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의 보편적이고 일반화된 사실을 두고 예전에도 그랬을 것이라 짐작하는 버릇이 있다. 예컨대 우리 민족과 고추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보고 웅녀가 동굴에서 마늘, 쑥 외에 고추도 먹지 않았을까 여긴다. 그런데 고추는 임진왜란 이후 들어온 외래식물로,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김치는 고추가 들어온 뒤에도 한참 후 발명(?)됐으므로 김치 역사가 길어야 200년 남짓하다고 하면 “에이, 설마” 하고 의심한다.
칼국수도 이와 비슷한 오해를 사는 음식이다. 음식 자료를 뒤적이다 칼국수가 “조선시대 대표적인 서민음식”이라 적힌 글을 간혹 발견하게 된다. 비싸야 5000원 정도 하는 지금의 칼국수 값과 분식집 등 서민이 즐겨 찾는 음식점의 주요 메뉴임을 보고 그런 오해를 하는 듯하다.
조선시대에도 칼국수가 있기는 있었다. 단지 지금 같은 밀가루 칼국수는 서울 양반가에서나 해먹은 귀한 음식이었다. 조선시대 조리서 ‘음식디미방’에 소개된 칼국수는 메밀을 주재료로 하고 있다. 메밀가루만으로 반죽을 하면 차지지 않으므로 밀가루나 감자녹말, 찹쌀풀 따위를 넣어 반죽했다. 그러니까 일본의 소바 비슷한 면발이라 여기면 될 것이다. 지금은 이런 메밀칼국수를 내는 식당이 거의 없는데, 메밀로 유명한 봉평에 가면 몇몇 집이 토속음식처럼 내놓고 있는 게 전부다.
조선시대엔 귀한 음식 … 이젠 서민들 최고 음식
칼국수는 6·25전쟁 이후 미국의 구호품으로 밀가루가 들어오면서 서민음식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밀 재배 북방한계선이 충청도를 넘지 못하는 까닭에 미국의 원조 밀이 들어오기 전만 해도 밀은 꽤 귀한 식재료였다. 일부 농민, 시민단체에서 이 원조 밀을 계기로 우리의 식량자급률이 급격히 떨어지고 결국엔 미국에 식량주권이 종속됐다고 주장하지만, 한편으로는 값싼 밀 덕분에 조선 양반가 음식이던 칼국수가 대한민국 서민음식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 칼국수를 거의 먹지 못했다. 어머니가 칼국수를 만들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우리 집 바로 옆 국수공장에서 파는 우동이 엄청 싸 어린 시절 내내 이 집 우동만 먹었다. 10원짜리 몇 장 들고 가면 여섯 식구 다 먹고도 남을 생우동을 한 양푼 담아주었다.
내가 칼국수에 입맛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 서울에 올라와서다. 서울에서는 그때 벌써 칼국수 전문점이 번창하고 있었다. 지금은 ‘명동교자’로 이름을 바꾼 ‘명동칼국수’는 박정희 시대부터 유명세를 떨쳤다. 육영수 여사가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쳤다, 배웠다 하는 소문이 퍼져 명동칼국수를 먹지 않으면 서울 사람 취급하지 않을 정도였다. 상경한 다음 날 나는 근처 백화점을 구경하고 30분간 줄 서 기다렸다 먹은 기억이 있다.
진한 닭육수에 마늘이 잔뜩 들어간 김치 맛은 가장 고전적인 서울칼국수로 꼽을 수 있다. 여기에 비교되는 칼국수는 ‘칼국수 대통령’의 휘호가 걸려 있는 ‘혜화동 칼국수’다. 구수한 사골국물과 칼칼한 양념으로 손님을 끌었는데, 시원한 맛은 덜한 편이다. 혜화동이라는 장소 덕인지 ‘혜화동 칼국수’는 서울의 (쇠락한) 양반음식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또 하나 서울 양반가 음식이라는 특징을 보여주는 칼국수로 ‘연희 칼국수’를 꼽을 수 있다. 보기 드물게 가는 면발에 개운한 사골육수 맛은 품위가 있어 보인다.
1990년대 들어서는 지역의 유명 칼국수집 브랜드를 이용한 프랜차이즈 점포가 주택가 곳곳을 점령했다. 그러면서 버섯칼국수, 해물칼국수, 바지락칼국수 등 메뉴도 다양해졌다. 이들 프랜차이즈 칼국수집의 특징은 전골냄비를 올려 버섯이나 채소 먼저 먹고 칼국수를 먹은 뒤 그 국물에 볶음밥이나 죽까지 해먹음으로써 ‘싸게, 그러나 배부르게 먹었다’는 포만감을 주었다. 즉 ‘서민음식’이라는 컨셉트에 충실한 것이다.
집에서 해보면, 칼국수 맛내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래서 웬만한 칼국수집은 다들 맛에서 낙제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국물에만 신경 쓰는 때문인지 면에서 실패하는 칼국수집이 의외로 많다. 특히 반죽 후 숙성 과정을 거치지 않아 생밀가루 냄새 풀풀 풍기는 칼국수를 내놓고 어찌 장사할까 싶은 곳이 부지기수다. 또 면을 쫄깃하게 하기 위해 ‘무엇’인가 첨가하는 것은 좋지만 첨가제의 이상야릇한 냄새는 조리과정에서 어찌하지를 못한다. 아무리 칼국수가 값싼 서민음식이라 해도 맛에 좀더 신경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칼국수도 이와 비슷한 오해를 사는 음식이다. 음식 자료를 뒤적이다 칼국수가 “조선시대 대표적인 서민음식”이라 적힌 글을 간혹 발견하게 된다. 비싸야 5000원 정도 하는 지금의 칼국수 값과 분식집 등 서민이 즐겨 찾는 음식점의 주요 메뉴임을 보고 그런 오해를 하는 듯하다.
조선시대에도 칼국수가 있기는 있었다. 단지 지금 같은 밀가루 칼국수는 서울 양반가에서나 해먹은 귀한 음식이었다. 조선시대 조리서 ‘음식디미방’에 소개된 칼국수는 메밀을 주재료로 하고 있다. 메밀가루만으로 반죽을 하면 차지지 않으므로 밀가루나 감자녹말, 찹쌀풀 따위를 넣어 반죽했다. 그러니까 일본의 소바 비슷한 면발이라 여기면 될 것이다. 지금은 이런 메밀칼국수를 내는 식당이 거의 없는데, 메밀로 유명한 봉평에 가면 몇몇 집이 토속음식처럼 내놓고 있는 게 전부다.
조선시대엔 귀한 음식 … 이젠 서민들 최고 음식
칼국수는 6·25전쟁 이후 미국의 구호품으로 밀가루가 들어오면서 서민음식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밀 재배 북방한계선이 충청도를 넘지 못하는 까닭에 미국의 원조 밀이 들어오기 전만 해도 밀은 꽤 귀한 식재료였다. 일부 농민, 시민단체에서 이 원조 밀을 계기로 우리의 식량자급률이 급격히 떨어지고 결국엔 미국에 식량주권이 종속됐다고 주장하지만, 한편으로는 값싼 밀 덕분에 조선 양반가 음식이던 칼국수가 대한민국 서민음식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 칼국수를 거의 먹지 못했다. 어머니가 칼국수를 만들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우리 집 바로 옆 국수공장에서 파는 우동이 엄청 싸 어린 시절 내내 이 집 우동만 먹었다. 10원짜리 몇 장 들고 가면 여섯 식구 다 먹고도 남을 생우동을 한 양푼 담아주었다.
내가 칼국수에 입맛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 서울에 올라와서다. 서울에서는 그때 벌써 칼국수 전문점이 번창하고 있었다. 지금은 ‘명동교자’로 이름을 바꾼 ‘명동칼국수’는 박정희 시대부터 유명세를 떨쳤다. 육영수 여사가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쳤다, 배웠다 하는 소문이 퍼져 명동칼국수를 먹지 않으면 서울 사람 취급하지 않을 정도였다. 상경한 다음 날 나는 근처 백화점을 구경하고 30분간 줄 서 기다렸다 먹은 기억이 있다.
진한 닭육수에 마늘이 잔뜩 들어간 김치 맛은 가장 고전적인 서울칼국수로 꼽을 수 있다. 여기에 비교되는 칼국수는 ‘칼국수 대통령’의 휘호가 걸려 있는 ‘혜화동 칼국수’다. 구수한 사골국물과 칼칼한 양념으로 손님을 끌었는데, 시원한 맛은 덜한 편이다. 혜화동이라는 장소 덕인지 ‘혜화동 칼국수’는 서울의 (쇠락한) 양반음식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또 하나 서울 양반가 음식이라는 특징을 보여주는 칼국수로 ‘연희 칼국수’를 꼽을 수 있다. 보기 드물게 가는 면발에 개운한 사골육수 맛은 품위가 있어 보인다.
1990년대 들어서는 지역의 유명 칼국수집 브랜드를 이용한 프랜차이즈 점포가 주택가 곳곳을 점령했다. 그러면서 버섯칼국수, 해물칼국수, 바지락칼국수 등 메뉴도 다양해졌다. 이들 프랜차이즈 칼국수집의 특징은 전골냄비를 올려 버섯이나 채소 먼저 먹고 칼국수를 먹은 뒤 그 국물에 볶음밥이나 죽까지 해먹음으로써 ‘싸게, 그러나 배부르게 먹었다’는 포만감을 주었다. 즉 ‘서민음식’이라는 컨셉트에 충실한 것이다.
집에서 해보면, 칼국수 맛내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래서 웬만한 칼국수집은 다들 맛에서 낙제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국물에만 신경 쓰는 때문인지 면에서 실패하는 칼국수집이 의외로 많다. 특히 반죽 후 숙성 과정을 거치지 않아 생밀가루 냄새 풀풀 풍기는 칼국수를 내놓고 어찌 장사할까 싶은 곳이 부지기수다. 또 면을 쫄깃하게 하기 위해 ‘무엇’인가 첨가하는 것은 좋지만 첨가제의 이상야릇한 냄새는 조리과정에서 어찌하지를 못한다. 아무리 칼국수가 값싼 서민음식이라 해도 맛에 좀더 신경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