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 감염 환자가 대량으로 발생하면서 부분폐쇄에 들어간 삼성서울병원의 직원들이 6월 15일 검사를 받기 위해 응급실 앞에 마련된 메르스 진료소에서 대기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6월 17일 오전 10시(현지시간) 메르스 대응 긴급위원회를 열고 한국에서 발생한 메르스 사태 원인으로 △의료진과 대중의 메르스에 대한 이해 부족 △최적화되지 않은 병원 내 감염 예방 및 통제 조치 △메르스 환자와의 접촉 및 노출 기간을 증가하게 만든 혼잡한 응급실과 다인병실 △(동일한 환자가) 여러 개 병원에서 진료받는 문화 △많은 방문객과 환자 가족이 병실에서 머무는 문화 등을 꼽았다. 하나같이 한국 의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다.
“제대로 된 방호복 달라”
전문가들은 이와 더불어 보건당국의 무능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한국형 메르스’ 확산의 원인이라 입을 모은다. 조원철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명예교수(한국방재안전학회 상임고문)는 컨트롤타워 실종, 감염병 대응 인프라 부실, 전문가 부족 등의 문제를 언급하며 “지난해 세월호 사고 이후 1년여 만에 발생한 국가적 위기에서 정부는 또 한 번 허술한 위기대응 시스템을 여과 없이 노출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 관계자가 국민을 안심시키겠다며 ‘메르스의 치사율이 결핵보다 낮다, 독감 수준이다’ 같은 발언을 한 건 오히려 국민을 분노케 했다”고 꼬집었다. “이제라도 초동대응 실패에 대해 솔직히 사과하고, 이를 계기 삼아 국내 의료 시스템 및 위기대응 체계 전반을 개선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게 조 교수의 주문이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도 “지금 정부의 메르스 대응은 순전히 의료진의 헌신과 시민의식에 의지해 진행되는 상태”라며 “만약 메르스 바이러스의 감염력이 신종플루(신종인플루엔자) 수준으로 높았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생각하면 아찔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최일선에서 메르스와 맞서고 있는 의료진 사이에서는 “힘에 부친다”는 호소가 이어지고 있다. 서울시내 대형병원에서 메르스 의심환자를 진료한 한 호흡기내과 전문의는 “요즘 같은 한여름에 방호복을 입으면 금세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 쿨러(허리에 차는 전동식 호흡 장치)가 있는 C등급 방호복을 입으면 숨 쉬기가 좀 나은데, 일선 병원에는 이 장비가 턱없이 부족하다”며 “의료진 대부분이 숨도 쉬기 힘든 D등급 방호복 차림으로 진료에 나선다”고 밝혔다. 건장한 남자인 그도 의료마스크와 고글, 긴소매가운, 장갑 등으로 구성된 D등급 방호복을 입고 30분 정도 지나니 고글에 김이 서려 뿌예지고 땀에 흠뻑 젖은 옷이 점점 무거워져 ‘더는 못 버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의료진들은 그 상황에서 2~3시간씩 진료를 이어가고 있다. 의심환자 2명이 입원했던 한 지역병원의 경우, 간호사 4명이 12시간 2교대로 환자를 관찰하기도 했다. 대체인력이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경기 수원 경기도환경보건연구원 밀폐실험실에서 연구사들이 메르스 판정을 위한 유전자 분석을 하고 있다(왼쪽). 송재훈 삼성서울병원장(오른쪽에서 첫 번째)과 의료진이 6월 14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본원에서 감염된 모든 메르스 환자의 치료를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밝히며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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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에 대한 불안
메르스 환자를 진료한 뒤 마스크를 벗는 의료진.
이런 상황에서 의료진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안전에 대한 불안이다. D등급 방호복을 입은 채 메르스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시행한 간호사가 메르스에 감염되는 등 의료진 감염 사례가 속속 발생하면서 공포가 확산하고 있다는 얘기다. 삼성서울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다 메르스에 감염된 35번 환자 상태가 위중한 것도 많은 의료진에게 적잖은 충격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한 간호사는 “초기에는 메르스에 대한 정보가 충분치 않아 기저질환이 없는 경우 감염돼도 크게 위험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 근무하던 젊은 의사가 사경을 헤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안이 생긴 면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6월 11일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한 지역 병원을 방문했을 때 의료진들이 C등급 보호복을 지원해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한 것도 이런 공포의 반영이라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보건의료노조 관계자는 “미국의 경우 지난해 D등급 방호장비를 착용하고 에볼라 환자 치료에 나선 의료진이 에볼라에 감염되자 즉각 방호복 기준을 C등급으로 상향 조정했다고 들었다. 우리 정부도 의료진 보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각 지역 보건소에 배치돼 메르스와 맞서고 있는 공중보건의(공보의·3년간 군복무를 대체하는 의사)들도 피로와 감염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보건복지부 중앙메르스관리대책본부는 6월 16일 예방의학 전공의와 간호사 등 90명으로 구성한 민간역학조사반을 현장에 추가 배치하겠다고 발표했다. 문제는 그전까지 이미 160명을 넘어선 국내 메르스 환자와 약 6000명의 격리대상자를 관리하는 전국의 역학조사관이 34명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정규직은 2명, 나머지 32명은 공보의였다. 심지어 이 중 10명은 올해 5월 배치됐고, 3년 차 공보의는 6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보건소 앞에 설치된 컨테이너 박스에서 메르스 의심환자의 검체를 채취해 보건당국에 넘기고, 보호장구를 착용한 채 자택격리자를 방문 관리하며, 확진자가 발생할 경우 감염경로를 확인하는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 중이다. 대한공중보건의사협의회에 따르면 제대로 된 교육이나 행정적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이들은 자비로 숙식을 해결하고 휴일을 반납한 채 하루 20시간씩 업무에 매달리고 있다. 그러나 메르스가 확산하면서 이들을 향해 ‘허술한 역학조사로 방역에 구멍이 뚫렸다’는 지적이 쏟아지는 상황.
1년 차 공보의에 맡긴 역학조사
이에 대해 전병율 연세대 보건대학원 교수(전 질병관리본부장)는 “역학조사관은 감염병의 발생과 확산을 막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전문가로, 미국의 경우 질병관리본부(CDC)가 2년 동안 체계적인 교육을 시킨 뒤 이들을 전국에 배치한다. 예방의학이나 감염내과를 전공하지도 않은 이들에게 이 업무를 맡기면서 감염병 확산을 못 막았다고 비난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 비판했다. “2000년 국내에 역학조사관 제도를 처음 만들면서 전문인력이 부족해 임시로 공보의에게 일을 맡겼는데, 그 관행을 15년째 이어온 것이 이번에 메르스 사태를 막지 못한 한 가지 원인”이라는 게 전 교수의 지적이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1994년부터 2년간 CDC 역학전문요원(Epidemic Intelligence Service·EIS) 과정을 이수한 강대희 서울대 의대학장도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의 경우) 역학전문요원이 주민 설득과 공포 통제를 위한 미디어 대응능력을 갖추고 카운티 폐쇄와 이동권 제한에 필요한 행정 능력, 정책 입안 능력, 현장에서 스태프들을 지휘하는 프로듀서로서 능력 등 총체적 자질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는 초보 의료인의 헌신에 이 모든 임무를 맡기는 상황이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은 이에 대해 “보건당국이 자신들의 책임과 임무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질병관리본부가 2013년 펴낸 ‘감염병 관리사업 지침’에는 ‘2009년 신종인플루엔자 유행으로 270명이 사망하는 등 피해가 발생해 사회, 경제적 비용이 약 1조9000억 원에 이르렀다. 최근에는 기후변화, 세계화 등으로 열대열 말라리아와 뎅기열이 보고되는 등 새로운 감염병이 출현하는 상황’이라는 분석과 함께 ‘최근 발생하고 있는 감염병은 특정 지역에 국한해 일시적으로 발생하기보다 여러 지역에 걸쳐 수시로 발생하며 (중략) 국제교류 증가로 해외 발생 감염병의 국내 유입 가능성 등 위협이 증가되고 있어 감염병 관리 체계를 강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정작 업무 과정에서는 이런 태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게 노 전 협회장의 지적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정말 감염병 위협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지역 보건소를 방역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현재 보건소는 행정자치부 산하로 지방자치단체 지휘를 받고, 무료 예방접종 같은 선심성 행정을 펴는 장소로 동원되는 게 현실 아니냐”며 “지금이라도 보건소를 보건전문가가 통제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방역 업무를 최우선으로 하는 시스템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메르스 사태 확산과 관련해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문제는 결국 시스템 부재다. 감염병이 발생했을 때 이를 어떻게 진단하고, 확산을 차단하며, 감염자를 치료할지에 대한 정부 대책이 전무했다는 지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비해 크게 낮은 공공의료 비중이 이런 문제를 낳았다는 비판도 나온다.
우리나라의 공공의료 비중은 2013년 말 현재 기관 수 기준 5.7%, 병상 수 기준 9.5% 수준이다. 병상 수를 기준으로 할 때 영국 100%, 캐나다 99.1%, 호주 69.2%, 프랑스 62.3%, 독일 40.4%, 일본 26.3%, 미국 24.5% 등 OECD 주요국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러한 환경은 정부가 감염병 대응 정책 등을 펼 때 민간병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는 지적이 있다.
의료 환경의 근본적 개혁
특히 삼성서울병원을 중심으로 메르스가 확산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한 배경에 이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보건의료노조 관계자는 “현재 정부의 의료산업정책은 공공의료 기능 및 정부 지원을 축소하고 민간에 그 구실을 떠넘기고 있다. 그러다 보니 메르스처럼 국가적 대응이 필요한 감염병 발생 시 신속한 대응이 어렵다. 격리시설과 최신 장비를 보유한 민간의료기관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질병 극복에 어려움을 겪을 만큼 공공의료 환경이 열악한 상황”이라며 “과잉투자라는 지적이 있을지라도 공공의료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 장기적으로 경제적 손실을 줄일 수 있는 가장 실효성 있는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당장 시설 확대가 어렵다면 국립중앙의료원을 중심으로 전국의 지역거점 공공병원 등을 네트워크화해 정보를 공유하고 감염병에 공동대응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번에 메르스 확산 원인으로 지적된 ‘후진적 병원 문화’를 개선하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송형곤 전 삼성서울병원 응급의학과장은 “지방 유명 대학병원에서 암수술을 하자고 하면 무조건 빅5로 소견서를 들고 오는 것이 대한민국 의료전달체계의 상황이고, 동네병원에서 약 좀 먹어보고 경과를 보자고 하면 못 믿겠다면서 3차 병원으로 가버리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번 메르스 사태는) 대형병원 쏠림 현상을 그대로 방치하고 응급실 과밀화 현상을 해결하지 못했던 대한민국 정부, 보건복지부, 건강보험공단 등의 책임”이라고 지적했다.
의료계의 자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 대형병원 예방의학과 전문의는 “이번 메르스 대응 과정에서 일부 의료인은 전문가로서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정부 편에 서서 정보 통제에 앞장섰다. 정부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3년간 감염병 위기관리 대응이란 명목으로 연구비 757억 원을 지원했는데, 이런 데 길들여져 정부 눈치를 보게 된 것 아닌가 의심이 든다”며 “감염병 대응 체계를 바로 세우려면 정부에 과감히 쓴소리를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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