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당선자는 12월20일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비핵화로 남북은 새로운 협력시대를 열고 공존을 통해 평화의 길로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초상 액자를 가리키며) 저거 내려야지!”(남측)
“(남측에서 그 이야기를 한 실무자를 가리키며) 당신은 아버지 어머니도 이거, 저거로 부르나!”(북측)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액자 말이지. 그건 내려야 하지 않소!”(남측)
“남의 집에 와서 아버지 어머니보고 이거, 저거 하는 사람들과 무슨 말을 하나!”(북측)
이튿날 오전 북한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속으로 이거 통일하자면 제도, 개념을 갖고 논의하면 안 된다고 느꼈다. (‘초상’을 내리라는 말이) 뼈저리게 들렸다.”
그의 말엔 북측 인사들이 생각하는 문제가 함축돼 있다. 국방장관회담이 끝난 뒤 북측에선 이런 말도 흘러나왔다.
“우리 때 통일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 저렇게 차이가 크니 인차(이내) 되긴 글렀지 뭐. 우리 손자 때나 돼야 하나.”
서울의 대선은 한나라당의 승리로 끝났다. 투표가 한창 진행되던 12월19일 낮, 북측의 분석팀은 선거 전망을 내놓았다. 그들의 분석은 이랬다. ‘이명박(MB) 47%, 정동영 27%’(실제 투표결과는 이명박 당선자 48.67%, 정동영 전 후보 26.14%).
대북사업 칼질 우려 … 겉으론 태연한 모습
평양이 대선 결과를 거의 정확하게 맞힌 것은 서울의 대선에 그만큼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민주평화세력을 자임한 진보’에서 ‘실용주의를 표방한 보수’로 권력의 무게중심이 옮겨가는 것에 대해 평양의 불안감은 결코 작지 않았다.
특히 “MB의 실체를 모르겠다”는 게 평양을 당혹스럽게 했다. 남북 간의 일에 등장해본 적이 없는 사람인 데다, 강경보수 색이 빠지긴 했으나 여전히 보수 성향이 강한 한나라당을 발판으로 차기 정권을 이끌 MB가 어떤 대북정책을 들고 나올지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7월 이후 평양은 MB에 대한 비판을 삼갔다. 실용주의를 내세운 그를 드러내놓고 비난할 까닭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0월의 정상회담과 이후 노무현 정부와의 협력 과정에서도 ‘무비판 기조’는 유지됐다. 이번 대선에선 북풍이 불어오지 않은 것이다.
MB와 한나라당이 내놓고 있는 대북정책의 ‘일각(一角)’은 한편으론 아슬아슬하다. 상대와 이야기를 섞어보지 않은 채 나온 일방적인 발상법이다. 남북한 관계와 6자회담 등으로 엇갈리면서 중첩되는 복잡한 문제에 획일적 잣대를 적용함으로써 스스로 올가미를 매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북측은 이런 점을 우려하고 있다. 대화가 없는 상황에서 서로간 ‘감정의 골’이 패면 회복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이미 그럴 조짐도 보인다. ‘본때’ 운운하는 식의 거침없는 말들이 한나라당 일각에서 나왔다. 그런 태도는 전임 정권의 잘못을 따지고 새 정책을 발전시켜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평양의 지도부 인사들에게 서울의 이런 모습은 일견 예상된 부분이다. 그들도 정권 하나가 바뀐 게 아니라 사람이 통째로 바뀐다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태연한 척하고 있다. 오랫동안 진행돼온 사업들을 믿고 있는 것이다. 개성공단이 그렇고 금강산 관광도 마찬가지다. 2차 정상회담과 총리급 회담, 그리고 일련의 회의를 통해 새로 진행되는 사업도 있다. 새로운 정부가 ‘결을 무시하고’ 이들 사업에 마구 칼을 대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지만 큰 폭으로 칼질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고 그들은 우려한다.
‘한·미·일 공조 우선’ 간헐적 뉴스에 불안과 불만
주목할 만한 점은 MB의 대북 발언이 ‘전제조건’을 달고 있다는 것이다. “핵 폐기가 되지 않으면 남북관계는 없다”는 식으로 평양이 들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논리는 앞서 본 국방장관회담의 분위기와 일맥상통한다. 김일철 부장의 ‘뼈저리게 들렸다’는 단어의 행간이 북측 수뇌부가 서울의 새 집권 측을 바라보는 눈이라고 할 수 있다.
새해 초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주도하는 국면이다. 그 속에서 남북 간 대화가 있을 것인가, 아니면 팽팽한 기싸움이 나타날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판을 이렇게 짤 테니 따라오라는 남측을 일단 지켜볼 것인가 하는 고민이 평양 지도부에 있는 것이다.
대선이 끝난 뒤 간헐적으로 나오는 ‘한미일 공조 우선’이니 ‘대북사업의 전면 재검토’니 하는 서울발(發) 뉴스에 평양은 불안과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평양은 상대가 엄연히 있는데 남측이 혼잣말만 하니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실용보수든 실사구시든 남북한 관계에 가장 좋은 방향이 무엇인지를 놓고 보수진영이 평양과 대화 기회를 가져본 지가 까마득한 옛날이다. 간간이 한나라당 인사들과 북측 간의 협의가 있었지만 그것은 틀이 맞지 않은 것이었다. 진보진영이 꾸민 잔치에 객식구로 껴서 불만을 토로하던 수준이었을 뿐이다.
북측은 2008년부터 노동당의 역량을 경제사업에 집중하겠다고 할 만큼 ‘경제개선’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10월3일, 2차 남북 정상회담의 한 장면을 보자. ‘개혁’ ‘개방’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북측 수뇌부가 흔쾌하게 ‘그러마’라고 받을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개혁이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까지 잘못됐으니 다 바꾸라는 말이 아닌가. 그러니 강한 반발이 나왔다. ‘ 언어’는 이처럼 서로의 감정을 자극한다. MB가, 한나라당이 감정적으로 평양을 건드리는 말을 마구 뱉어낸다면 아마도 북측이 그런 발언을 참아내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10년 동안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남북한 관계는 겉으로는 깊어진 듯 보였으나 북측은 그 사이 먹고사는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했다. 생존이란 면에서 대외관계를 이끌어온 평양의 지난 세월에 대해 한나라당이 일거에 ‘결을 거꾸로 자르자’고 덤비면 반발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최악의 상황을 막으면서 서로가 대화 국면으로 접어드는 묘수를 찾는 것. 그것이 ‘지금’ 평양의 고심인 것으로 보인다. MB나 대통령직인수위원회도 같은 고민을 해야 한다. 남북한 관계는 교과서적으로 또는 피상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단언(斷言)할 만큼 간단치 않다.
평양 핵심부의 고심은 점점 더 깊어진다. 뭔가 큰 변화가 오리라고 예상은 한다. MB가 특정한 실사구시의 방안을 던진 것도 아니다. 서울의 새 대통령에게 아직 각론(各論)은 없다. 그냥 큰 테두리만 이야기될 뿐이다. 그런 상태에서 평양의 선택은 4가지로 나뉠 수밖에 없다. 첫째, 그냥 지켜보는 것. 둘째, 마음에 들지 않는 사안에 대해 대응하기 시작하는 것. 셋째, 강하게 반발하는 것. 넷째, 한번 만나서 대화를 해보는 것. 평양은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확정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새 집권 측이 아직 본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뭔가 큰 변화 움직임, 취임 전 찐한 대화 가능할까
평양은 내년 4월 한국에 총선이 있다는 점도 잘 안다. 만약 MB가 정국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총선 승리를 위해 남북한 관계를 실용보수가 아닌 ‘옛 보수’의 틀로 이끌어나가면서 기존의 진전된 남북한 관계를 ‘ 싹 갈아엎겠다’고 표현한다면, 평양의 선택도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평양에선 MB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직전까지의 과도기를 새로운 각도에서 남과 북이 이야기해볼 수 있는 시점으로 여기기도 한다. 물론 기대의 핵심엔 MB라는 새 대통령이 있다. 지금처럼 한 사람의 결정에 많은 무게가 실린 적도 많지 않다. 경제를 우선으로 내건 그의 방향이 평양이 바라보는 남북관계에서 희망적인 측면도 있다.
평양의 오늘은 기대 반 불안 반이다. 평양은 서울을 주시하며 ‘관망’과 ‘결정’이 갈리는 분기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평양과 서울 새 집권 측 간의 ‘찐한 대화’가 있을 것인가. 대화의 성사 여부가 가장 큰 변수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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