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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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로 세 번 변해 고구려를 지킨 연암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입력2007-08-08 17: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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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고기로 세 번 변해 고구려를 지킨 연암

    ‘열하일기’는 조선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 방향을 담고 있다.

    홍대용과 박제가는 이미 연행(燕行·사신이 북경에 가던 일) 한 후 글을 남겼지만 북학파의 리더이던 연암 박지원은 44세 때인 정조 4년(1780)이 돼서야 북경에 가는 꿈을 이룬다. 팔촌형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제의 생일축하 사절로 가는 길에 동행한 것이다. 병자호란을 겪고도 ‘소중화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당시의 청나라 여행은 개화기의 ‘서유견문’과도 같은 경험이었다.

    연암이 연행 경험을 3년 동안 절차탁마, 조선에 대한 비판과 개혁 방향을 담아낸 책이 한국 고전문학의 최고봉으로 일컫는 ‘열하일기(熱河日記)’(1783)다. 우물 안 개구리(소중화주의)에 머물러 있지 말고 상공업과 대외무역을 중시하고, 발달한 청나라(를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케 하자는 게 메시지다. 오늘날로 치면 세계화의 기치를 높이 든 셈이다.

    44세 때 청나라 여행 후 ‘열하일기’ 통해 세계화 역설

    하지만 연암은 중국어 공용화론을 주장한 박제가보다 조선적인 냄새가 풍기는 이덕무의 시를 ‘조선의 국풍(國風)’이라 상찬했고, 스스로도 조선적인 시를 쓰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사마천과 반고의 문장을 그대로 따라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 법고창신(法古創新)해야 하며, 열하의 피서산장을 두고 쓴 강희제의 시 서른여섯 수는 졸렬하여 볼만한 게 없다고 언급한 점 등을 미뤄보면 연암은 ‘묻지마 선진문명 따라하기=신자유주의’와는 일정 정도 거리를 둔 것 같다. 물론 ‘열하일기’ ‘허생전’에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과 우연처럼 엇비슷한 시기에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가치’를 역설했다.

    또한 오늘날 근대문명의 한 질곡인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하자는 탈근대적 발상을 ‘열하일기’와 ‘호질’에서 호랑이의 입을 통해 외치는 등 수준 높은 국제정치학적 시각을 보여준다. 중국작가 웨난은 ‘열하의 피서산장’(일빛 펴냄)에서 연암의 국제정치학적 안목을 강희제가 열하에 피서산장을 세운 예로 전해준다.



    명나라 말, 이자성이 반란을 일으켜 북경을 점령하자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는 청나라에 귀순한다. 덕분에 청나라는 질풍노도처럼 단숨에 북경을 차지하고 오삼계를 운남의 평서왕(平西王)으로 임명한다. 그런데 강희 12년(1673) 오삼계가 상지신, 경정충 등과 함께 ‘삼번의 난’을 일으키고 만다. 이에 청나라 강희제는 오응웅(오삼계의 아들)을 참수하고 팔기 정예부대를 남방에 보내 난을 진압케 한다.

    당시 강희제는 돌연 북경을 유유히 떠나 북쪽 새외(塞外)지역을 돌더니 고북구(古北口) 밖 열하에 피서산장을 짓기 시작했다. 대만을 수복하고 세 번이나 친히 출정해 신강(新疆)을 청나라 영토로 확정짓는 토대를 닦으면서 청의 영토를 동으로 사할린, 서로 파미르고원, 북으로 시베리아, 남으로 남사군도에까지 이르게 한 그로서는 의외의 행동이었다. 삼번의 난이 한창일 때, 강희제는 왜 정치군사의 중심을 열하로 옮기고 북쪽 변경에서 거대한 수렵 활동을 했을까. 팔기 자제들이 수렵으로 궁술과 기마술을 연마해 만주족의 뜨거운 야성을 되찾길 원했던 것일까.

    열하는 동서로 천리 준령이 이어지고 북경과 가까워 만약 이곳이 뚫리면 적의 기병이 파죽지세로 장성의 미약한 지역을 돌파해 험준한 지형이 하나도 없는 북경을 포함한 화북 평원까지 일사천리로 공략할 수 있다. 특히 고북구를 “하늘이 쇠자물쇠를 남겨 웅장한 빗장을 베고 있다”라는 말로 표현하듯, 북경으로 곧장 쳐들어갈 수 있는 요충지다. 강희제는 이 천하의 등허리에 자리해 중원의 방어선을 통제하려 한 것이다. 그래야 분봉(分封)과 혼인 등 당근정책으로 몽고의 여러 부족과 동맹해 황량한 초원과 산림으로 우거진 열하 주변 ‘무형의 만리장성(피서산장)’이 몽고의 심장부까지 꿰뚫고 제정러시아의 동진 야욕을 분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암 사신 일행이 삼배고두의 예를 취했던 ‘열하의 피서산장’은 피서나 즐기는 한적한 곳이 아니라, 천하의 형세를 곰곰이 살펴 북쪽으로 몽고를 제압하고 오른쪽으로 회회(回回)를 잡아당기며 왼쪽으로 요녕과 심양으로 통하고 남쪽으로 천하를 제어하는 청나라 황제들의 ‘중남해(현 북경 소재 중국공산당 고위 간부들의 거처)’였던 것이다. 연암은 또 ‘열하일기’ ‘황교문답(黃敎問答)’ ‘반선시말(班禪始末)’에서 청나라가 티베트 불교의 리더인 판첸라마를 정중히 모시면서 거대한 외팔묘를 지어주는 것에서 ‘티베트 지배정책’을 읽는 날카로움도 보여줬다. 오늘날의 한중 국제관계에 비춰 흥미로운 것은 ‘열하일기’를 읽다 보면 18세기 당시 청나라와 조선 사람들의 ‘고구려 인식관’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신을 따라서 중국에 들어가는 자들은 반드시 칭호가 있다. 역관은 ‘종사관’이라 하고, 군관은 ‘비장’이라 하고, 놀 양으로 가는 나 같은 자는 ‘반당(伴當)’이라 한다. 우리나라 말에 소어죂蘇魚·밴댕이(盤當)죃라 불러 ‘반(伴)’자는 음이 매일반이다. 압록강을 건너고 보면 소위 ‘반당’은 모자 은정수리에 푸른 깃을 꽂고 짧은 소매에 가뜬한 차림이어서 길가의 구경꾼들은 흔히 ‘새우’라고 한다. 무엇을 두고 ‘새우’라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무관의 별호 같다. 지나가는 촌가 마을 어린애들이 떼지어 모여 있다가 한목소리로 부를 때는 ‘가오리(哥吾里)가 온다. 가오리가 온다’ 한다.

    더러는 말꼬리를 따라오면서 저마끔 이렇게 떠들어댄다, ‘가오리가 온다’는 말은 ‘까올리(高麗)가 온다’는 말이다. 나는 웃으면서 동행에게 ‘세 가지 물고기로 변하는구먼” 하니, 세 가지 고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길에서는 반당이라 하니 이는 소어요, 강을 건너가는 새우라고 하니 새우도 어족의 하나요. 되땅 애들은 가오리라고 하니 이는 홍어가 아닌가?’ 했더니 사람들은 다들 깔깔 웃었다.” -열하일기 ‘피서록’에서

    조선사람 연암은 자신을 ‘밴댕이’ ‘새우’라며 웃기면서도, 자신은 결국 ‘가오리(고구려인)’라는 걸 스스로 의식하면서 이 글을 썼을 것이다. 아직도 중국인들은 한국인을 욕할 때 ‘가오리빵즈(高麗棒子·고구려놈)’라고 한다. 직역하면 ‘고구려 몽둥이(棒子, 은유적으로 상상하길)’인 이 말이 문어체로 바뀌면 중국 사서에 자주 나오는 ‘고려미물(高麗微物)’이다.

    동북공정 푸는 열쇠 올바른 고전 읽기 통해서만 가능

    욕에는 역사와 문화가 깃들어 있게 마련이다. 예부터 중국의 한족(漢族)이 오늘날 만주지방에 살던 이들을 ‘좋게’ 생각했더라면 ‘동쪽 오랑캐(東夷)’라든지 ‘더러운 돼지(濊貊·예맥)’, 가오리빵즈, 고려미물 등이라고 불렀을 리 만무하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고구려를 잇는 나라라는 뜻에서 국호를 고려라고 했다. 하지만 동북공정을 추진 중인 중국 측 주장 가운데 하나가 ‘고구려와 고려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열하일기’는 그 주장을 이렇게 반박한다.

    “고려는 원래 고구려(高句麗)에서 딴 이름으로 ‘구(句)’자와 ‘마(馬)’ 변을 없애고 산은 높고 물은 맑다는 뜻으로 ‘고려’라 했는바, 천자문 중에 있는 금생려수(金生麗水)의 ‘려’자는 응당 거성으로 읽어야 할 터인데, 중국 사람은 이를 평성을 읽는다. 수나라 당나라 시대는 고구려를 모두들 고려라 했으니, 고려란 이름은 그 내력이 오래다.

    이덕무는 일찍이 말하기를 ‘고구려는 ‘한서지리지’에 처음으로 나왔는데, 그 선조는 금와다. 우리나라 말로 ‘와(蛙)’를 개구리 또는 왕마구리라 하는데, 옛날 사람들은 질박하고 솔직하여 임금의 이름으로 국호를 삼았는바, 그 성을 붙여 고구려라 한 것이다’ 했다. 이것이 비록 한때 우스갯소리 같지만 매우 이치에 닿는 말로서 외국 방언에 음은 있지만 글자가 없는 종류가 많아 중국인들은 금을 애친각라(愛親覺羅)라 하고, 장사(壯士)를 예락하(曳落河)라고 하는 따위가 이것이다.” -열하일기 ‘피서록’에서

    연암 박지원의 처남 이재성이 쓴 ‘소단적치(騷壇赤熾)’는 과거 합격 사례문집이다. 요즘 식으론 ‘족보답안’인데, 연암은 이 책의 서문에서 “모범답안을 답습하는 것을 뛰어넘어 이치를 얻는 창의력이 글쓰기의 열쇠”라고 했다. 논술도 마찬가지다. 열쇠는 (고전) 읽기다. 오늘날의 동북공정을 푸는 열쇠 중 하나가 바로 고전(열하일기)에 있지 않은가. 창의적 답안은 이렇게 책읽기를 통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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