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노동절 집회에서 외국인근로자들이 불법체류자 단속 및 추방에 항의하고 있다.
단속 피하기에 목숨을 건 도망자
목숨을 건 필사의 도망. 일일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아 실상을 모를 뿐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지금도 전국 어디에선가 쫓고 쫓기는 이들의 숨 막히는 질주는 계속되고 있다. 그렇게 쫓기다 붙잡힌 사람이 지난해만 3900여 명.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거주 불법체류자는 16만7780여 명이고 국적별로는 중국, 베트남, 태국, 필리핀, 몽골 순으로 많았다. 민길수 고용노동부 외국인인력정책과장(현 고용정책실 사회적기업과장)이 지난해 8월 외국인고용·노동운동협의회 주최 ‘고용허가제 7년 이주노동자 실태조사 보고 및 토론회’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불법체류자 중 고용허가제 만료기한을 넘긴 불법체류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10%에 달했다. 고용허가제로 국내에 들어와서 일하다 체류기한이 만료된 근로자는 2010년 5243명에서 지난해 3만3944명으로 6배 이상 급증했다. 올해는 그 수가 6만7118명에 달한다.
고용허가제는 ‘외국인근로자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일명 고용허가제법)이 만들어지면서 2004년 8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는 외국인 산업연수생제도 시행 과정에서 송출비리가 끊이지 않았고, 국내 사업장에 고용돼 일하면서도 근로자 신분이 아닌 ‘연수생’이라 국내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못한 이들이 저임금과 임금체불 같은 부당한 대우, 인권침해를 받는 폐해를 시정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고용허가제 비자가 만료된 외국인근로자가 쏟아지면서 정부는 자진 출국을 유도하려고 귀국지원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등 안간힘을 쓰고 있다. 또한 사업장 변경 없이 4년 10개월(3년+1년 10개월 비자 연장)간 한 사업장에서 성실히 일한 외국인근로자에 한해 한국어능력시험을 면제해주고, 출국 3개월(과거엔 6개월) 경과 후 다시 입국 가능하도록 올해 2월 법을 개정했다. 개정한 법은 세부 시행규칙 마련과 함께 오는 7월 1일부터 시행한다.
하지만 새로운 법 시행을 앞두고 외국인 이주노동자 관련 비정부기구(NGO)들은 ‘4년 10개월간 한 사업장에서 성실히 일한’이라는 단서조항은 독소조항 또는 노예조항이라고 비판한다.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근무하는 사업장에서 임금체불과 폭행 등 인권침해 사례가 사라지지 않는 상황에서 “자칫 강제노동을 강요하는 미끼가 될 수 있다”는 것. 고용허가제에 의한 불법체류자 외에 지난해 법무부 출입국사무소 이민특수조사대가 적발한 사례를 보면, 불법체류자 유형은 만물상을 방불케 한다.
네팔 여성 T씨(24) 등 5명은 국제행사에 참석하려고 국내에 들어온 뒤 귀국하지 않고 잠적해 경기 포천시의 한 업체에서 일하다 적발됐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방글라데시문화축제’ 참여 공연단으로 위장해 집단 입국한 방글라데시인 40여 명도 단속의 손길을 피하지 못했다. 크루즈 관광선을 타고 제주로 입국할 경우 제주에서는 비자 없이도 관광이 가능하다는 점을 노려 집단 이탈한 44명과 이들에게 1인당 1000만~2000만 원을 받고 입국을 도운 중국인 알선책, 한국인 브로커가 덜미를 잡히기도 했다.
신분세탁 불법체류자 계속 증가
체육지도사나 국제영화사 관계자 등으로 그럴듯하게 신분을 위장하는가 하면, 노숙인과의 위장결혼 등 신분세탁을 통해 불법체류를 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정부가 출입국 관리를 강화하자 기를 쓰고 입국하려는 외국인의 수법이 다양하게 진화하는 것. 고용허가제든, 불법적인 신분세탁과 밀입국이든 국내에 들어오려는 외국인이 송출비용과 브로커 수고료 등으로 지불하는 돈은 통상 1000만 원 안팎이다. 속된 말로 ‘본전 생각’이 불법체류의 덫에 빠지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불법체류 단속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한국에 남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으면 별수 없다. 류재범 중소기업중앙회 외국인력팀장은 “‘청년실업이 심각하다. 구직 눈높이를 낮춰라’라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우리 국민이 외면하는 중소기업은 예나 지금이나 인력난에 허덕인다. 고용허가제 외국인근로자를 신청하고 싶어도 사업장 규모에 따라 신규인력 배정 인원이 정해져 있어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올해는 특히 지난해에 비해 업체당 배정 인력이 1~2명씩 줄었다. 어떻게든 문 닫지 않고 공장을 돌리려면 인력을 끌어올 수밖에 없다 보니 불법체류자를 쓰게 된다. 그러다 걸리면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불법체류자가 발생하는 원인은 중국과 동남아에 비해 임금 수준이 10배 이상 높고, 거주여건과 교육환경이 더 나아 한국에서 취업과 거주를 희망하는 외국인근로자가 많기 때문이다. 사업주는 경기변동에 따라 해고가 쉽고 노동생산성이 증가한다는 이유로 숙련된 장기 불법체류자를 고용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우리 사회에 깃든 온정주의로 인한 불법체류자 용인, 과거 불법체류자에 대한 합법화 조치 등으로 인한 법 경시 풍조 확산도 불법체류자 발생 원인으로 지목된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불법체류자 방지 대책에 대해 “국민국가가 자국 법을 어긴 채 머무르는 외국인과 그 가족을 적발해 추방하는 것은 정당한 주권 행사 영역이다. 그렇지만 그 경우에도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긍지까지 무너뜨리는 형태의 단속은 곤란하다. 단속 과정에서 그들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추방 과정서 인권침해 논란
2010년 열린 불법체류 단속 사망자 합동추모제(왼쪽). 지난해 5월 열린 ‘제9회 이주민 자녀와 함께하는 어린이날 무지개축제.
인권위가 보고서를 공개한 직후 법무부는 “사실관계 확인이나 검증절차 없는 일방적 발표에 따른 것”이라며 “2009년 5월 제정된 ‘출입국사범 단속 과정의 적법절차 및 인권보호준칙’에 따라 직무수행 시 반드시 증표를 휴대해 제시토록 하고, 폭언이나 차별적 언행을 금지토록 하고 있다. 또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단속한 외국인을 5시간 이상 단속차량에 보호조치를 하는 일이 없게 하고, 화장실은 원할 때 언제라도 갈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단속을 피해 철새처럼 떠돌면서도 쉽게 이 땅을 떠나지 못하는 불법체류자 중에는 합법적인 체류기간을 포함해 한국에 머문 지 10년 넘은 사람도 많다. 그중에는 1990년대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들어와 지금까지 남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길게는 14~15년을 산 사람도 있다. 그들에겐 단속 공포 외에 또 다른 고민이 있다. 이제 와서 고국에 돌아갈 수도, 한국에 남을 수도 없다는 딜레마다.
인권위가 지난해 펴낸 ‘2010 이주아동 실태조사 보고서’의 사례를 보면, 그들의 처지가 쉽게 읽힌다. “아버지가 단속되어 나갔기(출국) 때문에… 한국에 오래 살아서 몽골에 가면 적응 못할 것 같아요. 단속 안 당하려고 많이 고심해요.”(O양, 고1 재학), “아이는 스리랑카 몰라요. 아이에게 스리랑카 가자니까 안 간대요. 여기서 공부하다 (자신이) 18세가 되면 데리러 오라고 얘기해요. 집에서 얘기할 때도 스리랑카 말 안 해요. 편한 한국말 하잖아요. 스리랑카에 대한 믿음이 없는 거예요. 엄마 아빠만 스리랑카 사람이지 자기는 한국 사람이라고 얘기해요. 여기서 태어났기 때문에 스리랑카를 모르니 한국 생활 이상을 생각 못하는 거지요”(AB씨, 초등생 아들을 둔 아버지).
불안에 떨면서도 한국 친구, 한국 음식, 한국 문화에 동화된 장기 불법체류자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새로 뿌리내리기가 쉽지 않다. 자신이 떠나 있는 동안 단절된 인간관계를 새로 만들어야 하고 그동안 변한 자국 문화에도 적응해야 하므로 두려움이 앞선다. 부족한 일자리를 찾아 떠날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는 본국의 생활수준에 맞춰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도 쉽지 않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불법체류자로 지내온 사람들보다 단속과 추방의 공포는 몇 배 더 크다.
추방된 아이들 “된장찌개 먹고 싶다”
장기 불법체류자 부모를 둔 아이들 가운데 한국에서 태어났어도 출생신고 기록이 없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아이만이라도 본국 형제나 부모(아이 조부모)에게 보내고 싶다”고 하지만 여권을 만들 수 없어 이마저 여의치 않다. 이들은 본국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한국에 온 아이들과 달리 불법체류자 단속 통계에 잡히지도 않는다.
법무부 측은 NGO 등 우리 사회 일각에서 불법체류자 합법화 요구가 거센 데 대해 “불법체류자의 일시적 감소 효과는 있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법 경시 풍조가 만연해 체류질서가 더 문란해질 수 있으므로 신중을 기해야 할 것으로 본다”며 “외국인 체류질서 확립 차원에서라도 불법체류자에 대해선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설동훈 교수는 “개방경제 시대에 외국인 관광객의 형태를 띠고 입국하는 사람을 봉쇄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불법체류 외국인 단속보다 그 고용자 처벌에 행정력을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불법체류자를 고용한 고용자에게 범칙금을 엄중히 부과해 비합법 이주노동자(불법체류자)가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기 불법체류자 부모와 함께 자신이 태어난 한국에서 추방당한 아이들은 “된장찌개와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며 한국을 그리워한다. NGO들은 ‘불법’과 ‘합법’을 떠나 ‘인간’과 ‘인권’의 문제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쓰는 용어는 ‘불법체류자’다. 같은 신분의 사람에 대해 NGO들은 ‘미등록 이주자’라고 부른다. “유엔 등 국제기구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illegal(불법의)’이 아닌 ‘undocumented(이주 또는 취업 증명서가 없는)’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이 이유다. 후자를 ‘미등록’으로 번역한다는 것. 국내 일각에서는 ‘비합법 이주노동자’로 표현하기도 한다.
불법체류자를 지칭하는 용어의 혼란은 그들의 정체성과 닮아 있다. 한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제3의 이방인으로 지내는 국내 장기 불법체류자의 삶은 오늘도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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