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새 아파트 전세보증금이 너무 많이 올랐다. 전국 아파트 평균 전세보증금은 2012년 2월 1억6704만 원에서 올해 2월 2억2754만 원으로 4년 새 36.2%나 뛰었다. 이 기간 서울 아파트 평균 전세보증금은 2억6359만 원에서 3억7261만 원으로 1억1000만 원(41.4%) 정도 뛰었다. 그만큼 세입자의 전세보증금 담보대출도 많이 늘었다.
세입자가 자신의 전세보증금에 질권을 설정해주고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받은 전세보증금을 이사 갈 때 집주인으로부터 받은 후 대출금을 변제하지 않고 임의로 사용했다면 배임죄가 성립할까. 이와 관련해 “배임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최근 대법원 형사3부(주심 박병대 대법관)는 전세보증금(1억2000만 원) 반환청구권에 대한 질권을 대출업체인 B캐피털에 설정해줬음에도 전세기간 만료 후 돈을 갚지 않고 자신이 직접 집주인으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받아 다른 데 사용한 혐의(배임)로 기소된 세입자 A(36)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수원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2015도5665).
A씨는 2011년 7월 집주인 C씨의 경기 용인시 아파트를 2년간 전세보증금 1억6000만 원에 전세계약을 체결하고, 그 무렵 B캐피털에 전세보증금 대출을 신청해 1억2000만 원을 빌렸다. B캐피털은 A씨의 대출금에 대한 담보로 C씨의 전세보증금 반환청구 채권 전부에 질권을 설정했다. 이에 따라 B캐피털은 채무자 A씨가 대출금을 변제하지 않을 경우 전세보증금 반환의무자인 C씨에게 우선변제받을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2013년 7월 전세기간이 만료된 A씨는 이사를 가면서 새로 들어오는 세입자에게 전세보증금 명목으로 8900여만 원을 송금받고, 집주인 C씨에게 나머지 금액을 받은 후 B캐피털에 대출금을 변제하지 않았다. 이에 B캐피털은 “A씨가 담보를 무단으로 인출해 손해를 봤다”며 A씨를 고소했고 검찰은 배임 혐의를 적용해 A씨를 기소했다. 1·2심은 “차용인과 대여인 사이에 권리 질권 설정계약을 체결한 경우 차용인은 권리 질권이라는 대여인 재산의 보호 또는 관리를 위해 협력해야 하는 지위에 있다”면서 A씨의 배임 혐의를 유죄로 판단해 징역 1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배임죄는 다른 사람에게 실질적인 손해를 끼치거나 현실적인 손해 발생의 위험이 예상되는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다”며 “A씨가 집주인으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받아 임의로 소비했어도 B캐피털은 질권 설정에 동의한 집주인 C씨에게 채무변제를 청구할 수 있기 때문에 B캐피털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볼 수 없다”고 보고 배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질권자인 B캐피털은 여전히 집주인 C씨를 상대로 설정된 질권에 기초해 전세보증금 반환을 청구할 수 있기 때문에 손해가 생긴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이었다.
이 사건의 경우 집주인 C씨는 B캐피털 측에 담보대출금을 대위변제한 이후 세입자 A씨로부터 다시 그 돈을 받아야 한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배임죄 성립과 관련해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에 해당하는 경우를 엄격히 해석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세입자가 전세보증금 담보대출을 받은 경우 집주인은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함부로 반환했다가는 담보대출금을 대신 무는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