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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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국회 … 입법 경쟁 불붙었다

7월23일 현재 171건 법률안 개정 발의 … 당 의견보다는 개인 소신의 산물 많아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4-07-29 17: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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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하는 국회 … 입법 경쟁 불붙었다

    국회 직원들이 발의된 법안을 정리하고 있다

    ‘뭔가 보여줘야 하는데….’국회가 상임위원장 배분을 둘러싼 샅바싸움으로 무위도식(無爲徒食)하던 6월 중순,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 전병헌 의원은 ‘정책과 관련된 일을 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시달렸다. 고심 끝에 내놓은 아이디어가 실속 있고 모양새도 좋은 정책토론회. 전의원은 내친김에 한나라당 유승민 의원과 민주노동당(이하 민노당) 노회찬 의원에게 ‘공정거래법 개정’을 주제로 한 ‘상설토론회’를 제안했다.

    전병헌 유승민 노회찬 의원은 7월14일 국회에서 첫 공동토론회를 열었다. 전의원의 예상대로 주변의 반응은 좋았다. 토론회에는 전경련과 참여연대의 전문가들이 나와 △출자총액제한 제도 △계열 금융·보험사의 의결권 행사 등의 주제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전의원은 한나라당의 ‘장자방’인 유의원, 민노당의 간판인 노의원과 함께 토론회를 열고 나서야 조바심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법률 검토 요청 밀물 법제실 비명

    여야를 넘나든 의원들 간의 정책토론회는 과거엔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3인 정책토론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해 입법까지 하겠다”(전병헌 의원)는 이들 의원의 계획은 입법 활동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신선한 움직임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그동안 국회의 입법 활동은 법률안에 대한 충분한 토론이나 다양한 검토 없이 진행된다는 지적을 받았다. ‘통법부’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으면서 헌법에 명시된 국회의 고유 권능인 입법 활동이 부실하게 이뤄진 것.



    의원들의 활발한 입법 활동은 17대 국회와 이전 국회를 가름하는 특징 중 하나다. 특히 비약적인 법률안 발의 수 증가가 눈에 띈다. ‘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의원들, 그 가운데서도 의정 활동 초년병들의 조바심과 의욕이 입법 러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개원 이후 발의된 법률 개정안은 모두 171건(7월23일 현재). 국회 사무처 관계자는 “법제실에 검토 요청이 들어온 법률안이 16대 국회 같은 기간에 비해 300% 정도 늘었다”며 혀를 내두른다. 법제실 직원들은 밀려 들어오는 법률 검토 요청으로 야근을 밥먹듯 하고 있다.

    16대 국회와 비교해보면 입법에 대한 17대 의원들의 열의를 짐작해볼 수 있다. 16대 국회에서 입법 발의 1, 2위를 차지한 조웅규 김홍신 전 의원이 4년 임기 동안 발의한 법안 수는 각각 48, 42건. 이들 의원은 16대에선 ‘모범생’이었지만 17대에선 명함을 내밀기조차 힘들다. 우리당 정성호 의원은 개원 50일 만에 10건을 발의했고, 조만간 10건을 더 발의할 예정이다. 한나라당 안명옥 정병국 의원은 각각 6건, 5건을 발의해 1위인 정성호 의원을 바짝 뒤쫓고 있다. 한나라당 김석준(4건) 민노당 단병호(4건) 우리당 노웅래(3건) 의원도 법안 준비에 열심이다. 입법 발의를 활발하게 하는 의원들은 대부분 초선. 한 재선의원은 “젊은 의원들의 의욕뿐만 아니라 지구당 폐지로 원내 정당화가 이뤄지면서 의정 활동이 원내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것도 법안 발의가 늘고 있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보좌진은 의원들 성화에 시달려

    초선의원들을 중심으로 법안 발의가 러시를 이루다보니 의원들 간의 경쟁도 벌어진다. 비일비재한 것은 ‘속도전’. 불량만두 사건이 터졌을 때의 일이다. 초선 C의원은 청소년성범죄자의 경우처럼 식품사범의 명단을 공개하는 법안을 발빠르게 준비했다. 그런데 복병을 만났다. K의원이 16대 국회에 상정됐다 폐기된 법안을 찾아내 C의원보다 한 발 먼저 발의한 것. K의원이 관련법 개정안 제출로 언론에 주목을 받자 C의원 측은 속된 말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됐다.

    기존 법안의 ‘허점 찾기’도 이뤄진다. 또 다른 K의원의 보좌관은 ‘개정안 거리’를 찾으려 병역법을 꼼꼼히 읽다 ‘빈틈’을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다.

    그는 선거철 단골 공약인 군 복무 기간 단축이 법 조항과 아무런 관련 없는 ‘행정 사항’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병역법에 따르면 군 복무 기간은 원래 2년으로 명시돼 있고 국방부 장관이 필요한 경우 1년 이내의 기간에서 늘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K의원은 조만간 국방부 장관이 재량으로 복무 기간을 늘릴 수 있는 기간을 6개월가량으로 줄이는 병역법 개정안을 발의할 계획이다.

    일하는 국회 … 입법 경쟁 불붙었다

    7월14일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국회의원 3인(전병헌 유승민 노회찬 의원) 공동토론회.

    다른 의원들의 활발한 입법 활동에 자극받은 의원의 성화에 시달리는 것은 보좌진이다. L의원은 동료 의원들이 서명해달라며(10명 이상의 의원이 서명해야 발의할 수 있다) 법안을 돌릴 때마다 보좌진을 달달 볶는다. “다른 의원 보좌진은 모두 열심히 일하는데 당신들은 뭐 하고 있느냐”고 질타하는 것. 의원의 닦달에 시달린 L의원 보좌진들은 요즘 고치거나 새로 만들 법안을 찾느라 법률 공부에 여념이 없다.

    법안 발의 수 1위인 정성호 의원실은 ‘법률 공장’을 방불케 한다. 보좌진을 모두 법률 공부를 한 사람들로 뽑았을 정도. “의정 활동에서만큼은 최고가 되겠다”는 게 정의원의 각오다. 정의원은 “국가보안법이니 정치개혁이니 하는 거창한 법안이 아니라 작아 보이지만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법안들을 만들고 싶다”면서 “실생활에 직결된 사안 위주로 임기 말까지 왕성하게 입법 활동을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국회에서는 정의원처럼 활발하게 입법 발의를 하는 의원이 없었다. 그나마 16대는 조금 나았던 편. 16대 국회 이전까지는 의원들의 입법 발의가 매우 저조했다. 독재정권 시절 ‘통법부’ 노릇에 만족해야 했던 국회는 13대 때 국정감사가 부활되면서 감시 기능을 되찾아오지만, 입법 분야에선 통법부 시절의 관성이 한동안 의원들을 묶어뒀다.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은 개인 소신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장애인인 장향숙 의원이 장애인 관련 법률 개정안을 제출하고, 의사 출신인 안명옥 의원이 복지 분야 법안을 낸 게 대표적인 경우. 우리당 김원웅 의원 역시 관심사인 6·25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 진상규명법을 발의했다.

    17대 임기 말까지 이어질 수 있나

    한나라당 이계진 의원은 최근 “당의 의견과 다르다”는 주위의 조언에도 국회의장 부의장 선거 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안건 표결에 실명투표제를 도입하는 개혁 법안을 발의했다.

    “박창달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 당시 내가 어떤 표를 던졌는지 유권자들이 알았으면 좋겠다.”(이계진 의원)

    이의원이 발의한 국회법 개정안은 우리당 소속 의원 전원의 서명으로 발의된 체포동의안 및 석방결의안의 실명투표안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것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 법안 통과 여부에 대한 투표는 물론이고 체포동의안 석방결의안 탄핵소추안 FTA비준 등에서 실명투표가 의무화된다. 그러나 한나라당에서 벌써부터 반대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등 원안 그대로 통과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법안의 색깔이 가장 또렷한 곳은 민노당이다. 단병호 의원은 개원 전부터 준비해온 노동 관계법 개정안 4건을 발의했다. ‘노동자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해 국회에 파견된 영원한 위원장’이라는 단의원의 소신이 담겨 있는 법안들. 심상정 권영길 조승수 의원은 각각 대부업법 개정안(고금리 제한) 상가임대차보호법개정안 주택임대차보호법개정안을 발의해 자신들이 서민과 노동자를 대표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입법은 의원의 권한이자 의무다. 영국 의회가 오늘날과 같은 권능을 얻은 것은 17세기 초 꽃 피운 ‘입법을 통한 지위 획득’ 덕이다.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일을 제외하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영국 의회의 격언은 의원들의 권능과 자부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 국회에선 ‘정치’가 주식이었고, ‘입법’은 양념에 지나지 않았다.

    초선들의 입법 러시에서 미뤄볼 수 있듯 한국 의회에서도 조금씩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정쟁의 중심이 수도이전특별법,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 친일진상규명특별법, 사형제도 폐지 등으로 옮아가고 있는 것은 국회의 풍경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변화의 움직임이 17대 임기 말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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