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천하를 바둑판 위로 좁혀놓고 본다면 이세돌은 가히 제왕이자 정복자였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그는 ‘두었노라 이겼노라’를 외치며 거침없이 승수를 쌓았고, 그 결과 6개의 왕관을 겹쳐 쓰며 세계 바둑계의 황제로 우뚝 섰다.
1월 새해 벽두부터 일본에서 벌어진 도요타덴소배 결승전에서 일본의 ‘체감 1인자’ 장쉬를 2대 1로 꺾고 우승컵을 안아들더니 2월에는 9단들만 참가해 속칭 ‘입신 전쟁’으로 불리는 맥심커피배에서 우승했고, 6월에는 ‘한중일 속기삼국지’ ‘TV바둑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중국의 비밀병기 천야오예를 주저앉혔다.
8월 한국물가정보배에서 타이틀 하나를 보탠 이세돌은 이후 더욱 기세를 불태우며 정복자로서의 욕망을 드러냈다. 10월 입단동기 라이벌 조한승과 정면 충돌한 국내 최대기전 강원랜드 명인전 결승전과, 모처럼 도전자 자격으로 링에 오른 국수전 윤준상과의 도전기 대결에서 모두 3대 0 완승을 거두는 그를 바라보며 세인들은 감탄을 넘어 경악과 공포를 느꼈다.
개인생활 안정·속기화 추세가 연승 비결
요즘의 이세돌을 보면 ‘브레이크가 고장난 스포츠카’의 무한질주를 보는 듯하다. 여기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자는 국내, 아니 세계 바둑계를 통틀어 봐도 눈에 띄지 않는다. 장거리 주자라면 꿈에서라도 그리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의 경지가 반상 가득 펼쳐진 셈이다. 솔직히 말해 지금 상황이라면 이세돌 본인조차 자신의 두 발을 제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도대체 2007년 이세돌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세돌의 측근들은 개인생활의 안정에 방점을 둔 해석을 내놓는다. 2006년 동갑내기 김현진 씨를 신부로 맞으며 스물셋에 일찌감치(?) 아버지가 된 이세돌의 삶에 달콤한 안정이 스며들면서 승부사로서뿐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까지 달라졌다는 얘기다.
“착실한 기사가 결혼 후 달라지기는 힘들다. 그러나 성격적으로 분산돼 있던 이세돌은 결혼과 함께 하나로 모아지면서 힘을 내는 것 같다.”(김만수 7단)
기전들의 속기화 추세도 이세돌에게 약이 됐다는 시각이 많다. 빠른 승부를 원하는 팬들의 입맛에 부응하기 위해 대국시간은 5시간에서 4시간, 다시 3시간으로 줄었고, 아예 몇 분의 제한시간 후 바로 초읽기에 들어가는 초속기 기전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이런 경향으로 볼 때 천하에서 가장 빠르고 정묘한 수읽기 능력을 지닌 이세돌이 뜨는 것은 당연하다는 얘기다. 어떤 이는 “이세돌은 현대바둑에 최적화된 인물”이라며 ‘돌비어천가’에 목소리를 높인다.
컴퓨터를 방불케 하는 계산력을 바탕으로 종반을 운영해 일세를 풍미해온 이창호가 저물고, 화려한 감각과 발군의 수읽기 능력을 지닌 이세돌이 부각되는 것은 이처럼 바둑 환경의 변화와 무관치 않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반복되는 의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과연 이창호의 시대는 가고 이세돌의 시대가 온 것인가?
2007년 한 해 성적만 놓고 본다면 이는 가설의 범주를 벗어난다. 엄연한 사실이다. 이세돌이 6관왕(한때 7관왕이었다)을 질주하며 국내 프로기사 중 ‘최다관왕’이란 영광을 누릴 때 ‘바둑사의 영원한 미스터리이자 신화’라는 이창호는 가까스로 3관왕을 유지하며 체면 손상을 최소화하는 데 그쳤다.
물론 이세돌이 올린 올해의 성과가 이창호의 위업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겨우 6관왕? 이창호는 1994년 무려 13관왕에 올랐다. 이세돌이 올해 24연승으로 바둑대상 연승상 부문 수상자로 확정됐지만 이창호의 최다연승은 41연승이다.
이세돌이 올해 무적의 한 해를 구가했다고는 하지만 전대 일인자들이 보여준 카리스마에는 근접하지 못했다는 시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타이틀의 90% 이상을 일인자가 독식하다시피 한 선배들과 달리 이세돌은 그렇지 못했다. 2007년은 이세돌의 해이기도 했지만 그와 이창호의 뒤를 추격하는 ‘제3지대 강자’들의 해였다.
이들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박영훈. 국제대회인 후지쓰배와 국내 기전 GS칼텍스배, 기성전을 묶어 종합 3관왕에 올라 ‘어린 왕자’에서 ‘황태자’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그것도 결승에서 이창호와 이세돌, 최철한을 꺾어 현 4대 천황의 일각으로서 조금도 손색없음을 입증해 보였다. 포스트 이세돌 주자의 선두격인 강동윤은 전자랜드배에서, ‘원펀치’ 원성진은 천원전에서 우승해 본격 타이틀 홀더가 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세돌의 일인자론이 흔들리는 이유는 그가 올해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올해 이세돌과 이창호는 두 판의 공식대국을 두었을 뿐이다. 그것도 정상무대가 아닌 본선에서 1승1패로 수평을 이뤘다.
즉, 이세돌의 6관왕 중 단 하나도 이창호와 정상대결을 펼쳐 얻어낸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좀 과장해 표현하면 일인자가 와병 중인 틈을 타 쿠데타에 성공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올해 이창호는 입단 이래 최악의 슬럼프를 겪었다. 한 해 동안 54승31패로 승률도 64%에 그쳤다. 이창호가 프로가 된 이후 다승 부문에서 10위권 밖으로 나간 적이 있었던가. 프로기사 랭킹에서 이세돌에게 1위 자리를 내준 지도 꽤 됐다.
부진의 늪 이창호 건강이상설도 시달려
건강 이상설도 있었다. 2006년 2월 농심신라면배 최종국에서 패한 뒤 빈혈 증세를 처음 느꼈던 이창호는 이후 거듭된 두통과 현기증으로 고통받았다. 심한 경우는 대국 중이나 대국 후 잠깐씩 정신을 잃을 때도 있었다. 건강검진을 받았으나 병원으로부터 의학적으로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소견을 들었을 뿐이다.
어쨌든 두 사람 모두 뒷짐 지고 먼 산을 바라보는 듯하지만 속내는 끊임없이 상대를 의식하고 있다. 다음 인터뷰를 보자.
- 이창호 9단과 계속해서 1위 경쟁을 벌이고 있다. 본인은 이창호 9단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하는가.
“실력으로는 차이가 많이 나지만 내가 요즘 기세가 좋아서 대등해 보이는 것이다. 앞으로는 좀더 노력해 진짜 대등한 승부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2007년 8월21일, 제3기 한국물가정보배 우승을 결정짓던 날 이세돌 9단의 인터뷰)
- 현 한국랭킹 1위는 이세돌 9단이다. 언젠가 이세돌과 정상의 자리를 놓고 대결할 날이 있으리라 보는데, 이창호 9단은 어떤가? 이세돌 9단이 자신보다 더 낫다고 보는가.
“글쎄, 이세돌 9단과 최근에 많이 붙어보지는 못했지만 자웅을 가린다면 큰 무대에서 붙어야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나도 최상의 컨디션에서 맞붙어야겠고, 이세돌 9단도 되도록 큰 무대에서 붙어보고 싶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선 이기거나 지거나 본전 같다는 생각이 든다.”(2007년 7월31일, 팬클럽 ‘두터미’가 마련한 생일파티에서 이창호 9단의 인터뷰)
결론적으로 2008년 바둑계의 최대 화두는 ‘과연 한국 바둑을 대표하는 양웅의 영토전쟁이 어떻게 될 것이냐’가 틀림없다. 여기에 본격적으로 2007년 타이틀 무대 진입에 성공한 미래의 용과 호랑이의 가세. 한반도를 발원지로 한 이 숙명의 반상전은 세계 바둑지도를 바꿀 만큼 거대할 것이다.
1월 새해 벽두부터 일본에서 벌어진 도요타덴소배 결승전에서 일본의 ‘체감 1인자’ 장쉬를 2대 1로 꺾고 우승컵을 안아들더니 2월에는 9단들만 참가해 속칭 ‘입신 전쟁’으로 불리는 맥심커피배에서 우승했고, 6월에는 ‘한중일 속기삼국지’ ‘TV바둑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중국의 비밀병기 천야오예를 주저앉혔다.
8월 한국물가정보배에서 타이틀 하나를 보탠 이세돌은 이후 더욱 기세를 불태우며 정복자로서의 욕망을 드러냈다. 10월 입단동기 라이벌 조한승과 정면 충돌한 국내 최대기전 강원랜드 명인전 결승전과, 모처럼 도전자 자격으로 링에 오른 국수전 윤준상과의 도전기 대결에서 모두 3대 0 완승을 거두는 그를 바라보며 세인들은 감탄을 넘어 경악과 공포를 느꼈다.
개인생활 안정·속기화 추세가 연승 비결
요즘의 이세돌을 보면 ‘브레이크가 고장난 스포츠카’의 무한질주를 보는 듯하다. 여기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자는 국내, 아니 세계 바둑계를 통틀어 봐도 눈에 띄지 않는다. 장거리 주자라면 꿈에서라도 그리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의 경지가 반상 가득 펼쳐진 셈이다. 솔직히 말해 지금 상황이라면 이세돌 본인조차 자신의 두 발을 제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도대체 2007년 이세돌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세돌의 측근들은 개인생활의 안정에 방점을 둔 해석을 내놓는다. 2006년 동갑내기 김현진 씨를 신부로 맞으며 스물셋에 일찌감치(?) 아버지가 된 이세돌의 삶에 달콤한 안정이 스며들면서 승부사로서뿐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까지 달라졌다는 얘기다.
“착실한 기사가 결혼 후 달라지기는 힘들다. 그러나 성격적으로 분산돼 있던 이세돌은 결혼과 함께 하나로 모아지면서 힘을 내는 것 같다.”(김만수 7단)
기전들의 속기화 추세도 이세돌에게 약이 됐다는 시각이 많다. 빠른 승부를 원하는 팬들의 입맛에 부응하기 위해 대국시간은 5시간에서 4시간, 다시 3시간으로 줄었고, 아예 몇 분의 제한시간 후 바로 초읽기에 들어가는 초속기 기전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이런 경향으로 볼 때 천하에서 가장 빠르고 정묘한 수읽기 능력을 지닌 이세돌이 뜨는 것은 당연하다는 얘기다. 어떤 이는 “이세돌은 현대바둑에 최적화된 인물”이라며 ‘돌비어천가’에 목소리를 높인다.
컴퓨터를 방불케 하는 계산력을 바탕으로 종반을 운영해 일세를 풍미해온 이창호가 저물고, 화려한 감각과 발군의 수읽기 능력을 지닌 이세돌이 부각되는 것은 이처럼 바둑 환경의 변화와 무관치 않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반복되는 의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과연 이창호의 시대는 가고 이세돌의 시대가 온 것인가?
2007년 한 해 성적만 놓고 본다면 이는 가설의 범주를 벗어난다. 엄연한 사실이다. 이세돌이 6관왕(한때 7관왕이었다)을 질주하며 국내 프로기사 중 ‘최다관왕’이란 영광을 누릴 때 ‘바둑사의 영원한 미스터리이자 신화’라는 이창호는 가까스로 3관왕을 유지하며 체면 손상을 최소화하는 데 그쳤다.
이창호(왼쪽)와 이세돌의 전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2004년 왕위전에서 맞붙은 두 사람.
이세돌이 올해 무적의 한 해를 구가했다고는 하지만 전대 일인자들이 보여준 카리스마에는 근접하지 못했다는 시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타이틀의 90% 이상을 일인자가 독식하다시피 한 선배들과 달리 이세돌은 그렇지 못했다. 2007년은 이세돌의 해이기도 했지만 그와 이창호의 뒤를 추격하는 ‘제3지대 강자’들의 해였다.
이들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박영훈. 국제대회인 후지쓰배와 국내 기전 GS칼텍스배, 기성전을 묶어 종합 3관왕에 올라 ‘어린 왕자’에서 ‘황태자’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그것도 결승에서 이창호와 이세돌, 최철한을 꺾어 현 4대 천황의 일각으로서 조금도 손색없음을 입증해 보였다. 포스트 이세돌 주자의 선두격인 강동윤은 전자랜드배에서, ‘원펀치’ 원성진은 천원전에서 우승해 본격 타이틀 홀더가 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세돌의 일인자론이 흔들리는 이유는 그가 올해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올해 이세돌과 이창호는 두 판의 공식대국을 두었을 뿐이다. 그것도 정상무대가 아닌 본선에서 1승1패로 수평을 이뤘다.
즉, 이세돌의 6관왕 중 단 하나도 이창호와 정상대결을 펼쳐 얻어낸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좀 과장해 표현하면 일인자가 와병 중인 틈을 타 쿠데타에 성공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올해 이창호는 입단 이래 최악의 슬럼프를 겪었다. 한 해 동안 54승31패로 승률도 64%에 그쳤다. 이창호가 프로가 된 이후 다승 부문에서 10위권 밖으로 나간 적이 있었던가. 프로기사 랭킹에서 이세돌에게 1위 자리를 내준 지도 꽤 됐다.
부진의 늪 이창호 건강이상설도 시달려
건강 이상설도 있었다. 2006년 2월 농심신라면배 최종국에서 패한 뒤 빈혈 증세를 처음 느꼈던 이창호는 이후 거듭된 두통과 현기증으로 고통받았다. 심한 경우는 대국 중이나 대국 후 잠깐씩 정신을 잃을 때도 있었다. 건강검진을 받았으나 병원으로부터 의학적으로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소견을 들었을 뿐이다.
어쨌든 두 사람 모두 뒷짐 지고 먼 산을 바라보는 듯하지만 속내는 끊임없이 상대를 의식하고 있다. 다음 인터뷰를 보자.
- 이창호 9단과 계속해서 1위 경쟁을 벌이고 있다. 본인은 이창호 9단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하는가.
“실력으로는 차이가 많이 나지만 내가 요즘 기세가 좋아서 대등해 보이는 것이다. 앞으로는 좀더 노력해 진짜 대등한 승부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2007년 8월21일, 제3기 한국물가정보배 우승을 결정짓던 날 이세돌 9단의 인터뷰)
- 현 한국랭킹 1위는 이세돌 9단이다. 언젠가 이세돌과 정상의 자리를 놓고 대결할 날이 있으리라 보는데, 이창호 9단은 어떤가? 이세돌 9단이 자신보다 더 낫다고 보는가.
“글쎄, 이세돌 9단과 최근에 많이 붙어보지는 못했지만 자웅을 가린다면 큰 무대에서 붙어야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나도 최상의 컨디션에서 맞붙어야겠고, 이세돌 9단도 되도록 큰 무대에서 붙어보고 싶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선 이기거나 지거나 본전 같다는 생각이 든다.”(2007년 7월31일, 팬클럽 ‘두터미’가 마련한 생일파티에서 이창호 9단의 인터뷰)
결론적으로 2008년 바둑계의 최대 화두는 ‘과연 한국 바둑을 대표하는 양웅의 영토전쟁이 어떻게 될 것이냐’가 틀림없다. 여기에 본격적으로 2007년 타이틀 무대 진입에 성공한 미래의 용과 호랑이의 가세. 한반도를 발원지로 한 이 숙명의 반상전은 세계 바둑지도를 바꿀 만큼 거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