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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대장성 개혁, 살아난 일본 경제

사실상 해체 조직개편 후 경제 기지개 … 이명박 당선인 롤 모델 언급 초미의 관심

공룡 대장성 개혁, 살아난 일본 경제

1997년 12월3일 도쿄의 가스미가세키(霞が ). 일본의 중앙성청(省廳)이 밀집한 이곳엔 하루 종일 어수선하고 우울한 공기가 감돌았다.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총리가 회장을 맡은 행정개혁회의가 ‘1부 22성청’을 ‘1부 12성청’으로 축소하는 중앙성청 개편안 최종보고서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가스미가세키에서도 가장 큰 충격에 휩싸인 곳은 대장성이었다. 이 최종보고서는 미국식 용어인 ‘재무성’을 도입함으로써 10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대장성’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일본에서 ‘큰 곳간’이라는 뜻의 ‘대장(大)’이라는 용어가 행정 영역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무려 1500년 전이다. 8개 성(省) 가운데 세금 출납을 담당하는 관청을 대장성이라고 불렀다.

‘관청 중 관청’ 무소불위 권부로 군림

대장성 관료들은 일본의 고속 경제성장을 주도해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유서 깊은 부서 명칭을 타의에 의해 바꿔야 한다는 것은 굴욕이 아닐 수 없었다. 비단 이름만 ‘격하’된 게 아니었다. 금융 행정 및 감독권과 더불어 대장성 파워의 양대 축이던 예산편성권이 내각부에 새로 설치되는 경제재정자문회의로 넘어갔다.

이른바 ‘관청 중 관청’으로 불리며 무소불위의 권부로 군림해온 대장성이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됐을까.



일본 정계에서 대장성 개혁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는 1996년 초. 주택금융전문회사(이하 주전·住專)의 부실채권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국민의 불만이 고조되자 여야를 가리지 않고 “대장성을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일본에서 주택대출 등 개인대출을 주로 하는 주전제도는 1970년대 처음 등장했다. 주전들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서부터. 주전들은 은행에서 거액을 빌려 개인들에게 마구잡이로 대출해줬다. 치솟는 땅값과 주가로 온 사회가 들뜬 분위기에서 대출심사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대장성이 부동산 투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1990년 3월 시행한 대출총량규제 조치는 오히려 주전의 ‘몸집 불리기’를 가속화했다. 주전이 대출총량 규제에서 제외된 덕분에 다른 금융기관의 대출 수요까지 주전으로 몰려든 것이다.

‘주전 전성시대’는 1990년대 초반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종말을 고했다. 담보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면서 주전에는 부실대출이 급속히 쌓였다. 95년 6월 말 현재 7개 주전의 대출총액 10조7200억엔의 76%에 해당하는 8조1300억엔이 불량 채권이었다. 이중 46%에 해당하는 4조9500억엔은 고스란히 주전의 손실로 남을 것으로 예상됐다.

주전문제가 이처럼 심각해진 데는 대장성의 안이한 판단이 한몫했다. 1992년 하반기까지만 해도 7개 주전의 부실대출은 4조6500억엔 정도였다. 대장성이 이때 주전문제 해결에 나섰더라면 주전이 일본 경제시스템을 위협하는 불안요인으로까지 비화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하지만 ‘낙하산 인사’를 통해 주전업계와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는 대장성이 주전문제를 수술하는 것은 애초부터 한계가 있었다. 대장성이 주전문제 해결을 미적거리는 바람에 일본 정부는 결국 6850억엔에 이르는 세금을 투입해야 했다.

대장성의 정책 신뢰도가 바닥에 떨어진 것은 주전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장성은 거품경제의 형성과 급속한 붕괴 과정에서도 잘못된 정책 판단과 뒷북대책으로 병을 키웠다.

문제가 이 정도 선에서 그쳤다면 대장성은 개혁의 칼날을 피했을 수도 있다. 과거 대장성 개혁론이 등장할 때마다 대장성은 정계, 관계, 경제계에 뻗친 막강한 물밑 파워를 동원해 개혁공세에서 벗어났다.

재정정책 아직도 여전한 파워 행사

하시모토 정권에서 시작된 개혁 논의에서도 대장성은 희한한 논리로 조직 방어에 나섰다. 이른바 ‘야케부토리(け太り)론’이다. 야케부토리란 불이 난 뒤 가정의 살림이나 사업이 더욱 번창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일본어다. 즉 특정한 금융사고가 발생해서 대장성을 손보려 할수록 대장성은 더욱 비대해진다는 논리였다.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위원회나 기구가 생겨나는 행정 과정을 생각해보면 야케부토리론의 타당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본 최고 엘리트 집단’이라는 대장성 관료들도 자신들의 잔꾀를 단번에 날려버릴 사건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1998년 1월 일본 검찰은 대장성 금융검사실 실장과 과장보좌 등 2명을 전격 체포했다. 검사 대상인 은행으로부터 과도한 접대를 받았다는 혐의였다. 대장성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졌고 시중에선 “과연 이들뿐이겠냐”는 의혹이 번졌다. 미쓰즈카 히로시(三塚博) 대장상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지만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분노한 여론에 밀려 자체 조사에 나선 대장성은 그해 4월 120명을 무더기 징계처분했다. 이중에는 증권국장과 은행국 심의관 등 고위직도 있었다.

무능하고 부도덕한 집단으로 전락한 대장성이 개혁이란 대세를 거스르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대장성의 금융감독권은 1998년 6월 출범한 금융감독청으로 넘어갔다. 이어 2001년 1월 중앙성청 개편안이 정식 시행되면서 예산편성권은 내각부, 금융정책권은 금융감독청 후신인 금융청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확정됐다. 이후 대장성 간판까지 내린 재무성엔 순수한 재정정책 기능만 남게 됐다.

그렇다면 대장성 개혁은 과연 성공했을까, 실패했을까.

대장성이 사실상 해체됐지만 일본은 아직 금융선진국과는 거리가 멀다. 관료주의 특유의 ‘칸막이 행정’도 획기적으로 줄었다고 보기 어렵다. 반면 일본 경제는 최대 아킬레스건으로 지적되던 부실채권 문제를 말끔히 해결했다. ‘대장 불황’‘대장성이 주도하는 금융사회주의’ 등과 같은 부정적인 용어도 사라졌다.

따라서 대장성 개혁이 성공인지 실패인지를 한마디로 단언하긴 어렵다. 다만 대장성이 일본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하던 때와 조직개편 이후의 일본 경제를 비교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1월1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무식에서 “(대장성 개혁에) 감탄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당선인의 말을 음미해보면 이런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일본은 대장성이 사회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그 대장성을 없애는 조직개편을 했다. 잃어버린 10년이 아니었다. 그들은 10년 동안 많은 어려움 속에서 준비를 했다.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다.”

사실 대장성 개혁은 그 하나만 떼어내서 볼 일이 아니다. 중앙성청 개편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정권에서 이뤄진 우정(郵政) 민영화, 그리고 ‘작은 정부’ 개혁이 모두 연장선에 놓여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대장성 개혁의 성과를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주간동아 2008.01.22 620호 (p26~28)

  • 천광암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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