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67

..

시인 꿈꿨던 아버지가 제 글의 원천입니다

에세이노벨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무크의 思父曲

  • 번역·정리=전원경 작가 winniekj@empal.com

    입력2007-01-02 18:4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터키의 작가 오르한 파무크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파무크는 2006년 12월 스웨덴 한림원에서 수상 기념 강연을 하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슈트케이스(여행가방)에 대해 이야기했다. 작가의 아버지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한때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시인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시인이 되는 대신 노벨상을 받은 아들을 키웠다. 아버지의 슈트케이스에는 아버지가 한때 작가의 꿈을 안고 썼던 글들이 가득했다. 그 글들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파무크는 아버지의 글 속에서 작가의 길을 가기 위해 분투했던 자신의 지난날을, 그리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자신에게 보여준 사랑과 신뢰를 새삼 발견했다. 39분에 이르는 파무크의 연설 중 아버지에 관한 부분을 발췌해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파무크의 애틋한 사부곡(思父曲)은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새해를 맞아 아버지의 옛 물건을 보듬으며 단상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시인 꿈꿨던 아버지가 제 글의 원천입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2년 전 저에게 슈트케이스 하나를 건네셨습니다. 당신이 쓰신 여러 원고와 노트들이 들어 있는 가방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주 심상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중에 죽고 없거든 그 가방을 열어서 한번 읽어보아라. 그리고 좀 괜찮아 보이는 원고가 있으면 음, 그때는 출판을 해도 좋을 것 같고….”

    이 이야기를 들을 때의 풍경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한동안 서재 구석을 둘러보시더니 가장 구석진 곳,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가방을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매일매일을 이루는 사소한 일들이 물결처럼 흘러갔습니다. 터키의 정치 혼란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아버지의 사업은 아무래도 실패한 듯 보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며칠 동안이나 서재의 한구석, 가방 주위를 서성였습니다. 사실 이 슈트케이스는 제게 낯익은 물건입니다. 아버지는 출장 가실 때마다 이 검은 가죽 가방을 들고 다니셨습니다. 아버지가 출장에서 돌아와 슈트케이스를 열면, 아버지의 물건과 기념품들이 섞여 묘한 이국의 냄새가 풍겨오곤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친숙한 물건이었던 슈트케이스에 새삼 손조차 대지 못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슈트케이스에 들어 있는 물건, 아버지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글을 쓰게 될 때의 심정을 저는 잘 압니다. 작은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탁자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머릿속에 든 생각을 천천히 글로 풀어내는 것, 그 고통과 인내의 산물이 바로 문학이니까요.

    몇 번인가 아버지가 글을 쓰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40년대 후반에 발레리의 시를 터키어로 번역하셨고, 한때는 시인이 되겠다는 꿈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에서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쓴다는 것은 일생을 빈곤하게 살겠다는 각오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문학을 위해 안락한 삶을 내던질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글이 30년간 작가로 살아온 제 눈에 찰까요?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이라면 저는 아버지에게 실망하거나 화를 내게 될지도 모릅니다. 내 아버지는 그저 그런 시인에 불과했었구나 하고 자각하는 것. 그것은 결코 유쾌한 일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아버지가 아주 괜찮은 작가였음을 발견한다면? 솔직히 그 역시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슈트케이스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문학은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담습니다. 그렇다면 슈트케이스에 들어 있는 것은 아버지의 글인 동시에 아버지의 삶일 것입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아버지는 지금까지 제가 알고 있던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작가는 한 인간의 내면에 있는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고통스런 탐색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펜으로 쓰든 컴퓨터로 작업하든 고통의 강도는 똑같습니다. 가끔 그는 책상 앞을 떠나 창가를 서성거리며 바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쳐다보기도 하겠지만, 결국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한 단어 한 단어를 힘겹게 써 내려갈 것입니다.

    아버지가 남긴 슈트케이스 놓고 많은 고민

    작가로 하여금 작품을 쓰게 하는 원동력은 끈기와 인내심입니다. 터키 속담 중에 ‘바늘로 벽을 판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 소설인 ‘내 이름은 빨강’에는 평생 동안 똑같은 모양의 말을 계속 그리는 페르시아 노인이 등장합니다. 나중에 그는 눈을 감고도 똑같은 말을 그리는 경지에 이릅니다. 이것이 작가의 인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과연 아버지에게도 그런 고통의 시간이 있었을까요? 그는 항상 친구, 가족, 회사 등 번잡한 일에 둘러싸여 살았던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나요.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난 후, 제 생각은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글이 고독과 인내의 산물이라는 생각 자체가 편견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작가 중에는 바쁜 삶 속에서 글을 쓰는 사람도 많으니까 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홀연히 파리로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 후 아버지는 노트들이 가득 찬 문제의 슈트케이스를 들고 파리에서 돌아오셨습니다. 많은 다른 작가들처럼 아버지는 파리의 변두리 호텔에 머물며 글을 썼을 것입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 아버지는 가끔 자신의 지난날에 대해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작가가 되고 싶었던 꿈에 대해서는 끝내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파리의 거리에서 사르트르와 마주쳤던 일, 그리고 감명 깊게 보았던 책과 영화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의 서재는 여느 작가의 방 못지않게 근사했습니다. 서재에 있는 1500권 정도의 책 대부분은 아버지가 프랑스와 미국에서 사오신 것이었습니다. 이스탄불의 헌책방에서 구한 책도 많았습니다. 어린 시절, 이 서재에서 접한 고전들은 제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교재였습니다.

    아버지의 서재에 앉아 가보지 않은 나라와 이국의 집을 상상하던 날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어린 저에게 아버지의 서재는 동양과 서양, 옛날과 오늘이 혼재한 세계였습니다. 어릴 때는 화가가 되는 것이 저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서재에서 책을 읽던 어느 날, 불현듯 저는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뭐가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화가가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그때부터 저는 더 많은 책을 읽겠다는 무서운 의욕에 넘쳐 가진 돈 전부를 책에 쏟아 부었습니다.

    저 역시 아버지처럼 이스탄불의 헌책방을 좋아했습니다. 책에 빠져들면서 저는 점점 ‘내가 세상의 중심에서 살지는 못하겠구나’라는 사실을 자각했습니다. 세상의 중심에는 부자와 권력자들이 있을 것이고 저는 결코 부자도 권력자도 될 수 없었습니다. 문학의 중심? 그 역시 먼 세계였습니다. 문학에서도 터키어는 아웃사이더에 불과했습니다. 터키어 같은 것은 아버지의 서재나 헌책방에만 넘칠 뿐이었습니다. 터키 문학이 서양의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은 저에게 고통인 동시에 희망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왜 프랑스 소설을 탐독했는지, 그리고 왜 가족을 버리고 파리로 날아갔는지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는 또 다른 세계로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버지는 문학을 인생의 목표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걸까요? 왜 그는 자신의 삶에 정면으로 맞닥뜨리지 못했던 것일까요? 친구와 가족, 시끌벅적한 삶을 떠날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질투와 분노 속에서 결국 아버지의 슈트케이스를 열었습니다. 가방을 열자 맨 먼저 어릴 때 맡았던 이국의 냄새가 훅 끼쳐왔습니다. 아버지의 낡은 노트들, 그가 젊은 시절 파리에서 썼던 노트에서 나는 냄새였습니다. 예상대로 아버지의 시나 평론들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고 그나마 외국 작가들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글을 읽다 문득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내가 젊었을 때 썼던 글들이 아닌가? 글을 쓰기 시작한 첫 10년 동안 저는 별볼일 없는 글을 쓰고 있다는 두려움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습니다. 이 두려움과 싸우고, 패배하고, 글을 포기하고, 다시 썼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불분명한 것들이 확실해지고 저는 점점 더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갔습니다. 제 안에 숨겨진 상처들을 발견하고 그 상처들을 글로써 치유해갔습니다. 이처럼 작가는 모든 사람들이 일견 아는 듯하지만 실은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글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의 이스탄불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글에 남겨진 투쟁의 흔적, 중심도 변두리도 아닌 곳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인생은 행복했나요? 최소한 글을 쓰는 동안 그는 행복했을 것입니다. 파리의 작은 호텔 방 안에서 웅크린 채 글을 쓰는 젊은 아버지, 세계와 자신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갔습니다.

    아버지는 제 서재에 슈트케이스를 놓고 가신 지 일주일 후에 다시 오셨습니다. 아들이 벌써 마흔여덟이란 사실을 잊었는지, 초콜릿을 사들고서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주변의 잡다한 이야기, 정치와 친척들, TV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 아버지가 서재 한구석에 놓인 자신의 슈트케이스를 바라보셨습니다. 사실 저는 그 슈트케이스를 아버지가 내려놓은 곳이 아닌 다른 구석으로 옮겨두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저를 쳐다보셨습니다. 저는 아직 슈트케이스를 열지 않았고 그 안의 글들도 읽지 않았다고 애써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평소처럼 사랑이 가득 담긴 작별인사를 남기고 서재를 떠나셨습니다.

    “나의 재능 믿어준 아버지 절대적 힘”

    스물둘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어머니는 펄쩍 뛰셨지만 아버지는 반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제 첫 소설을 읽으신 후, 아버지는 초조해하는 저를 꼭 껴안아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언젠가 네가 큰 상을 탈 날이 올 거야. 그때 내가 객석에 앉아서 상 받는 널 축하해주마.”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에 대한 확신을 갖고 계셨던 걸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만 아버지는 터키의 전형적인 아버지들처럼 자식을 격려하고 싶으셨던 겁니다. “얘야, 넌 언젠가 큰 벼슬을 할 거야!” 터키의 아버지들은 아들에게 늘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는 2002년 12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4년 전입니다. 저는 오늘 스웨덴 아카데미와 수많은 훌륭한 분들 앞에서 큰 상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영광을 누리고 있는 이 순간, 저 관객들 사이에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하는 바람이 이토록 간절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