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9

2009.06.09

‘노무현 가치’ 부활… 사회적 갈등 폭발할라

노 전 대통령 서거 거대한 파장 예고 … 정부가 분노 삭일 통로 만들어줘야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9-06-05 09: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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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가치’ 부활… 사회적 갈등 폭발할라

    시민들이 덕수궁 앞 시민 분향소를 가로막은 경찰차량에 항의의 뜻으로 추모쪽지를 붙이고 있다.

    5월28일 오전 10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민 분향소가 마련된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닷새가 지났지만 추모행렬은 줄어들 줄 몰랐다. 덕수궁 옆 정동길 돌담은 조문객이 써 붙인 추모사 쪽지로 하얗게 ‘도배’돼 있었다. 낯이 익은 누군가가 종이에 뭔가를 써 돌담에 붙이고 있었다.

    ‘벼랑 끝에서도 앞으로 걸어간 남자, 노무현’.

    시민단체 출신인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고위 공직자 특채로 정부에 들어간 인물. 평소 “시민이 준 권력을 마음대로 낭비한다”며 노 전 대통령의 실정을 비판하던 그였지만, 쪽지에 적힌 추모글엔 그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왔다.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노통이 실정(失政)을 한 게 아니라 우리의 기대가 너무 컸던 거지. 그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이제야 알았네. 공유했던 가치를 실현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그는 끝없이 도전하는 리더였지. 죽음도 도전 그 자체야. 그 가치들은 앞으로도 유용할 거네. 비록 지금은 무너지고 있지만…. 노통에게 정말 미안해.”

    “무너진 가치가 뭐냐”고 묻자 그는 말없이 자신이 쓴 추모 쪽지를 벽에서 떼 들고는 총총히 추모객 속으로 사라졌다.



    “그 양반은 솔직하기나 했지…”

    노무현 전 대통령, 그에게는 죽음조차 ‘물러설 수 없는 승부처’였다. ‘불굴의 승부사’, 그의 자살 앞에 온 사회가 충격과 비탄에 잠겼다. 그는 유서에서 ‘슬퍼하지 말라’고 했지만 서거 일주일 만에 전국 분향소를 찾은 추모객이 수백만명을 넘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의 서거로 그와 가족, 그가 몸담았던 정치세력에 대한 비난과 비판은 일거에 사라졌다. 검찰 수사도 끝났고 사회적, 정치적 판세는 완전히 역전됐다. 그를 한때나마 지지한 사람들은 모두 향불을 들고 “죄송했다”는 말을 연발한다.

    “노무현 찍은 손을 자르고 싶다”며 등을 돌린 386세대와 진보 사회단체들도 그에 대한 비판을 철회하고 업적을 기리는 데 열중한다. “그로부터 탄압을 받았다”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붓던 이들도 영정 앞에서 오열한다. 비전의 부재로 사분오열됐던 진보세력은 서거 소식이 알려지자 전광석화처럼 하나로 뭉친다. 불황에 찌든 서민층은 소탈했던 전직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그 양반은 솔직하기나 했지. 그때가 나았어”라며 그리움에 빠져든다. 2002년 거센 ‘노풍’을 일으키며 노란색 깃발을 드날리던 때를 떠오르게 한다.

    충격과 슬픔은 시간이 갈수록 정부와 보수진영 전체에 대한 원망과 공격의 형태로 바뀌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유서에서 화해와 상생의 불교적 가치관까지 설파하며 자신의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원망하지 말라’고 했지만, 서거의 파장은 그와 정반대 방향으로 확산되고 있다. 직격탄을 맞은 곳은 그와 그의 가족 비리를 수사하던 검찰. 서슬 퍼렇던 검찰은 서거 당일 오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된 모든 사건을 종료하겠다”고 두 손을 들었고, 청와대는 “수사에 무리가 있는지 점검해보겠다”고 뒷걸음질쳤다.

    ‘원망’과 ‘공격’의 정점에는 이명박 정권이 있다. 공격의 키워드는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다. 일부 과격 진보세력과 학자, 언론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숫제 ‘포괄적 살인’이라 규정한다. 그들은 ‘노무현을 죽인 자가 누구냐’고 되물으며 국민적 분노를 증폭시킨다. ‘강부자’ ‘고소영’으로 상징되는 이명박 정부의 인사(人事) 잡음과 전례 없는 경기불황, ‘촛불집회’로 응축된 불만은 이런 ‘의혹’과 맞물리면서 엄청난 화력을 얻고 있다.

    보통 한 사회의 상징적 존재가 세상을 뜨면, 그 지지 집단은 무력감과 혼란에 빠지고 그 대상은 ‘신격화’된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모습은 양상이 아주 다르다. 지난해 촛불집회 이후 잠잠했던 이데올로기 논쟁과 민주주의 퇴보 논란이 부활하면서 벌써부터 사회갈등 양상이 빚어지고 있다.

    진보 언론의 공격에 뉴라이트 등 우익단체 인사들의 반박이 쏟아지면서 ‘난타전’ 직전까지 간 상황. 그래서일까. 심리학자들은 상징적 존재의 자살 이후 우려되는 모방자살 신드롬, 즉 ‘베르테르 효과’는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고 단언한다. “노 전 대통령이 대표하는 가치를 계승하려면 자살할 게 아니라 그와 대척점에 있는 무언가를 거부하고 공격하는 게 더 나은 방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들의 분석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노무현적’ 가치와 이념으로 무장한 이들의 집단행동이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정치적 무력감에 빠져 있던 진보성향 시민들로 하여금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만큼 일반 시민이 거리로 뛰쳐나올 공산이 커졌다. 이는 정권으로선 엄청난 부담이자 사회 위기로 인식될 수 있다. 연세대 황상민 교수(심리학)는 “상호 분열된 집단이 공통의 적이 존재하거나 동일한 위기를 경험할 때는 협동하게 된다는 것이 그 유명한 케이브 사회집단 실험에서 확인됐다”고 분석한다.

    ‘하나’ 될 이유를 찾은 범야권 ‘민주화 세력’도 ‘공통의 적’이 설정되자 급속하게 결집한다. 벌써부터 ‘독재타도’라는 말이 추모행렬 사이에 등장한다. 재야단체와 누리꾼이 주최한 5월26일 추모제에 10만명 넘는 사람이 모여들었고, 한국 최초 ‘인터넷 대통령’의 죽음에 누리꾼들은 흥분과 분노를 쏟아낸다. 황상민 교수는 “마치 증기가 끓어오르는 막힌 밥솥을 그대로 두면 펑 하고 터지는 것과 같다. 내적 증기, 즉 시민의 분노를 새나가게 할 통로가 필요하다”며 안타까워했다.

    “끓어오르는 밥솥을 그대로 두면 터진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나타난 사회갈등 양상을 ‘대파국’ 징조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한 사회평론가는 이를 ‘하인리히 법칙’에 빗대 설명한다.

    “한 나라의 운명을 뒤흔들 사건이 터지기 전엔 29개의 사건이 벌어지고, 29개의 사건에는 300개의 전조증상이 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도 그 자체로는 슬픔이고 충격적인 개별 사건일 따름이지만 그것이 몰고 올 파장이 얼마나 클지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체르노빌 원전폭발 사고 때도 1년 전부터 많은 사건이 이어졌다.”

    하지만 청와대와 여권은 위기를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듯하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의원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온 국민이 추모하고 비통해야 할 일이지, 이를 정권에 대한 공격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 국민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고 말한다. 청와대 정무수석실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별 부담이 없다. 위기관리 프로그램을 가동할 단계가 아니며 그럴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고 했다. 중도 성향의 한 정치학 교수의 말에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가 몰고 온 우리 사회의 변화상이 함축돼 있다.

    “도대체 비판을 못하겠어요. 양시론, 양비론 모두 깨져요. 어느 쪽에 조금 좋은 말을 하든지 안 좋은 말을 하면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분위기니…. 요즘 신문 잘 보세요. 이름 밝히고 비판적인 코멘트를 한 교수가 있는지…. 모두 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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