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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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하나에 진심을 담아라

양파(더블 파) 극복하기

  • 남화영 골프칼럼니스트 nhy6294@gmail.com

    입력2015-06-22 13: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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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 하나에 진심을 담아라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골프 영화 ‘틴 컵’의 가장 극적이면서 짜릿한 장면은 (영화가 늘 그러하듯) 끝날 때쯤 나온다. 자질은 충분하지만, 한물간 선수였던 코스트너가 US오픈에 출전해 다크호스처럼 맹렬하게 선두로 치고나가 우승을 앞두고 있던 순간, 마지막 파5 홀에서 과감하게 투온을 시도했지만 공이 호수에 빠진다. 이후 그는 공 5개를 연속해서 물에 빠뜨린다. 호수 건너에서 쳐도 될 것을 그가 무모하게 그 자리에서 계속 공을 친 이유는 공 하나에 진심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6번째 그가 친 공은 280야드(약 256m)를 날아 그대로 홀컵에 빨려 들어간다. 감격한 애인(르네 루소 분)이 말한다.

    “US오픈 우승자는 5년만 지나면 잊히지만 당신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거예요.”

    6월 12일 오스트리아 다이아몬드CC에서 열린 유러피언투어 리오네스오픈 2라운드에서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러시아 선수 안드레이 파블로프는 전장 506야드(약 463m) 내리막 파5 첫 홀에서 무려 17타를 기록했다. 티샷을 시작으로 자그마치 공 6개를 연달아 물에 빠뜨리고, 벌타를 포함해 13타째 가서야 공을 페어웨이에 올린 것. 그가 2번 홀을 향해 걸어갈 때 이미 스코어는 12오버파였다.

    파블로프는 2, 4, 8번 홀에서 보기를, 9번 홀에서는 더블보기를 추가하면서 전반에만 17오버파 53타를 쳤다. 하지만 후반에는 보기 3개에 버디 2개를 추가하면서 총 90타로 힘든 라운드를 마무리했다. 꼴찌 스코어에 가까웠으니 컷 탈락한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그는 1번 홀의 참담함을 딛고 나머지 17개 홀을 끝까지 라운드했다. 이를 지켜본 갤러리들은 바로 이런 모습이 진정한 프로 정신이라고 그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파블로프의 기록은 역대 최다타 기록에는 아쉽게도(?) 못 미친다. 유러피언투어에서의 한 홀 최다타 기록은 1978년 프랑스오픈에서 필리프 푸키에가 작성한 20타다. 미국 프로골프협회(PGA) 투어는 한 수 위다. PGA 투어 역사상 한 홀 최다타는 23타로 레이 앤슬리(1938년 US오픈)와 토미 아머(1927년 쇼네오픈)가 기록했다.



    일본골프투어(JGTO) 기록은 파3 홀에서 나온 19타다. 2006년 9월 21일 에이컴인터내셔널 1라운드 8번 홀에서 투어 10년째인 다테야마 미쓰히로는 16오버파를 쳤다. 티샷이 오른쪽 갈대숲으로 향했는데 탈출하기까지 14번 샷을 했다. 하지만 그는 후반에는 버디만 4개 잡으면서 84타(전반 53, 후반 31타)를 쳤다. 한 홀에서 처참하게 망가졌으나 곧 평정심을 찾아 스코어를 줄인 게 놀라울 정도다.

    한국프로골프투어(KGT)에서도 2007년 4월 28일 제주 제피로스CC에서 열린 토마토저축은행오픈 2라운드에서 파4 홀 17타가 나왔다. 김창민은 5번 홀(383m)에서 갑자기 불어온 돌풍 탓인지 무려 6개 샷이 OB(아웃오브바운즈)가 났다. 드라이버 샷 4번에 이어 아이언 샷으로도 2번이나 날려버리고 7번째 친 13타에서야 공이 페어웨이에 붙어 있었다.

    잘 나가다가도 특정 홀에서 양파(더블 파) 이상으로 무너지면, 이후에는 급격히 경기를 포기하고 열정을 상실하는 아마추어 골퍼가 적잖다. 하지만 프로골퍼조차 무지막지하게 무너질 때가 있다는 걸 안다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고 마음의 상처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한 홀에 17타를 친 파블로프의 세계 랭킹은 1598위다. 랭킹만으로 보건데, 그가 우승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1번 홀에서 그렇게 무너지고도 나머지 17홀을 굳건하게 버틴 건 칭찬하고 또 오래 기억할 만하다. ‘틴 컵’처럼 애인이 봤다면 그에게 무한한 애정이 샘솟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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