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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삶

“술 마신 후 골 때리면 진짜 약주가 아니쥬”

3대째 전통주 빚는 덕산양조장 주인 이규행

  • 이미숙 주간동아 아트디렉터 leemee@donga.com

“술 마신 후 골 때리면 진짜 약주가 아니쥬”

“술 마신 후 골 때리면 진짜 약주가 아니쥬”
술 덜 깬 아침, 술 빚는 이를 찾아 나섰다.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용몽리에서 3대를 대물림해 술과 사는 남자라 했다. 술이 약보다 독이 더 되는 세상, 뉴스에선 연일 술로 빚어지는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세밑도 턱에 찬 이 아침에 들리는 뉴스도 그렇다. 성폭행 미수 혐의로 조사를 받은 한나라당 소속 당협위원장을 인명진 윤리위원장이 출당시킨다나 뭐라나. ‘주도유단(酒道有段)’을 설파했던 조지훈 시인의 선각(先覺)이 새삼스러운 게 비단 어제오늘 일일까마는 부디 상주(商酒·마실 줄 알고 좋아도 하면서 무슨 잇속이 있을 때만 술을 내는 사람)나 색주(色酒·성생활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 그 마지막 18계단인 폐주(廢酒·일명 열반주)로써 술로 말미암아 세상을 등지지는 말 일이다.

진천 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는 덕산양조장(현 세왕주조) 안주인이자 총괄영업담당자인 송향주(40) 씨. 165cm를 훌쩍 넘을 ‘쭉쭉빵빵’한 체형에 ‘한 미모’가 우선 눈에 확 찬다. 차림새마저 시골과 분위기가 사뭇 달라 물어보니 청주대학에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했단다. 그가 모는 차를 타고 다시 덕산으로 향했다.

“술 마신 후 골 때리면 진짜 약주가 아니쥬”
“술은 증류주와 발효주로 나뉘는 거 아시죠? 저희 회사에서 만드는 술은 다 발효주예요. 할아버님 대부터 만들어온 약주며 ‘덕산 쌀막걸리’도 마찬가지죠. 자랑이 아니라 저희 집 술을 드시는 분들은 하나같이 ‘옛날 바로 그 맛’이라고들 해요. 약주는 박정희 전 대통령께서도 충청도만 오시면 찾아서 드신 술이기도 하고요. 70년대 농번기에 대통령이 직접 모심기나 벼베기 하던 대한뉴스 기억하세요? 그게 이 지역이었어요. 경호원이 직접 양조장을 찾아와서 금방 내린 술을 받아가곤 했죠.”

두주불사(斗酒不辭)로 유명했던 조영창 전 충북부지사도 이 집 ‘술맛’에 반한 이다. 대장암 수술 후에도 덕산약주(천년주) 맛을 뗄 수가 없어 반주로 입술만 적신다는 얘기며, KBS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에서 양조장 사장 역을 맡고 있는 장봉(임선택 분)이 운영하는 공장 신은 따로 세트를 만들지 않고 덕산양조장에서 그대로 촬영해 갔다는 얘기들. 물론 ‘대추나무…’의 양근승 작가 역시 덕산약주 예찬론자라고. 늘 진천에 내려와서 대본을 쓴다니 혹 술이 이유 이지는 않

을까.



양조장을 들어서기 전에 이미 발효주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학습’한 후 이규행(47) 사장을 대면했으니, 술도갓집 안사람답게 입담도 미모 못지않은 달변이랄까.

“집사람이 사장이유. 전 기양 일꾼이쥬 뭐. 약주 개발하는 거만 해노믄 다 알아서 열 몫을 헌게 첨 보는 사람들은 지보구 편하겄다 그라쥬.”

“술 마신 후 골 때리면 진짜 약주가 아니쥬”

등록문화재인 양조장 건물 앞에 선 이규행 사장 부부.

덕산양조장은 1925년 돌아가신 조부(이장범)가 문을 연 이래 2대 이재철 씨에 이어 현재 손자 이규행 씨가 3대째 전통주를 만들어오고 있는 곳. 상가마다 지역이름을 딴 민속주며 전통주가 봇물을 이루는 속에서도 전통방식 그대로 진짜배기 약주를 빚는 곳이다. 하여 소문 짜한 명주(名酒)이기 이전에 이곳에서 생산되는 ‘덕산약주’엔 77년 전통주의 혼이 담겨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주조장 터에 들어서자 안채 대문에는 흰색 발발이가, 양조장 뒷문 양쪽에는 요크셔테리어와 갈색 코크스파니엘이 제가끔 개집 한 채씩을 차지하고 앉았다. 술내 찾아드는 낯선 이를 반길 텐가 쫓을 텐가는 제 주인에게 달린 듯 짖는 기세가 꽤 사납다. 맹견도 큰 개도 아니어서 보안이 목적은 아닐 터라 물어보니 아버지(77)가 수의사를 하셨단다. 서울대 수의학과를 나온 부친 역시 할아버지의 뜻을 좇아 양조장을 맡았으나 수의사 일을 놓지는 않았다고 한다. 충청지역 수의사협회장, 과수원과 호텔을 경영하고 13대 국회의원 출마까지 두루 경험한 지역 원로다.

100% 발효주, 박정희 前 대통령도 반한 ‘옛날 그 맛’

“술 마신 후 골 때리면 진짜 약주가 아니쥬”

국내산 햅쌀을 사용해 술밥을 지어 그 밥과 발효균을 골고루 배합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돈 선거였잖유.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선생 선거참모를 하셨던 할아버지 땜시 정치는 엄청 고사(古辭)하셨는디 JP(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우리 집을 몇 번이나 찾아댕겼구먼유. 진천서는 70% 득표했응께 표는 잘 나왔쥬. 음성에서 덜 나와서 그만 탈락했지만서두….”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신익희 선생과 조부의 친분은 해공이 독립운동을 하던 일제강점기부터다. 그가 신익희 선생의 오른팔이었던 건 집 안 여기저기 있는 해공 선생의 글씨며 그림이 증명한다. 공장 뒤쪽에 있는 안채뿐 아니라 양조장 안에 있는 사무실 벽을 파고 만든 철제금고 속에도 당시 선거벽보며 장부, 해공의 유품이 가득하다고(그런데 열쇠가 없단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3중금고며 영화 세트마냥 30년대 풍이 물씬한 목조사무실, 예사롭지 않은 외관에서 헤아릴 수 있듯이 덕산양조장은 건물만으로도 이미 지역 명소가 된 지 오래다.

2003년 6월30일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 58호로 지정한 것. 발효실에 가득 찬 대형 술독에 음각된 ‘1935년 용몽제(龍夢製)’란 글씨며, ‘소화 5년 경오 구월 초이일 미시 상량 목수 성조운’, 단층 합각함석 지붕 중앙에 아직도 선명한 상량문이 제 살아온 세월을 다 말해줄까. 전국에 이만한 연혁을 가진 양조장 건물이 이만큼 온전하게 남은 곳 또한 이 한 곳뿐이다.

“술 마신 후 골 때리면 진짜 약주가 아니쥬”

이규행 사장은 끊임없는 연구개발로 알코올 도수 22도가 넘는 약주를 개발했다.

대부분의 곡창들처럼 진천, 덕산은 강을 옆에 낀 저지대다. 양조장을 지은 다음 해 큰 홍수가 나 술도가가 잠기자 1930년, 지대가 높은 터를 골라 옮겨 지은 게 지금의 공장이다. 그 옛날 백두산에서 채취한 전나무, 삼나무를 압록강변에서 제재해 수로로 날라 기초를 쌓았다고 한다. 옻칠한 나무로 외벽을 온통 두른 건물은 그야말로 술 공장에 맞춤한 구조를 갖고 있다. 대나무와 칡넝쿨로 뼈대를 엮어 세우고 짚과 황토를 몇 날 며칠 차지게 으깨어 속을 채운 후 회를 바른 벽들은 70년 옹골진 역사를 말해주듯 효모균들이 벽을 덮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발효실과 주모실의 옹벽은 두께만 자그마치 90cm다. 대나무 뼈대와 황토발림은 같지만 벽 속은 다 왕겨로 차 있다. 발효실 천장도 마찬가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보여준 천장 위마저 왕겨가 산더미다.

“1·4후퇴 때 부친이 저 왕겨 속에 숨어 전쟁을 피하셨슈. 할아버진 사내놈이 그깟 빨갱이 무서워 숨느냐고 벼락을 내리시고…. 근디 진짜 인민군보다 지랄맞은 건 ‘동네 빨갱이’였다더만요. 아버지가 저그에 안 숨었으면 아마 지들도 없었겄쥬. 전쟁바람에 공장이 불타번질 뻔했는디, 건진 것도 할아버지유. 국군이 퇴각하다 적진으로 쓰일까봐 불 지를라는 걸 소 1마리, 장작 두 차허고 45원 줘서 말렸대네유.

왕겨 뿐 아니라 황토도 덕산 꺼를 알아주는디 기중 용몽리 게 젤 낫다고 해유. 오죽하믄 시집올 때 고무신에 묻은 흙이 죽을 때꺼정 안 떨어지더라 그랬겄슈. 그런 황토로 만들었으니 문화재가 될 만허쥬.”

두꺼운 옹벽을 채우고 덮은 왕겨는 더위나 추위와 상관없이 발효실 온도를 27℃로 일정하게 유지시킨다고. 환기와 통풍도 빼놓을 수 없다. 얼마 전 문화재청에서 건물 보수를 해주었는데 천장에 있는 작은 미닫이 창문을 열자 바닥의 먼지들이 진공청소기처럼 빨려 올라가는 걸 직접 눈으로 본 이 사장은 술 공장으로서 이곳만큼 과학적인 설계 시공을 한 데는 찾기 어려울 거란다.

부인과 달리 푸짐한 체구에 사람 좋아 보이는 이 사장이 약주에 인생을 건 것은 1998년. IMF사태 직전 부친의 부름을 받고 낙향했다. 대학(청주대 건축학과)을 마치고 서울 화신건축연구소(소장 박시익, 건축 풍수이론으로 유명한 건축가 )에서 건축설계사를 하다가 당시 연애하던 송향주 씨가 ‘고무신 꺾어 신을까봐’ 청주로 내려왔다.

77년 대물린 전통의 양조장 건물은 등록문화재 58호

이규행 씨는 대학에 복학한 후 ‘점찍어’ 사귄 부인에게 한 번 채였다가 ‘열 번이라도 찍는’ 근성을 발휘해 89년 결혼해 1녀 2남을 두었다. 잘 키워보겠다고 순번표 받아가며 어렵사리 ‘뺑뺑이’ 돌려 넣은, 유명 사립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둘째와 중학교 잘 다니고 있는 첫째를 데리고 고향을 향할 때는 솔직히 심란했다고 한다.

조부 시절에는 막걸리와 약주만 생산하던 것을 1961년부터 운영을 맡은 부친이 약주 전문공장으로 변신시켰다면, 이규행 사장은 선대가 일구어놓은 덕산약주의 ‘비결(秘訣)’을 재차 증류하는 중이랄까. 약주는 ‘약주다워야’ 한다. 그런 술을 빚기 위해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다. 일본에서 한다 하는 약주들도 알코올 도수는 대개 17~8도에 그치게 마련이다. 동양3국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22.8도짜리 약주가 그의 손에서 탄생한 것은 다 그런 노력의 산물일 터.

“20도 이상은 턱도 없을 거라고 부친도 고개를 저으셨슈. 일종의 교감이랄까, 전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미생물까지도 그런 게 가능할 거란 확신이 있었구먼유. 그래서 효모균 발효 단계서부터 좋고나쁜 극단의 모든 환경을 주었쥬. 도태될 놈들은 사라지고 살 놈만 남으니 그 도수가 나오데요. 적자생존이쥬 뭐.”

오늘 갓 나온 뜨끈한 옥수수주를 시음하며 한잔 건네주는데 향이 끝내준다. 덕산양조장의 대표 상품은 ‘덕산천년주’. 질 좋은 진천쌀과 직접 띄운 누룩, 여기에 인삼·백복령·구기자 등 12가지 약초로 빚어 술맛이 순하고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뒤끝 좋기로 유명하다. 진천군 문화상품으로 지정된 바 있는 덕산천년주는 2000년 전국관광기념품 공모전에서도 동상을 받았다.

천년주 외에 이 사장이 이즈음 개발에 힘을 쏟은 명주가 또 하나 있다. ‘천마활보주’가 그것. 지하 150m 깊이에서 퍼올린 천연 암반수에다 국내산 천마, 자양강장제 위주의 한약재를 18가지나 넣어 발효시킨 술이다. 약간의 엑기스나 향만 넣고선 약주라 이름 붙이는 일반 주류와 달리 덕산양조장 약주들은 주정과정에 약재를 직접 갈아 넣은 100% 순곡주다.

고서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약주를 천제(天祭), 종묘제(宗廟祭)를 비롯한 제사와 애경사에 다룬 술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고금을 아울러 약주를 귀히 여겨 아직도 명절 제례에는 빠뜨리지 않고 올리는 술이 약주다. 문제는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약주가 전통방식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 시중 약주는 태반이 소맥분이나 옥수수 전분을 주원료로 만들지만 덕산약주는 국내산 햅쌀만을 사용한다. 묵은 쌀로 빚은 술은 반드시 묵은 맛이 나기 마련이다. 옥수수 전분에 물을 섞어 끓인 뒤 고두밥 대용으로 4~5일 눈가림해 발효시켜 내놓는, 일반 당화주(糖化酒)와는 차원이 다른 술이 덕산약주다.

“IMF사태 때 저희 회사를 살려준 술이 ‘덕산약주’였시유. 술 마신 다음 날 머리가 아픈 건 술 만드는 사람이 정직하게 만들지 않아서가 아니겄슈? 약주를 마시기 전엔 반드시 술병을 흔들어보세유. 거품이 오래가는 술이 진짜 약주유.”

해서 같은 양조업자들끼리도 자기들이 마실 술은 덕산표를 찾아 사간다는 말이 나왔던가. 약주류와 막걸리 외에 ‘보릿고개 동동주’ ‘좁쌀 동동주’ ‘가시오가피주’ ‘구기자주’ ‘시골찰옥수수술’ 등 이 사장의 손을 빌려 세상에 나온 모든 술은 독보다 약으로 남고자 한다.

2000년 ‘진천군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되기도 한 이규행 사장의 꿈은 술보다 진하다. 이미 문화재인 덕산양조장 외에 주류박물관을 겸한 전통문화관을 제 손으로 직접 지어, 충북에 오면 반드시 들러볼 관광명소로 만들겠다는 포부가 술처럼 익고 있다. 인터뷰를 했던가, 술밥 익는 소리에 취했던가. 두 손이 미어져라 쥐어준 천마활보주, 옥수수주, 쌀막걸리 두 통을 들고 돌아서는 발길, 마음부터 취해오는 세밑이다.

(세화주조 043-536-3567, www.icnj.co.kr)



주간동아 2007.01.02 567호 (p72~74)

이미숙 주간동아 아트디렉터 leem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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