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의 봄은 자리에서 온다. 유채꽃이 피면 자리가 벌써 식탁에 오른다. 제주에서는 자리돔 잡는 것을 ‘자리 뜬다’고 한다. 유채꽃이 노랗게 땅을 흔들 때다. 이때 잡히는 자리돔은 살이 넉넉하면서도 뼈가 보드랍다. 그래서 물회감으로 가장 좋다. 5∼6cm급이 알맞은데 몸체가 큰 놈은 대가리를 떼어내고, 작은 놈은 그대로 비늘만 치고 뼈째 잘게 썰어 물회로 만든다. 시원한 통물에 날된장을 풀고 자리를 숭숭 썰어 띄운 다음 미나리·부추 등 채소란 채소는 다 썰어 넣는다. 이는 모두가 가족 협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밥을 말아 거의 한 옹배기씩이나 먹는다. 이것이 곧 여름 무더위와 흉년을 넘기게 한 구황(救荒)식품이었음은 두말할 여지없다. 옥돔은 바다 밑창 깊숙이 들어앉아 혈거생활(穴居生活)을 하므로 구하기가 힘들지만 자리는 떼를 지어 연안 가까이 몰려다녀 잡기가 쉬운 까닭이다.

남제주군 대정읍 추사관(秋史官)을 지나 모슬포의 부두 쪽에 자리 물회를 잘하는 항구식당(대표 조명민, 064-794-2254)이 있다. 물회뿐만 아니라 자리젓과 구이로도 유명한 집이다. 유채꽃이 피기 전에 벌써 추사관 안마당이나 대정읍성을 둘러 제주 수선화가 초봄을 부르는 향기를 뱉는다.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벽에 붙여 놓고 노오란 또는 하얀 제주 수선화가 피는 것에서 한세월 귀양살이 수심을 달랜 추사관의 추사 유묵(遺墨)을 만나보는 것도 관광 코스의 중요한 여정이다. 이때는 꼭 모슬포항에 들러 자리돔 구이 백반이나 자리 물회를 들고 갈 일이다. 한창 귤이 익는 내음과 자리젓내가 섞여드는 모슬포항에서 ‘가파도 그만 말아도 그만인 마라도’를 건너다 봄도 좋다.

돔자 항렬 중에서도 작고 못생긴 것이 자리돔이고, 남도인 식탁에서 물에 만 밥의 밑반찬인 조기(굴비)에 비하면 턱도 없지만 제주인에겐 조기보다 품계가 높은 게 자리돔 아니겠는가. 아직도 값이 싸고 연중무휴로 고정식탁을 지켜 향토색깔로 맛과 멋을 건사해 주니 말이다. 적어도 제주관광이라면 값비싼 바리(다금바리)는 먹을 수 없어도 자리 물회, 옥돔 구이, 오분작 뚝배기, 도새기회 정도는 들어야 체면이 서지 않겠는가. 고맙다, 자리야. 또 제주 여름은 한치와 물오징어철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