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총선에 나타난 민의는 양당체제의 종언이었다. 국민은 19대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넘겼던 원내 제1당 새누리당을 과반 이하 원내 제2당으로 끌어내렸다. 국민이 박근혜 정부와 여당을 심판한 결과였다. 그에 비해 더불어민주당(더민주당)은 야권분열 상황에서도 123석을 얻어 원내 제1당에 올랐다. 하지만 주요 지지기반인 호남에서 참패함으로써 기성 질서에 안주해온 행태에 철퇴를 맞았다. 신생 정당 국민의당은 정당 지지율 2위를 기록하고 의석 38석을 확보하는 등 외견상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수도권에서 단 2석을 얻는 데 그쳐 미생(未生)이란 한계를 드러냈다. 이 같은 절묘한 총선 결과는 어느 정당도 ‘승리’를 입에 올릴 수 없게 만들었고, ‘승리한 것은 오직 국민뿐’이란 결론에 이르게 했다. 과연 국민은 승리했을까.
총선 후 한 달. 여야 정당이 국민 앞에 선보이는 모습은 ‘총선=국민 승리’란 얘기가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
혁신위 방패 삼아 혁신 거부한 친박계
5월 11일 새누리당은 정진석 원내대표 등 원내 지도부와 4선 이상 중진의원 연석회의를 열어 차기 전당대회까지 정 원내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별도로 당 쇄신안 마련을 위한 혁신위원회(혁신위) 구성을 결의했다. 총선 패배 이후 당내 비박(비박근혜)계에서 요구해온 혁신형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구성을 사실상 거부한 것. 총선 이후 새누리당은 전직 총리 및 국회의장 등 여러 명망가를 비대위원장으로 영입하고자 접촉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결론은 범친박(친박근혜)계 정진석 비대위 체제였다. 그 대신 외부 인사를 혁신위원장으로 기능을 축소해 영입하기로 했다. 정진석 비대위-외부 인사 혁신위 투트랙 추진에 대해 새누리당 안팎에서는 친박계의 당권 장악 시도라는 얘기가 나온다. 김형준 명지대 교양학부 교수는 정 원내대표가 비대위원장을 겸하기로 결정한 11일 “새누리당에 더는 희망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원내대표가 비대위원장을 겸하고, 외부 인사에게 혁신위원장을 맡겨 혁신안을 짜게 하겠다는 것은 현 체제에 변화를 주지 않겠다는 ‘꼼수’다. 이대로 적당히 죽겠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
다음은 5월 11일 김 교수와 전화통화한 내용을 일문일답으로 요약한 것.
▼ 총선 이후 새누리당이 달라지고 있다고 보나.
“20대 총선 결과에 나타난 국민적 공감대는 정부 여당에 대한 심판이었다. 새누리당이 국민의 냉혹한 평가를 받은 지 한 달이 다 되도록 새누리당에서는 ‘살겠다’는 절박함도, 치열함도 찾아볼 수 없다. 청와대에 예속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저항조차 없다. 이대로 서서히 죽어간다고 볼 수밖에 없다.”
▼ 외부 인사를 영입해 혁신위를 구성하겠다고 하는데.
“당내에 친박계가 60~70%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전권을 쥔 비대위원장도 아닌 혁신안을 마련할 혁신위원장이 당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겠나. ‘혁신위를 꾸려 혁신안을 만들면 국민에게 혁신하는 것으로 비치겠지’라는 혁신위 과대망상에 빠져 있는 것 같다.”
▼ 새누리당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총선 참패로 새누리당은 당의 존립 자체가 흔들렸다. 하루빨리 전당대회를 열어 새 인물을 발굴하고 비전을 제시해 당이 실질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국민이 체감케 해야 한다. 뒤틀리고 왜곡된 정당체제를 바꾸기 위해, 무엇보다 친박과 비박 간 계파 싸움에서 탈피하기 위해 ‘중앙당 폐지’ 같은 충격 요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총선 민의에 대한 배신
새누리당 일각에서는 정진석 비대위 체제 불가피론도 없지 않다. 더민주당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경우 총선 직전 영입돼 공천을 주도했기 때문에 ‘비대위=비상대권’이라는 등식이 성립했지만, 총선 참패 이후 흐트러진 당의 전열을 재정비하고자 구성되는 새누리당 비대위는 그 기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마땅한 비대위원장감을 외부에서 모셔오는 것도 어렵지만, 막상 모셔와도 제 실력을 발휘하기 힘들다는 현실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새누리당 한 관계자는 “정 원내대표가 비대위원장을 겸하는 것이 전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비상대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인사권, 특히 공천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범친박계로 알려진 정 원내대표가 비대위원장을 겸해 비상대권을 거머쥔 것에 대해 당 안팎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이숙현 시사칼럼니스트는 “새누리당이 관리형 비대위와 독립 혁신위라는 투트랙 체제로 당을 재편하기로 한 것은 ‘친박과 비박 간 계파 갈등을 없애고 혁신하라’는 총선 민의에 대한 배신”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비박계가 외부 인사가 전권을 행사하는 혁신형 비대위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범친박계인 정 원내대표가 비대위원장을 겸하도록 한 것은 새누리당 의사 결정에 친박의 입김이 여전하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정진석 비대위 체제는 16년 만에 여소야대를 만든 총선 결과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지 않으려는 청와대의 인식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고 덧붙였다.
최정묵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부소장도 “박근혜 정부에 대한 견제 여론이 총선 민심으로 나타났지만, 총선 이후 지도체제를 친박계인 정진석 원내대표로 마침표를 찍었다”며 “새누리당이 탄성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 부소장은 “총선 패배의 충격이 너무 커서 개혁보다 보수 분열에 따른 재집권 실패라는 불안감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면서 “정진석 비대위 체제의 출범에는 준비된 인물이 많지 않다는 당내 사정도 한몫했다”고 풀이했다.
20대 총선에서 원내 제1당에 오른 더민주당은 20대 국회 개원 전부터 19개월 뒤 치를 2017년 대통령선거(대선) 진용 갖추기에 여념이 없다. 5월 4일 결선 투표 끝에 원내대표에 오른 더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는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가까운 박완주 의원을 원내수석부대표에 임명하고,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낸 기동민 당선인을 원내대변인에 앉혔다. 또한 대구 출신 이재정 당선인을 원내대변인으로 임명함으로써 대구 수성갑 당선 이후 차기주자로 부상한 김부겸 당선인을 배려했다. 5월 8일 발표한 11명의 원내부대표 가운데는 차기 대선주자들의 측근이 적잖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에 근무한 강병원, 최인호 당선인, 그리고 문재인 전 대표가 영입한 문미옥 당선인 등 3명이 친문재인계로 분류되고, 김병욱 당선인의 경우 전남 강진에 셀프 유배 중인 손학규 전 지사가 선거운동 기간에 일부러 찾아와 응원했을 만큼 가깝다.
거간꾼 오해 자초한 국민의당
우 원내대표는 “당의 대선후보들과 소통할 수 있는 분을 고루 배치했다”면서 “작은 이견이 큰 오해로 번지는 것을 막겠다”고 차기 대선주자 측근들을 부대표로 임명한 배경을 밝혔다.그러나 대선용 원내 지도부 구성에 대해 당 안팎에서는 ‘적절한 인선’이라는 호평보다 “지나치게 대선을 의식한 인선이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가 더 크다.
더민주당 한 인사는 “대선용 원내 지도부 구성이 대선 경선 때 당내 분란의 여지를 줄일 수 있을지 몰라도 오히려 대선용 지도부 구성이 국민적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2012년 총선 때 ‘낙동강 벨트’ 공략을 전면에 내세웠다 오히려 PK(부산·경남) 민심의 역풍을 경험하지 않았느냐”며 “원내 제1당이 된 우리 당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차기 주자와 가까운 이들로 지도부를 구성하는 ‘형식’보다 어떤 정책과 입법으로 더 많은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확보할 수 있을지 ‘내용’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당의 원내 활동이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자연스럽게 국민 마음속을 파고들어야 내년 대선 전망도 밝아지는데. 이번 원내 지도부 구성은 파열음을 예방하려는 대선 경선 관리에 너무 치우친 느낌”이라고 말했다.
양당체제를 극복하겠다던 신생 정당 국민의당은 총선 이후 당내 인사들이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둔 ‘연정’을 입에 올리고, 원내대표로 합의추대된 박지원 원내대표가 취임 일성으로 ‘국회의장 새누리당 양보설’을 흘리는 등 총선 민의 왜곡에 앞장선다는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박 원내대표는 5월 11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스스로 ‘대권 도전’ 뜻을 밝히기도 했다. 김형준 교수는 “국민의당이 총선에서 정당 득표 2위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에 걸맞은 참신한 인사가 몇이나 되나”라면서 “박지원, 정동영, 천정배 등이 요직을 차지한 상황에서 ‘새 정치’라고 봐줄 국민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말했다. 김 교수는 “(국민의당이) 총선 민의를 지금처럼 관대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모습을 계속 보이면 정당 지지율 하락 추세를 막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회는 지금 알짜 상임위 쟁탈전5월 11일 새누리당,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등 3당 원내대표, 정책위의장, 원내수석부대표 등 9명의 상견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20대 국회 원 구성 협상이 시작됐다. 3당 원내대표 협상에서 국회의장,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위원장 등 상임위원회(상임위) 구성 및 위원장 배분 같은 원 구성의 큰 틀이 정해지는 것과 별개로 각 당에서는 알짜 상임위원에 진출하려고 치열한 물밑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경쟁률이 가장 치열한 상임위는 국토교통위원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교문위) 등 이른바 빅3. 이들 세 상임위는 19대 국회에서 상임위원 정수가 국토교통위 31명, 산업통상자원위, 교문위 각각 30명으로 가장 많았다. 법사위, 환경노동위원회, 여성가족위원회(16명) 위원 수의 2배에 육박하고, 전체 상임위 가운데 위원 수가 가장 적은 정보위원회(12명)보다 2.5배 정도 많다.
의원들이 이들 상임위를 선호하는 이유는 상임위 활동이 지역 주민에게 어필하기 쉽다는 점 때문. 국토교통부를 관장하는 국토교통위는 도로 확충, 지하철 연장 등 사회간접자본시설 투자 확보가 용이하고, 산업통상자원위의 경우 지역 내 산업단지 등의 투자 유치를 유도할 수 있어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강점을 지닌다. 특히 알짜 상임위 가운데서도 으뜸은 교문위다. 유권자의 관심이 가장 높은 교육 문제를 다룰 뿐 아니라 지역 내 가시적인 문화, 체육행사 등과 연관이 깊은 문화체육관광부를 관장하고 있기 때문.
20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여야는 원구성 협상 개시와 동시에 소속 의원들에게 상임위 배분을 위한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이 가운데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와 국민의당 안철수 공동대표가 모두 교문위를 희망 상임위로 꼽아 눈길을 끈다. 특히 안 대표의 경우 교문위를 1지망에 기재하고 2, 3순위는 비운 채 제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회 주변에서 화제가 됐다. 사실상 교문위 진출을 확정한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 더민주당 한 관계자는 “상임위를 배정할 때 국회에 처음 입성한 초선 당선인을 배려해 희망하는 상임위에 먼저 배치하고, 다선 중진과 당 지도부는 초선들이 기피하는 상임위를 맡는 게 일반적인데, 당 지도부가 먼저 원하는 상임위를 밝히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