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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히로히토-신화의 뒤편’

군국주의 전범 실체를 고발한다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군국주의 전범 실체를 고발한다

군국주의 전범 실체를 고발한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2월4일자)은 일본이 19세기 말부터 제2차 세계대전 패망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약탈한 문화재 10만여점을 반환하지 않았으며, 반환을 반대한 핵심인사가 당시 일본 점령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었다고 폭로했다. 이 기사는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1948년 맥아더 장군의 라디오 연설 녹취록(군사행동과 점령의 결과로 상실되거나 파괴된 문화재의 원상복귀를 반대한다)을 증거로 내세웠다. ‘타임’은 맥아더의 판단에 ‘정치적 고려’가 작용했다고 했으나 그 ‘정치적 고려’가 무엇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뜻밖에도 이런 의문을 풀어준 것은 에드워드 베르가 쓴 ‘히로히토-신화의 뒤편’이었다. 베르는 이 책 서문에서 1945년 9월27일 도쿄 미 대사관에서 히로히토 천황과 맥아더 장군이 만난 35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기술했다. 그해 8월까지만 해도 천황은 전범으로서 ‘사형’도 각오해야 할 처지였다. 더욱이 종전 직전 맥아더는 천황제를 없애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불과 한 달여 만에 입장을 바꿔 “천황에게 문제가 생기면 일본 전체가 어떤 형태로든지 저항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보고서를 올리고 일본 재건을 위해 함께 일해야 하는 파트너로 인정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온화한 인품의 천황이 군국주의자들의 꼭두각시 노릇만 했으며, 천황은 오히려 전쟁의 희생양이었다고 믿게 되었다.

히틀러, 무솔리니와 함께 세계 3대 전범으로 꼽히는 그가 63년 동안이나 일본을 통치하고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게다가 천황이 면책받는 대신 태평양전쟁을 막기 위해 애썼던 히로타 고키 총리와 남경학살의 주모자라는 누명을 뒤집어쓴 마쓰이 이와네 장군 같은 이들이 교수형에 처해진 사실을 어떻게 해석할까.

저자는 이 모든 일이 영민하고 교활한 히로히토 천황의 이미지 조작이었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서려 했던 맥아더 장군과, 천황에게 기꺼이 면죄부를 주고 소련의 팽창주의를 막을 보루로서 일본을 확보하게 된 워싱턴 고위 정책당국자들의 계산이 작용했다.

논픽션 다큐멘터리 ‘히로히토-신화의 뒤편’은 그림자 없는 지휘관 히로히토 천황이 어떻게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전쟁으로 몰고 갔는지 보여준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천황에게 너무나 친절했던 현실정치를 대신해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요구하고 있다.



총 26장으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는 1901년 히로히토가 태어나던 해로부터 시작한다. 황태자의 성장과정은 비교적 간략히 서술되어 있지만 평화를 사랑하는 젊은 온건주의자와 군국주의자라는 이중적 이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동년배에 비해 열악한 체력, 굽은 척추와 근시, 발을 질질 끄는 보행자세 등은 번번이 활달한 동생 지치부 왕자와 비교되었다. 심지어 네 명의 공주를 낳고도 아들이 없자 일본 황실은 은근히 지치부 왕자를 염두에 두기도 했다. 한편 극우 군국주의자들은 온건파 총리를 암살하는 극단적 테러를 서슴지 않으며 천황을 압박해 온다. 히로히토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에 대해 찬성도 반대도 아닌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 예를 들어 만주사변 때 천황은 육군의 만주 점령을 불쾌하게 여겼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전면전으로 가기 전 육군의 출동을 제한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와 재량권이 있었다. 히로히토는 항상 부하들을 앞세우고 자신은 뒤로 물러서는 방식으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반면 1936년 젊은 장교들이 2·26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진압작전을 지휘하고 연루자들을 처단하는 히로히토는 용의주도했다. 2·26 쿠데타 이후 그는 호전적인 육군에게 해외라는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판단했고 공산화돼 가는 중국을 제어하기 위해 중일전쟁을 계획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 히로히토는 예년과 다름없이 여름 별장지 하야마 해변에서 해양생물을 채집하며 휴가를 즐겼다. 히로히토의 이러한 위장술은 외교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미국이나 영국과 손을 잡는 듯하다가 어느새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 쪽으로 선회하는 노회함을 보여주었다.

에드워드 베르는 500쪽이 넘는 이 방대한 기록에서 시종일관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 책임론을 거론한다.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던 도조 히데키가 “일본에서 천황이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본사람 누구도 천황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 말에 귀기울여야 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광복의 기쁨을 안겨준 1945년 8월15일 종전연설문에는 단 한 번도 ‘항복’이나 ‘패배’와 같은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저자는 마치 세계평화를 위해 종전이라는 시혜를 베푸는 듯한 뉘앙스의 연설문을 꼼꼼히 살펴보라고 말한다. 이 종전연설문이 히로히토 천황이 보여준 최고의 위장술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히로히토/ 에드워드 베르 지음/ 유경찬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1만7000원





주간동아 322호 (p120~121)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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