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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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들 플레이 여전히 멋있네

1990년대 오빠부대 프로농구 각팀 간판 맹활약 … 절정의 기량 3~5년간 화려한 플레이 쭈~욱

  • 이동훈/ 굿데이신문 종합스포츠부 기자 blue@hot.co.kr

    입력2004-02-19 17: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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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들 플레이 여전히 멋있네

    상무시절 한기범을 앞에 두고 레이업 슛을 하고 있는 이상민(왼쪽 사진 왼쪽). 문경은,우지원, 김영만(오른쪽부터)이 뛰었던 90년대 초·중반이 대학농구 ‘황금시대’로 불린다.

    한국 프로농구는 1990년대 초ㆍ중반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던 대학농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97년 출범한 프로농구는 고려대 연세대 중앙대 등 농구 명문대 출신 선수들을 주축으로 팀을 구성했으며 지금도 그 선수들이 각 팀의 간판 노릇을 하고 있다.

    물론 90년대 대학농구의 인기는 80년대 초 겨울 스포츠의 꽃으로 탄생한 농구대잔치에서 출발한다. 당시 ‘슛도사’ 이충희가 이끌던 현대와 지금은 고인이 된 ‘전자슈터’ 김현준으로 대표되던 삼성이 양대 산맥을 구축했고, ‘농구천재’ 허재(원주 TG삼보)가 뛴 중앙대가 그 아성에 도전하면서 농구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러나 실업팀 기아가 창단되면서 한기범-김유택-강정수-허재-강동희 등 중앙대 출신 스타플레이어를 모조리 영입하고 여기에 연세대 출신인 유재학 정덕화마저 창단멤버로 확보, 기아의 독주시대가 시작됐다. 기존 선수들의 노쇠와 은퇴, 대형 신인 선수의 영입에 실패한 현대 삼성은 도저히 기아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농구대잔치→대학농구→프로농구

    한마디로 당시 기아를 막을 팀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술 없이 선수들의 개인 기량만 가지고도 상대팀을 제압하기에 충분한 전력을 갖춘 기아는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성처럼 보였다.



    하지만 중ㆍ고등학교에서 꿈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이들은 기아의 독주를 막아낼 ‘미래의 전사’들이었다. 대학 명장 최희암 감독이 이끄는 연세대와 멋쟁이 노총각 박한 감독이 지휘하는 고려대는 격렬한 스카우트 전쟁에 들어갔다.

    탄력 좋은 파워포워드 정재근(KCC)을 보유하고 있던 연세대는 90년 광신상고의 걸출한 장신 3점슈터 문경은(전자랜드)을 스카우트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1급 슈터들의 키가 180cm대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190cm인 문경은은 당연히 주목받았던 것.

    연세대는 알짜배기 선수들을 계속해서 영입했다. 91년엔 홍익사대부고의 포인트가드 이상민(KCC), 92년에는 우지원(모비스), 김훈(전자랜드) 등을 신입생으로 받아들였다. 연세대는 93년 휘문고의 서장훈(삼성)을 데려오면서 최고의 절정기를 맞았다.

    연세대는 프로농구 출범 이전인 93~94농구대잔치에서 실업 강호들을 줄줄이 연파하고 대학팀으로서는 처음으로 챔피언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 신입생이던 서장훈은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되기도 했다.

    당시 연세대의 우승은 그들의 ‘삭발 투혼’으로 더욱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농구대잔치 직전에 열린 제30회 전국대학농구연맹전에서 연세대는 고려대 등에 패해 3위에 그쳤다.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서장훈이 주전 멤버였던 연세대의 전력으로 3위는 충격이었다. 최희암 감독이 먼저 단발을 했고 선수들도 자진해서 줄줄이 스포츠형으로 머리를 깎고 농구대잔치에 돌입, 감격적인 우승컵을 안았다.

    당시 연세대는 ‘오빠부대’의 폭발적인 인기를 등에 업었다. 특히 실력은 물론 ‘수려한 외모’를 겸비한 이상민, 우지원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당시 이상민이 받은 하루 평균 팬레터가 1000여 통에 달했을 정도. 농구경기의 메카였던 장충체육관은 유명 가수의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열성 응원으로 가득했다.

    연세대보다 한발 늦긴 했지만 고려대도 특급 고교 선수들을 영입했다. 92년 용산고의 김병철(오리온스), 경복고의 전희철(SK)을 데려왔고 이듬해 195cm의 장신 슈터 양희승(SBS)을 스카우트했다. 고려대는 94년 휘문고를 졸업한 파워포워드 현주엽(KTF)과 송도고의 포인트가드 신기성(TG삼보)을 품에 안으며 절정기에 올라섰다.

    오빠들 플레이 여전히 멋있네

    전희철, 서장훈, 현주엽(왼쪽부터).

    고려대의 인기는 연세대와 달리 ‘형님부대’에서 나왔다. 고려대는 전희철 현주엽 등이 파워 덩크슛을 자유자재로 구사했기 때문에 여성팬보다 남성팬이 더 많았다.

    중앙대도 김영만(LG)을 중심으로 김승기 홍사붕 양경민 등 빠르고 슛이 좋은 선수들을 앞세워 실업팀들의 경계 대상이 됐다. 중앙대는 93~94농구대잔치 6강전에서 거함 기아를 격침하기도 했다. 조성원(KCC), 조성훈(전자랜드), 정재헌(SK), 박재일(오리온스)이 속해 있던 명지대도 항상 ‘다크호스’에 속했다.

    이들은 프로농구에서도 성공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매 시즌마다 우승의 주역은 항상 이들의 차지였다. 현대(현 KCC)로 간 이상민은 한국형 용병 조니 맥도웰과 함께 세 시즌 연속 정규리그 우승을 일궈냈다. 특히 이상민은 결혼한 이후에도 팬 투표로 뽑는 올스타 베스트5에서 3년 연속 1위에 올라 변함없는 인기를 자랑하기도 한다. 서장훈도 SK 시절인 99~2000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이상민이 이끄는 현대를 물리치고 팀을 챔피언에 올려놓았다.

    2000~2001시즌 삼성에서 뛰던 문경은은 폭발적인 3점포를 앞세워 팀을 통합챔피언에 등극시켰다. 김병철과 전희철은 2001~2002시즌에 동양(현 오리온스)에게 통합 우승컵을, 양경민은 2002~2003시즌 TG삼보에게 챔피언컵을 각각 안겼다.

    이미 30줄에 접어들어 체력은 예전만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노련미가 더해지고 자기 관리에 충실한 이들은 적어도 3~5년 정도는 전성기 기량 못지않은 경기력을 보여줄 듯하다.

    우승 맛을 아직 보지 못한 선수들도 있다. 우지원은 외모로 한몫 보는 선수라는 비판이 뒤따랐지만 최근 이를 악물고 열심히 훈련에 임해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 아쉬운 이는 현주엽이다.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신음한 현주엽은 대학 때의 실력과 명성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동료 선수들과 종종 불협화음을 내는 것도 현주엽의 발목을 잡는다. 지난해 상무에서 제대, 다시 프로 무대에 뛰어든 현주엽이 언제쯤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법. 그늘진 곳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다 사라져간 선수들도 있다. 지난해 경기장을 떠난 박승일 코치가 가장 안타까운 경우. 문경은과 동기생인 박코치는 온몸의 근육이 점점 위축되는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다. 지난해 은퇴한 SK의 석주일도 못다 핀 꽃 중의 하나다. 고등학교 때 서장훈이 “주일이형만큼 농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주목받았지만 정작 프로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구단 프런트로 변모한 선수도 있다. 이상민의 연세대 동기생인 전자랜드 김성헌 운영팀장이 대표적이다. 김팀장은 연세대를 졸업하고 대우 제우스(현 전자랜드)에 영입됐으나 1년 만에 선수 생활을 접고 프런트로 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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