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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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워진 서울과 평양

‘6월 남북정상회담’에 흥분 기대감… “햇볕으로 ‘북한외투’ 벗겼다”

  • 입력2006-05-16 09: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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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까워진 서울과 평양
    4월10일 오전 10시 정각 정부중앙청사 통일부 회의실. 박재규 통일부장관과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이 전례없이 상기된 표정으로 기자회견용 마이크 앞에 앉았다.

    이윽고 박재규장관이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남북합의서를 읽어 내려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에 따라 김대중대통령이 금년 2000년 6월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을 방문한다. 평양 방문에서는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국방위원장 사이에 역사적인 상봉이 있게 되며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된다….”

    남북 정상의 ‘역사적인 상봉’에 대한 발표는 매우 전격적이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정부는 이날 아침에야 ‘중대 발표’를 예고했고 북한 관영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오전 9시 보도에서 ‘오전 10시 특별중대방송’이 있을 것임을 알렸다.

    ‘평양 가는 길’ 원만하게 이뤄질지 주목

    서울의 외신기자들은 기사 앞에 ‘긴급’(urgent)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전세계에 타전했다. 분단 후 첫 정상회담 소식으로, 불과 사흘 앞으로 다가온 총선 뉴스는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났고 이 ‘초대형 호재’로 주식시장은 폭등장을 연출했다.



    하지만 남북 정상회담 임박을 어렴풋이나마 눈치챌 수 있는 조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3월10일 대북경협지원 확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김대중대통령의 ‘베를린선언’은 그 신호탄이었다. 남북은 이 선언을 기폭제로 삼아 일주일 뒤인 3월17일 중국 상하이에서 첫 접촉을 가졌다.

    3월31일(보도는 4월1일자) 김대통령의 동아일보 창간 80주년 인터뷰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예고됐다. 국내외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이른바 ‘총선 후 북한 특수(特需)’ 발언이었다. “총선이 끝나면 국민과 야당에 설명하고 본격적인 남북 정상회담과 당국자회담을 추진하겠다. …선거 후 중동특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 북한특수가 있을 것이며 특히 중소기업들에 상상할 수 없는 규모로 투자의 길이 열릴 것이다.” 김대통령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현재 북한과의 비공식 접촉이 여러 경로를 통해 진행되고 있다”고까지 언급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4월8일 현 정권의 실세인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과 북한의 송호경 아태평화위부위원장이 중국 베이징에서 만나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정상회담 성사를 가능케 한 것은 무엇일까. 물론 북한의 자세 변화를 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정일체제의 안정을 위해 경제성장이 필요하며, 그것은 남한과 국제사회의 협력 없이는 어렵다는 사실을 북한 핵심부가 이제 잘 알게 됐다는 것. 여기에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 4대 강국이 한반도의 긴장 강화보다는 완화를 바라는 것도 분위기 조성에 일조했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최대의 공로자는 뭐니뭐니해도 김대통령과 그의 일관된 대북정책이라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는 듯하다.

    사실 김대통령의 온건노선인 ‘햇볕정책’은 지난 2년여 동안 여러 차례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98년 8월31일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나 99년초 금창리 지하핵시설 의혹, 99년 6월15일 서해 연평도 해상에서의 남북 해군간 교전사태, 그리고 6월20일 금강산관광객 민영미씨 억류사건 등이 그것들이었다.

    하지만 김대통령은 고비 때마다 ‘극단적인 힘의 대치’보다는 ‘참을성이 필요한 대화’를 앞세웠다. 이는 처음엔 ‘민족이 어느 동맹보다 중요하다’고 했다가 나중엔 ‘북한은 망해야 할 정권’이라고 규정한 김영삼정권의 대북정책에 비해 진폭이 거의 없는 것이었다.

    전문가들은 그런 시종일관한 모습이 결국 북한을 움직였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종석 세종연구소연구위원은 “외부의 압력이나 영향에서가 아닌 정부의 일관된 포용정책이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아무튼 ‘분단과 6·25전쟁 이후 최대의 사건’이 될 남북 정상회담으로 남북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전망이다. “분단구조 해체의 돌파구를 찾은 것”(신희석 아태정책연구소이사장) “남북간 대결과 반목의 시대가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진입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종석위원)이라는 평가들은 이번 합의의 의미를 잘 요약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이 원만히 진행될지, 그리고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치러질지 장담하기엔 이르다는 경계론도 없지 않다. 94년의 경험 탓이다.

    당시 북한 핵문제로 일촉즉발의 상태였던 남과 북은 지미 카터 전미국대통령의 중재로 정상회담 개최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하지만 실무접촉에서부터 어려움이 없지 않았다. 북측이 남측의 인원수를 최대한 줄이려 했고 TV중계나 통신문제 등에서 정상회담의 일반적 관례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대표단의 구성과 규모, 회담형식, 왕래 절차, 신변안전보장 등에 대한 합의서를 만들었지만 북한의 김일성주석이 ‘반세기만의 대사(大事)’를 불과 보름여 앞둔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정상회담은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낙관적 시각이 압도적인 듯하다.

    우선 실무접촉부터 그렇다. 양측이 4월 중 절차문제 협의를 위한 준비접촉을 갖기로 했지만 “예상 밖의 걸림돌이 돌출할 가능성은 제로(0)에 가까우며 시간적으로 충분하다”는 게 정부 관계자들의 얘기다.

    이들은 그 근거로 94년의 예를 들고 있다. 당시 ‘카터 방북(6월15일)→판문점 예비접촉(6월28일)→평양 남북 정상회담(7월25일)’의 타임테이블은 불과 40일짜리였다는 것. 더욱이 양측은 정상회담의 절차, 의전, 경호 등 제반 실무문제에 대한 94년의 합의 경험이라는 ‘훌륭한 참고서’까지 갖고 있어 6월12∼14일 회담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때문에 절차보다는 의제에 더욱 비상한 관심이 쏠리는 상황이다. 사실 의제문제는 ‘뜻있는 남북 정상회담‘을 만들기 위해 넘어야 하는 최대의 고비다. 실제로 남과 북은 분단 이후 숱한 회담을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의제문제로 충돌했던 경험이 있다.

    그런 탓에 정부는 “의제문제에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한다”는 방침을 세워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첫 정상회담인데 너무 민감한 부분을 다루려다 회담 자체를 그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상회담의 의제는 남북이 91년에 만든 남북기본합의서를 ‘부활’ 시키는 선을 출발점으로 삼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남북기본합의서에는 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 한반도의 비핵화 공동선언, 남북군사공동위, 남북교류협력위 등 거의 모든 것이 망라돼 있는 ‘하나를 추구하는 남북의 준헌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김대통령이 줄곧 지대한 관심을 보여온 이산가족문제도 주요 의제에 포함될 것이 확실시된다. 정부가 회담 합의배경을 발표하면서 “지난 반세기 동안 남과 북의 단절과 폐쇄의 지속으로 남북 주민간 자유로운 왕래는커녕 안부조차 알 수 없는 상태”라고 강조한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양측은 또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의제들에 대한 합의사항을 합의서 형식으로 발표할 가능성이 크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합의서가 추진될 경우 그 내용은 정상간 합의인 만큼 표현자체는 원칙적인 수준이 될 것”이라면서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 등 기존의 남북간 합의사항을 재확인하고 상호체제를 인정하며 상대방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등의 내용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군사와 이산가족문제 못지 않게 남북경협도 핵심적인 의제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정상회담 추진협상 과정에서 북측이 실질적으로 원한 것이 바로 경협이었으며 남측도 이를 통한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탓에 정계와 재계 일각에서는 ‘정상회담 합의 이면에 수십억달러의 경헙 약속이 있을 것이다’는 소문도 끊이질 않고 있다.

    사실 김대중정부 출범 후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제공한 것은 경협이었고 김대통령도 이를 최대한 활용하려 했던 게 사실이다.

    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의 ‘소몰이 방북’(98년6월)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면담(98년10월)도 경협의 위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김대통령이 99년 10월 국회 연설을 통해 남북 민족경제공동체 건설을 강조한 것이나 지난 1월 신년사에서 남북경제공동체 국책연구기관간 협의를 제의한 것, 그리고 지난 3월의 베를린선언 등이 모두 경협 확대라는 일관된 맥락을 갖고 있다.

    이런 점들로 미뤄 김대통령의 평양 방문 중 예상보다 훨씬 구체적인 내용의 대규모 경협안들이 나올 수도 있다. 이기호 청와대경제수석은 “특히 북한은 도로 항만 에너지 등 SOC(사회간접시설) 분야가 극히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에 대규모 생산 투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라며 이 분야의 협력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했다.

    한편 총선이 임박한 시점에서의 정상회담 발표는 ‘선거용이 아니냐’는 논란을 불렀다. 김대통령의 북한특수 발언이 나왔을 때부터 잔뜩 경계했던 한나라당은 ‘총선용 신북풍’이라고 강력 비난했다.

    한나라당의 냉담한 반응은 한광옥 청와대비서실장의 당사 방문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한실장은 발표 전날인 9일 밤 “한나라당 당사로 찾아가 설명하겠다”고 연락했으나 이총재측은 총선지원 유세 등을 이유로 면담을 거절했다. 대신 한실장을 만난 서청원 선대본부장은 “총선을 사흘 앞두고 남북 정상회담을 발표하는 것은 총선용이며 깜짝쇼”라며 “다음에 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발표를 서두를 필요가 있느냐”고 항의했다.

    DJ정부와 남북관계 일지

    △98년 2월25일=김대중대통령, 취임사에서 특사교환 제의 및 대북 3원칙 발표

    6월22일=강릉 앞바다 북한 잠수정 침투

    6월23일=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 소 500마리 몰고 방북

    8월15일=김대통령, ‘8·15 경축사’에서 장차관급 남북상설대화기구 창설 및 대통령 특사 파견 용의 천명

    8월31일=북한 대포동 미사일 발사

    10월30일=정주영회장, 김정일국방위원장 면담

    11월18일=금강산관광유람선 현대 금강호 첫 출항

    △99년 2월3일=북한, 남북고위급정치회담 개최 제의

    3월16일=북-미, 금창리 지하핵의혹시설 협상 타결

    5월5일=김대통령, CNN과의 회견서 ‘한반도 냉전구조해체 위한 5대 과제’ 제시

    5월25∼28일=윌리엄 페리 미대북정책조정관 방북

    6월15일=남북 해군, 서해 연평도 해상에서 교전

    6월20일=북한의 금강산관광객 민영미씨 억류로 관광 일시 중단

    6월22∼26일=제1차 남북차관급회담 베이징서 개최

    7월1∼3일=제2차 남북차관급회담 베이징서 개최

    8월12, 13일=평양에서 남북노동자축구대회 개최

    9월17일=빌 클린턴 미대통령, 대북경제제재 일부 해제 발표

    9월24일=북한,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 선언

    10월19일=김대통령, 국회 연설 통해 남북민족경제공동체 건설 피력

    12월14일=일본, 대북제재조치 해제 발표

    △2000년1월3일=김대통령, 신년사에서 남북경제공동체 국책연구기관간 협의 제의

    3월10일=김대통령, 베를린서 대북경협지원 확대 등 담은 `베를린선언’ 발표

    3월17일=남북당국자 중국 상하이서 비공식 접촉

    4월1일=김대통령, 동아일보 창간 80주년 인터뷰에서 “총선 후 북한특수” 발언

    4월8일=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과 북한의 송호경 아태평화위부위원장, 중국 베이징서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

    4월10일=남북한, 6월12∼14일 평양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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