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45년 후’의 원작은 데이비드 콘스턴트의 소설 ‘다른 나라에서(In Another Country)’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케이트(샬럿 램플링 분)와 제프(톰 코트니 분)는 결혼 45주년을 맞아 성대한 기념 파티를 계획한다. 대개 파티는 10년 주기로 이뤄지지만 이 부부의 40주년 때 남편 제프가 생사를 오갔기에 미룰 수밖에 없었다. 케이트와 제프는, 그러니까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눴고 죽을 고비까지 함께 넘기며 45년 시간을 함께해온 부부다.
그런데 파티를 일주일 앞둔 어느 날 남편에게 외국어로 된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편지에는 어떤 이의 시신이 언 채로 발견됐다는 소식이 쓰여 있다. 스위스 산맥에서 실족한 뒤 사라졌던 남편의 첫사랑, 그의 시신이 얼음에 갇힌 채 발견된 것이다.
문제는 케이트가 남편에게 그런 첫사랑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는 점이다. 더 심각한 것은 편지를 받은 후 남편이 잃어버린 연인에 대한 그리움에 푹 빠져버렸다는 사실이다. 케이트는 처음엔 그 상실감에 동참해 남편을 위로한다. 하지만 점점 자신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와 대결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남편의 첫사랑은 이미 세상을 떠났을 뿐 아니라 여전히 20대에 머물러 있다. 스위스에 곱게 빙장된 첫사랑은 여전히 젊디젊은 ‘그녀’로 남편의 뇌리에 각인돼 있다. 결코 변하지 않는다. 반면 거울에 비친 아내, 케이트는 늙고 변했다. 이는 회복할 수 없는 세월의 대가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갈등은 사진이라는 소재를 통해 증폭되고 폭발한다. 케이트는 사진 찍기를 즐기지 않는다. 게다가 아이를 낳지 않았기에 두 사람 사이엔 다른 사람처럼 기념하거나 기록할 일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편지를 받은 후 남편은 밤마다 다락방에 올라가 뭔가를 찾는다. 알고 보니 제프는 첫사랑의 사진을 아직 간직하고 있었고, 밤마다 그것을 찾아내 다시 보고 있었다. 심지어 사진 속 여인의 배는 만삭으로 부풀어 있다. 즉 제프는 첫사랑과의 사이에 아이를 가졌던 것이다.
말하자면 첫사랑 여인은 45년간 케이트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제프의 모습을 알고 있고, 또 갖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케이트가 45년간 알아온 제프의 모습은 진짜 제프가 아닐지도 모른다. 45년간 결혼생활 전체가 어쩌면 허구이자 연기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파국이 기다리는 것일까.
가장 끔찍한 것은 이런 일들을 겪고 난 후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45주년 기념파티가 열린다는 점이다. 파국도, 파멸도, 결별이나 싸움도 없이 남편은 축사를 읊고 아내 케이트에게 또 한 번 변함없는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이미 이들 삶에는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겼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케이트에게 남편은 그 어떤 타인보다 낯선 사람이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지만 부부는 돌아서면 남이라고도 한다. 꼭 부부만 그럴까. 세상을 구성하는 수많은 관계 가운데 과연 진짜 ‘나’와 ‘너’가 만나는, 그런 완전한 결합이 있기는 할까. 삶에 대한 깊은 허무와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작품, ‘45년 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