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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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전쟁 ‘거미줄 정보망’ 가동

전 세계 산업정보 ‘일거수 일투족’ 수집 분석… 자금 지원 민간연구기관이 중추 역할

  • < 정리·김 당 기자 / 자료제공·국가정보연구회 > dangk@donga.com

    입력2004-12-17 14: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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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전쟁 ‘거미줄 정보망’ 가동
    태평양전쟁기까지 일본의 국가 정보체계는 군(軍) 정보기관과 경찰이 중추적 역할을 맡고 현지의 정보원들을 광범하게 활용하는 인간정보(humint) 네트워크가 주축이었다. 1881년 정예요원 349명으로 출범해 대본영 휘하 육군성 소속기구로 활동을 개시한 헌병대와 참모본부 휘하의 특무부대 그리고 내무성의 특별고등경찰(특고)이라는 민간인 사찰기구 등이다. 특히 친일 정보원을 통한 정탐과 매수를 주요 수단으로 한 일본의 인간정보 네트워크는 만주국 수립 및 중국 침공 전후 헌병대를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확장되었다. 또 만주 주둔 관동군은 특히 현지 정보 수집능력이 탁월해 각종 침략주의적 공작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예를 들어 1928년 만주 펑톈(심양)역(驛)에서의 장작림(張作霖) 폭사사건은 관동군 대좌 카와모토 타이사쿠가 주도했고, 31년 펑톈 교외에서 일어난 유조구(柳條溝) 사건도 관동군 작전참모인 이시하라 중좌를 중심으로 치밀하게 사전에 모의한 사건이었다. 관동군은 유조구에서의 열차 폭파사건을 중국인의 소행이라고 뒤집어씌워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특무기관원들이 주도해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괴뢰 만주국의 황제로 옹립하는 공작을 수행했다. 또 화북 분리공작, 내몽고 자치정부 수립공작, 왕조명 정부와 같은 중국 내 괴뢰정권 수립 공작은 일본 본토의 특무부대와 현지 관동군이나 화북 주둔군의 특무부대가 주도한 것이다.

    이처럼 대륙 침략과정에서 인간정보 수집능력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한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는 암호해독전(cryptological warfare) 능력의 부족 때문에 미국에 완패하는 경험을 하였다. 태평양전쟁중 독일이 제공한 암호화기(enigma machine)의 코드가 연합국측 정보원을 통해 유출되어 일본의 중요한 군사정보 통신망은 미군에 완전히 노출되었다. 이를테면 미드웨이 결전을 앞두고 일본 해군의 암호전문 정보가 유출되어 미 해군은 함대 결전을 충분히 예상하고 준비할 수 있었으며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주력 항모 4척과 항공기 300대를 잃는 타격을 입었다.

    당시 미국의 니미츠 제독은 미드웨이 해전 직전에 일본 해군이 송신하는 특정목표 코드인 ‘AF’가 알류샨인지, 하와이인지 또는 미드웨이인지를 알기 위해 미드웨이 부대장에게 식수 부족 내용을 송신하라고 하였다. 일본 본국에서 미드웨이를 AF라는 암호명으로 지칭하면서 미드웨이에 식수가 부족하다는 정보를 일본 해군으로 송신하는 것을 미군이 중간에 암호를 해독하여 미 해군은 일본의 공격목표가 미드웨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태평양전쟁에서 암호해독전의 실패로 쓴맛을 본 일본은 전후 민간부문의 해외 산업정보 수집능력으로 수출입국에 성공하고 경제대국으로 부활할 수 있었다. 당시 인간정보 네트워크의 핵심역량은 나가노정보학교 출신 요원과 만철(滿鐵) 조사부 요원들. 특히 일본 군부가 정보요원을 양성하기 위해 전쟁 전에 세운 나가노학교 출신들은 전후에 일본 민간기업에 취직해 정부와 민간기업간 해외정보 공유의 핵심적 고리역할을 했다.



    한편 일본 대륙침략의 발판이 된 국책회사인 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의 조사부 또한 전후에 일본의 해외투자 및 무역에 관한 높은 수준의 조사활동을 통해 일본을 부흥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현재 일본의 아시아경제연구소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한 만철 조사부는 만주와 중국 그리고 동남아까지의 국제정세, 현지 경제 및 법 관행 조사뿐만 아니라 역사·문화·지리를 학술적으로 총괄하는 사실상의 종합연구기관. 1907년 중국 다롄에 본사를 두고 도쿄대학 출신 등 총 4500여 명의 우수한 인력을 보유한 만철은 향후 하얼빈·지린·베이징 등에 지사를 두면서 첩보활동에까지 조사 활동을 확장해 결국 관동군 작전참모인 이시하라 칸지를 통해 일본군의 만주 통치를 뒷받침하는 두뇌역할을 했다. 현재 일본의 노무라총합연구소(NRI), 미츠비시총합연구소 같은 민간 대기업의 연구기관이 해외 경제동향 및 정세분석의 중추역할을 하는 것은 과거 만철 조사부가 닦은 역량과 무관하지 않다.

    경제전쟁 ‘거미줄 정보망’ 가동
    패전 후 일본은 국가 정보기관의 역할이 축소되고 군사안보보다는 경제 중심의 대외관계에 무게를 두면서 민간 연구기관과 현지에 파견되어 있는 종합상사의 상사원들이 수집하는 경제 및 산업정보가 통산성 등과 공유되는 채널을 발전시켰다. 이때 나가노정보학교 출신 요원과 만철 조사부 요원들은 민간기업에 취업해 자신들이 갈고 닦아온 해외정보 수집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들은 또한 정부와 민간기업간 정보 공유의 고리 역할을 하면서 해외 상사원들이 사실상 정부의 정보요원 역할을 하는 일본의 독특한 해외정보 수집체계를 형성하는 데 공헌했다. 이를테면 일본의 대기업 간부들은 정기적으로 통산성 등의 관료들과 회동하면서 중요한 해외 산업정보를 공유한다. 또 종합상사 간부들은 족의원(族議員)이나 자민당 파벌영수와 같은 유력 정치인에게 고급 해외정보를 제공하는 비공식 정보 네트워크를 통해 정치적 후견세력과 협력하고 있다. 종합상사들은 전 지구적인 정보 수집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어 미츠이그룹은 런던에서 나이로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185개의 현지 사무소를 운용하면서 산업정보 수집의 첨병 역할을 했다. 놀라운 점은 미츠이의 본국 본부에는 석유화학·통신·항공 등 모든 사업분야를 망라하여 관련된 방대한 해외정보를 관리하는 중앙컴퓨터시스템이 1957년부터 운용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고도로 발전된 해외 경제정보 수집·분석·공유체계가 전후 일본의 급속한 부흥과 경제대국의 성공에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고 평가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전후 일본의 정보기관은 국가 정보기관 성격을 띠는 내각정보조사실과 군사정보기관으로 통합막료회의 직속기관인 정보본부 그리고 국내 치안 유지를 위해 설치한 공안조사청으로 대별된다. 내각조사실은 1952년 8월 총리부 설치령으로 내각 관방장관 산하에 창설되었고, 57년 국가 정보 수집의 중심기관으로 재발족되어 미국 CIA의 요구를 반영해 공산권 동태 정보 수집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76년 12월 현재의 내각정보조사실로 명칭을 바꾸고 기능이 확대되었다. 공안조사청 또한 52년 한국전쟁중 일본 내 좌익단체의 활동을 통제하기 위한 파괴활동방지법 및 공안조사청법에 근거해 법무성 외청으로 설치되어 2000여 명의 요원으로 대내 정보활동을 시작했다. 그후 공안조사청은 탈냉전 후 96년 조직 개편으로 구공산권 정보 및 국내 이념세력에 대한 정보수집 대신 주로 해외정보 수집과 국내 광신도 종교집단 감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일본 국가정보체계의 중심기구인 내각정보조사실(약칭 내조실)은 2001년 정부 조직 개편으로 실장을 내각정보관으로 하고 내각조사관이라는 명칭은 내각참사관으로 바꾸었으나 내부 조직은 이전과 같이 7개 부, 1개 센터로 구성되어 있다. 내조실이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임무는 총리대신의 중요 정책 수행을 위한 정보의 수집·분석·제공·전파와 관련해 각 성(省)·청(廳)과의 연락·조정 업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각 부서의 임무를 보면 총무부는 외곽단체인 정세연구회를 관리하고 인사·후생·교육훈련과 주요 정보 분석 및 연락·조정의 기능을 수행한다. 국내1·2부는 각각 국내정보와 국내 언론을 담당하면서 국민출판협회 등 외곽단체를 운용한다. 국내1부는 내각의 중요정책 수립을 위한 국내정보 수집 및 분석을 담당한다. 특히 국내2부는 내각의 주요 정책에 대한 국민 여론의 동향 조사와 신문·방송·잡지의 논조를 분석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이에 반해 국제1부는 내각의 해외정보 수집·분석의 창구로서 동남아조사회·세계경제조사회 등 외곽단체를 운용하는 해외정보 담당 부서다. 국제2부는 해외 매스컴의 논조를 분석하고 내외정세조사회와 통신사 등의 협력을 받는 해외언론 담당 부서다. 경제부는 국내외 경제 관련 연구·조사를 담당하고 자료부는 민주주의연구회를 통해 정보자료·존안관리와 전산화한 정보 및 마이크로 필름을 관리한다. 이밖에 96년 4월에 신설한 내각정보집약센터에는 국토청·경찰청·방위청·외무성 요원 150여 명이 편성되어 있다.

    이처럼 내조실은 풍부한 자금을 무기로 주로 외곽 민간 연구기관을 활용해 정보수집 및 분석·평가를 시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위해 내조실은 약 25개에 달하는 외곽단체의 인건비·사업비 등 예산을 부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기할 것은 일본방송협회·세계정경조사회·국제문제연구회 등 다수의 외곽단체마다 적지 않은 수의 지원요원을 운용하면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공개된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분석한다는 점이다. 내조실과 직간접으로 연결된 것으로 추정되는 단체들 중에는 내조실과 깊이 관련된 단체도 있고, 내조실 출신 인물이 아마쿠다리(낙하산 인사)로 임명되면서 인맥을 통해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외곽단체인 세계정경조사회의 이사장은 내조실·경찰청·공안조사청 근무 경험자를 임용하고 회장은 명예직이며 이사장이 주로 운영을 관장한다.

    경제전쟁 ‘거미줄 정보망’ 가동
    내각정보조사실의 중앙 조정·통제 기능이 강화되면서 각 성·청의 해외업무를 담당하는 정보수집 부서가 분석한 정보도 내조실이 종합·관리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외무성과 경제산업성(통산성)에서 취합하는 것들이다. 외무성의 정보 부서인 국제정보국의 국제정보과·분석1과·분석2과는 각각 국제정세에 대한 정보 수집·분석 및 관리 기능을 수행한다. 일종의 ‘허가받은 스파이’인 대사관 정무과 소속 외교관이나 영사들은 주재국 정세에 대한 정보 수집업무를 주로 담당한다. 특기할 것은 일본은 대사관과 현지 특파원들이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였는데 한국 내에서도 주한 일본 대사가 언론사 특파원들과 주례 회동을 하면서 고급 정세정보를 교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취재 명분으로 자유롭게 정보를 수집하는 일본 언론의 특파원들은 시노하라 기자가 한국에서 군사정보를 취재하다 94년 간첩혐의로 구속사태까지 빚을 정도로 적극적이다.

    결국 내조실은 일본 국가정보체계의 중심기관이라 볼 수 있고 그 조직과 다른 성·청과의 관계는 ‘표’와 같다. 도쿄 치요다구의 나가타초에 있는 내각부의 대신관방은 내조실을 비롯하여 내각총무관실·내각관방부장관보·내각광보실로 이뤄져 있고 내각심의관 7명과 내각참사관 39명은 특별히 태스크포스팀으로 편성되어 현안 정책과제가 있을 경우 총무관실·광보실·내조실에 탄력적으로 투입해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전후 일본 정보기구의 특징은 45년 이전의 군 정보기관 중심의 국가 정보체계는 해체하고, 미국의 CIA와 같은 통합된 국가 정보기관은 설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최근 일본은 내각조사실, 공안조사청, 정보본부, 외무성 국제정보국 등 정보기구에 대한 조정·통제 기능 강화를 위해 행정개혁의 일환으로 내각 관방장관실 밑에 내조실(내각정보관이 지휘)의 설치를 추진했다(일본 정부는 행정개혁의 일환으로 2001년 1월6일부터 지금까지의 1부 22성·청 체제를 1부 12성·청으로 축소하면서 총리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도록 했다. 즉 총리부·경제기획청·오키나와개발청을 내각부로 통합하고 방위청과 국가공안위원회를 내각부의 직할기관으로 하면서 내각 관방의 지원을 받는 총리의 역할을 강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각부 관방장관 예하의 내각정보관에 의한 국가정보의 중앙조정·통제 기능이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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