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글을 ‘수신: 대한민국 대통령, 참조:문광부장관, 참조의 참조:한국문학-예술 세계화 담당자’의 공개서한 쯤으로 생각하고 쓴다.
언어에는 당시의 사회구성체가 담겨 있다. 상부구조적으로 말하자면 당대의 의식수준, 그리고 전망의 크기, 그리고 감성의 깊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말이다. 영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세계 시사의 꽃이라는 영국 낭만주의 시의 90%를 알 수 있고, 프랑스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왜 문학평론 비슷한 철학이 작금의 프랑스 지성계는 물론 전세계의 철학계를 ‘부드러움으로 지배’하는지를 90%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단어도 그렇다. 아름다운 우리말 살리기 운동의 의미는 크지만, 그것은 고전읽기 운동과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춘향전’의 언어와 문법으로 오늘날의 현대성을 재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10%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문학-예술의 창조행위를 통해 언어에 덧붙여지는 초(超)언어, 즉 양이 아니고 질이다. 위대한 문학-예술 유산 속에서 언어는 단지 현실을 90% 반영할 뿐아니라 문학-예술의 세계 속으로 종합하면서 문학-예술의 세계로써 당대 사회의 언어-의식구조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고, 그렇게 거꾸로 사회구성체의 변화를 어떤 미학적 세계관으로 예감케 한다.
어떤 때는 그 예감이 물화, 직접 혁명에 기여하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문학은 그렇게 영국어의 수준을 높였고, 그의 ‘햄릿’은 그렇게 미래의 예감을 난해성의 미학으로 구현, 문학 자체를 존재의 아름다운 블랙홀로 만들었다.
컴퓨터 문명 시대에 문화가 다양해지고 용어가 국제화하고 정보가 세계화하는 것은 백번 다행한 일이다. 컴퓨터문학의 등장도 반길 만하다. 그러나 동시에 문학-예술의 언어가 잡담수준의 ‘채팅’문화에 잠식되는 것은 역시 백번 우려할 만한 일이다.
‘국민의 정부’를 자부하는 김대중정권이 들어서고 정부의 문학-예술인 지원이 크게 늘어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IMF 사태라는 국난을 계기로 문인 200명에게 각 1000만원씩 총 20억원을 지원했던 것은 특히 미안할 정도로 고마운 일이었는데, 올해는 지원액을 30억으로 늘릴 예정이라고 한다. 머지 않아 예술가보험제도 같은 것도 정부의 보조를 받아 설립될 예정이라고 한다.
외국작가 초대해 한국 알리고 번역할 수 있게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정부가, 혹은 이 사회의 문학-예술지원 제도가 아직까지 그 언어의 양적인 90%에만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더 중요한 것은 10%인 초언어의 질이다. 한국문학을 해외에 번역소개하는데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 10%를 번역해내지 못한다면, 명성은커녕 망신을 자초할 뿐이다. 한국 근대문학 100년은 American-melting pot(미국-섞어찌개)문화 못지 않게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부 혹은 대산문화재단 같은 민간단체에서 한국문학의 소개에 들이는 비용(번역지원비)은 줄잡아 100억원을 상회할 것이다. 많은 훌륭한 작품들이 번역되고 있지만, 그러나 해외서적에서 ‘공문서’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은 한국의 국력이 약한 탓도 있고 그 중 특히 세계화 문화정책이 관료화된(이를테면 한국문화 소개를 ‘부채춤’소개 정도로만 생각하는) 탓이 크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문학-예술이 지니는 10%의 질의 초언어를 공문서 언어로 평준화시킨 탓이 가장 크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외국문학을 전공한 작가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작가의 작품을 그 나라 말로 번역하게 하는 것이 우선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영미-프랑스-독일-러시아-중국의, 그리고 (노벨상을 굳이 받고 싶다면) 스웨덴의 젊은 작가들을 지구촌의 유일한 분단지대인 이곳으로 초대하여 상주할 터전을 마련해주고, 한국의 문화를 익히고 한국의 작가들과 토론하면서 결국 한국의 문화와 문학-예술을 익히게 하고 그들이 그들 나라 말로 우리 작품을 번역하게끔 하는 것이다. 너무 거창한가. 아니다. 100억의 10분의 1의 일만 있어도 가능할 것이다. 한반도야말로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열어갈 문학의 영토라는 점을 주지시킬 수 있다면….
언어에는 당시의 사회구성체가 담겨 있다. 상부구조적으로 말하자면 당대의 의식수준, 그리고 전망의 크기, 그리고 감성의 깊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말이다. 영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세계 시사의 꽃이라는 영국 낭만주의 시의 90%를 알 수 있고, 프랑스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왜 문학평론 비슷한 철학이 작금의 프랑스 지성계는 물론 전세계의 철학계를 ‘부드러움으로 지배’하는지를 90%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단어도 그렇다. 아름다운 우리말 살리기 운동의 의미는 크지만, 그것은 고전읽기 운동과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춘향전’의 언어와 문법으로 오늘날의 현대성을 재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10%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문학-예술의 창조행위를 통해 언어에 덧붙여지는 초(超)언어, 즉 양이 아니고 질이다. 위대한 문학-예술 유산 속에서 언어는 단지 현실을 90% 반영할 뿐아니라 문학-예술의 세계 속으로 종합하면서 문학-예술의 세계로써 당대 사회의 언어-의식구조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고, 그렇게 거꾸로 사회구성체의 변화를 어떤 미학적 세계관으로 예감케 한다.
어떤 때는 그 예감이 물화, 직접 혁명에 기여하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문학은 그렇게 영국어의 수준을 높였고, 그의 ‘햄릿’은 그렇게 미래의 예감을 난해성의 미학으로 구현, 문학 자체를 존재의 아름다운 블랙홀로 만들었다.
컴퓨터 문명 시대에 문화가 다양해지고 용어가 국제화하고 정보가 세계화하는 것은 백번 다행한 일이다. 컴퓨터문학의 등장도 반길 만하다. 그러나 동시에 문학-예술의 언어가 잡담수준의 ‘채팅’문화에 잠식되는 것은 역시 백번 우려할 만한 일이다.
‘국민의 정부’를 자부하는 김대중정권이 들어서고 정부의 문학-예술인 지원이 크게 늘어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IMF 사태라는 국난을 계기로 문인 200명에게 각 1000만원씩 총 20억원을 지원했던 것은 특히 미안할 정도로 고마운 일이었는데, 올해는 지원액을 30억으로 늘릴 예정이라고 한다. 머지 않아 예술가보험제도 같은 것도 정부의 보조를 받아 설립될 예정이라고 한다.
외국작가 초대해 한국 알리고 번역할 수 있게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정부가, 혹은 이 사회의 문학-예술지원 제도가 아직까지 그 언어의 양적인 90%에만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더 중요한 것은 10%인 초언어의 질이다. 한국문학을 해외에 번역소개하는데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 10%를 번역해내지 못한다면, 명성은커녕 망신을 자초할 뿐이다. 한국 근대문학 100년은 American-melting pot(미국-섞어찌개)문화 못지 않게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부 혹은 대산문화재단 같은 민간단체에서 한국문학의 소개에 들이는 비용(번역지원비)은 줄잡아 100억원을 상회할 것이다. 많은 훌륭한 작품들이 번역되고 있지만, 그러나 해외서적에서 ‘공문서’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은 한국의 국력이 약한 탓도 있고 그 중 특히 세계화 문화정책이 관료화된(이를테면 한국문화 소개를 ‘부채춤’소개 정도로만 생각하는) 탓이 크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문학-예술이 지니는 10%의 질의 초언어를 공문서 언어로 평준화시킨 탓이 가장 크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외국문학을 전공한 작가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작가의 작품을 그 나라 말로 번역하게 하는 것이 우선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영미-프랑스-독일-러시아-중국의, 그리고 (노벨상을 굳이 받고 싶다면) 스웨덴의 젊은 작가들을 지구촌의 유일한 분단지대인 이곳으로 초대하여 상주할 터전을 마련해주고, 한국의 문화를 익히고 한국의 작가들과 토론하면서 결국 한국의 문화와 문학-예술을 익히게 하고 그들이 그들 나라 말로 우리 작품을 번역하게끔 하는 것이다. 너무 거창한가. 아니다. 100억의 10분의 1의 일만 있어도 가능할 것이다. 한반도야말로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열어갈 문학의 영토라는 점을 주지시킬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