미다. 특수정보 팩스가 따로 온다. 4월7일 오후로 기억한다. 직접 사단장에게 보고했다. 특이했던 점은 전문에 5일부로 대치한다는 문구가 첨부돼 있었다. 이런 전례가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속으로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었다.”
윤 전소령은 “최전방 부대 정보실무자로서 사태가 심각했다면 가장 먼저 느꼈을 것이다. 당시 평상시 대비 이상 징후로만 파악하였으나 상급부대 정황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 의아했었다”고 말했다.
윤 전소령의 이같은 증언은 지난 4월18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96년 북풍은 실제보다 과장되고 조작됐다”고 주장한 김남국 예비역 육군대령(육사 28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윤 전소령의 증언으로 ‘96북풍’의 실체를 둘러싼 논란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