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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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회초리 꺾고 盧 코드로 완벽 변신

김창호 국정홍보처장 운동권 투사에서 언론에 칼 휘두르기까지

  •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7-06-07 11: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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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판 회초리 꺾고 盧 코드로 완벽 변신

    약력<br>● 배문고, 서울대 철학과 석·박사<br>● 서울대 명지대 한국외대 등 시간강사<br>● 중앙일보 학술전문기자<br>● 명지대 디지털미디어과 교수<br>● 現 국정홍보처장

    “이장하느라 고향 울진에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일제 말기에 친일을 강제받아 병을 핑계로 피해 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6·25전쟁 당시 피란을 거부했다 부역죄로 미군에 처형당한 외할아버지와 연좌제로 고생한 외갓집, 지주였지만 근대 공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아버지 등 이번 이장으로 어두웠던 과거사를 밝은 공간으로 옮기고자 합니다.”

    2004년 4월28일 김창호(51) 국정홍보처장이 지인들에게 보낸 e메일 내용 중 일부다. 당시 중앙일보 학술전문기자로 재직 중이던 김 처장은 이처럼 자신의 일상사와 함께 세상 돌아가는 일들에 대한 단상을 정리해 비정기적으로 지인들에게 e메일을 보내곤 했다. 김 처장 나름의 인맥관리와 대학 운동권 시절부터 이어온 가까운 사람들과의 사상적 공유를 위한 방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김 처장의 e메일 횟수가 급격히 줄기 시작했고, 급기야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변했다”는 것이 절친했던 여러 친구와 선후배들의 말이다. 그 시기가 국정홍보처장이 된 이후라는 것도 일치한다.

    박정희 타도와 사회혁명 꿈꾸던 대학생

    요즘 김 처장은 기자실 통폐합에 앞장서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기사송고실 폐지 방안까지 준비 중이다.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국정홍보처라는 조직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김 처장 소신에 따른 행동일 가능성도 높다.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김 처장의 성격에 비춰본다면 신념에 반하는 일을 억지로 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신념과 정신세계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일까. 지인들이 전하는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보자.



    김 처장은 본인이 언급한 것처럼, 지주였지만 근대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아버지 밑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그의 가족은 고향인 경북 울진을 떠나 서울로 이사했다. 가족이 둥지를 튼 곳은 서울 성북구 월곡동 방 두 칸짜리 20평형대 아파트. 그곳에서 다섯 형제와 부모, 할머니까지 함께 살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형제들이 다 똑똑했다는 점. 김 처장의 형 승호 씨는 가정형편 때문에 대경상고 야간을 다녔지만 서울대 상대에 들어갔다. 대경상고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고. 승호 씨는 그후 노동운동계에 투신해 지금까지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 노동운동계에선 신화적인 존재로 꼽힌다. 김 처장 자신도 배문고를 나와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한 수재다. 김 처장이 운동권에 뛰어든 것은 형의 영향이 컸다. 김 처장의 한 대학 친구 말이다.

    “창호는 형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세상 보는 눈을 떴다. 어두웠던 유신체제의 정치·경제적 의미에 대한 인식이 동기들보다 늘 앞서 있었다.”

    김 처장이 대학생이던 70년대 후반은 유신체제의 막바지로 독재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수많은 운동권 학생들이 긴급조치법 9호에 엮여 구속되고 고문을 받았다. 그 시기 ‘국제경제학회’(국경회)라는 운동권 조직을 이끌던 김 처장은 학과별 학습조직들이 연대한 ‘연합언더조직’의 리더 3인방 중 한 명이었다.

    당시 김 처장이 꿈꾸던 것은 박정희 정권 타도와 사회혁명이었다. 김 처장의 친구와 선후배들은 당시 김 처장을 ‘젊고 활동적인 투사’로 기억했다. 이들은 김 처장에 대해 “어떤 사안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기보다는 판단을 빨리 내리고, 결단하면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스타일”이라고 기억했다.

    비판 회초리 꺾고 盧 코드로 완벽 변신

    2005년 4월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왼쪽)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기 위해 조기숙 홍보수석과 청와대 회의실에 들어서고 있다.

    한 후배는 “카리스마가 있으면서 권력의지 같은 것도 가지고 있었다. 그 점이 김 선배를 볼 때마다 걱정스러웠던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캠퍼스에서 독재와의 싸움이 치열했던 1978년 말, 대학 3학년이던 김 처장은 홀연히 군에 입대해 선후배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가 왜 갑자기 군에 들어갔는지에 대해선 내막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김 처장의 군 입대 사건은 주변 사람들에게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혹 가운데 하나다. 당시 김 처장과 비슷한 시기에 군 입대한 사회학과 정모 씨는 이후 운동권 선후배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살아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변 사람들 “스스로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

    김 처장은 군 제대 후 대학원에 진학해 석·박사 과정을 거치면서 진보적 성향의 학자들 모임인 학술단체협의회(학단협) 결성과 활동에 주력했다.

    김 처장의 이념 성향과 사고의 틀은 1994년 중앙일보에 문화부 기자로 입사한 이후까지 크게 변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앙일보 내에서는 신문 논조가 극우보수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진보학계 목소리를 담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기자 시절 우리나라 지식사회의 계보를 특집기획물로 보도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중앙일보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지만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전언이다.

    그 시절 김 처장은 참여정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가 지인들에게 보낸 e메일에서 그 편린들이 발견된다. 다음은 2003년 7월22일에 발송된 e메일 내용 중 일부다.

    “지금 현 정부는 도덕주의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게 아닌가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정치권력에 도덕군자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적절한 전략적 사고를 통해 사회적 지향을 실현하는 것이지, ‘깨끗한 정치’ ‘도덕적 권력’ 같은 도덕주의에 의존하는 것은 스스로 정치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아마추어리즘, 희화화도 바로 이런 전략의 부재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김 처장은 보이지 않을 만큼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김 처장이 2004년 7월 보낸 e메일을 보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의 비약이 발견된다. 성균관대 교수임용 로비를 폭로한 정모 교수의 행위를 다분히 정치적인 행위로 평가한 것. 김 처장은 “본인도 신문사에 입사하기 전 교수임용 청탁을 한 적이 있다”고 밝히면서 “교수임용을 위해 학맥과 지역, 심지어 외국유학 동문 등 연줄 닿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은 상례가 아니냐”고 반문하기까지 했다.

    2005년 2월 중앙일보를 그만두고 명지대 교수로 자리를 옮긴 김 처장은 한 달도 채 안 된 그해 3월 국정홍보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현 정부에 대한 김 처장의 시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처장이 된 지 100일 정도 지난 2005년 7월1일 그가 지인들에게 보낸 e메일 제목은 ‘왜 그들은 아마추어리즘을 말하는가’다. 여기에서 김 처장은 이렇게 적고 있다.

    “왜 일부 지식인과 언론은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라벨을 붙이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허구적인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낡은 관점을 은폐하고 새로운 비전의 정당성을 훼손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 처장의 이런 변화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언급을 피했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말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다만 몇몇 사람들은 익명을 전제로 비슷한 평가를 내렸다. “변했지만, 그 스스로는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

    “김 처장은 신념이 강한 사람이다. 노 대통령이 시킨다고 해서 할 사람이 아니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해야 행동으로 옮기고, 고집이 세서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도 않는다. 한판승부를 좋아하고 또 잘한다. 그 점에서 노 대통령과 닮았다. 요즘 ‘역시 김창호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한 대학 동기의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 “정말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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