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인 총선 성적표를 받아 든 청와대는 장고에 잠겼다.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국회와의 스킨십 강화, 내각과 참모진에 대한 인적 쇄신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오가지만 “이렇다 할 그림은 잡히지 않는다”는 게 대체적인 속내. 5월 1일 이란을 국빈 방문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출국하기 전 얼개를 만들어 ‘결심’을 받고, 귀국 후 이를 공식화한다는 시간표만 설정돼 있을 따름이다.
청와대를 가장 곤혹스럽게 만드는 부분은 특히 인적 쇄신. 일각에서는 임기 초부터 자리를 지켜온 몇몇 ‘장수 장관’을 교체하는 방안을 거론하고 있으나, 야권이 다수를 차지한 20대 국회에서 인준청문회를 통과하는 일부터 만만치 않은 까닭이다. ‘대통령이 달라졌다’는 메시지를 명확히 전달하려면 이병기 대통령비서실 비서실장을 필두로 하는 청와대 참모진에 대한 큰 폭의 개각이 가장 확실하지만, 미처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마땅한 인물을 찾는 작업 역시 간단치 않다는 토로도 흘러나온다. ‘바꾸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바꿀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이야기다.
4월 18일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남긴 메시지가 어정쩡해 보이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라는 게 정통한 인사들의 해석이다. “국정 최우선 순위를 민생에 두고 경제발전과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마무리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자 한다”는 핵심 문장에서는 경제정책에서 지금까지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묻어난다. 이를 한층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외교안보 관련 대목. “안보와 남북문제 등에서는 여야와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모두가 하나가 돼야 할 것”이라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더민주, 국방위 지원자 0명”
역설적으로 대통령과 청와대의 이러한 상황 판단을 가능케 하는 가장 큰 배경은 20대 국회의원들의 면면이다. 특히 외교안보 사안에서 뚜렷한 전문성이나 식견을 가진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 뒤집어 말해 이들 사안을 정국의 주요 의제로 밀어 올릴 ‘자원’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의미다. 통상 전직 외교관료나 군당국자를 비례대표로 영입해 해당 분야 상임위원회(상임위)에 배치하는 게 그간 주요 정당의 인재풀 확보 방법이었지만, 이번 총선에서는 이러한 공식이 사실상 붕괴했다는 것이다.먼저 새누리당부터 살펴보자. 비례대표 명단만 살펴보면 2번을 받았던 이종명 예비역 대령이 눈에 띄지만 안보정책을 총괄할 만한 경력과는 거리가 있다는 게 중평. 총선을 앞두고 안보 공약 발표를 맡았던 신원식 전 합동참모본부 차장의 경우 비례대표 22번으로 당선권에 들지 못했다. 송영근, 황진하 등 19대에서 자리를 지켰던 상당수 군 출신 의원은 일찌감치 불출마를 선언했거나 지역에서 낙선했고, 외교관료 출신으로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낸 김종훈 의원도 고배를 마셨다. 해군 제독 출신으로 재선에 성공한 김성찬 의원과 국방부 차관을 지낸 백승주 당선인 정도가 전부인 셈이다.
더불어민주당(더민주당)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대표적인 영입 케이스로 비례대표 15번을 받았던 이수혁 전 6자회담 수석대표가 당선권에 들지 못한 것. 진성준, 백군기, 김광진 등 19대 국방위원회에서 활약했던 의원들이 재선 고지를 넘지 못한 데다, 남북문제에 오랜 기간 관심을 가져온 의원 상당수는 국민의당으로 빠져나갔다. 4월 중순 123명 당선인 전원을 대상으로 진행된 배정 희망 상임위 조사에서 국방위원회를 지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의당의 경우 전문가 출신 비례대표로는 예비역 육군 준장인 김중로 당선인이 있고,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동영 당선인과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메신저 노릇을 했던 박지원 의원이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과 관련해 비판에 나설 공산이 있다. 오히려 이번 총선 결과를 통틀어 안보부처 안팎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정의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하는 김종대 당선인. 노무현 정부 청와대 행정관과 국방부 장관 정책보좌관을 지낸 경력을 바탕으로 방위산업 비리나 병영문화 같은 이슈에서 날카로운 목소리를 낼 것이라는 게 여의도와 군당국 주변의 공통적인 평가다.
북핵 문제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등 관련 현안이 즐비하던 최근 현실을 감안하면 안보 분야에 전문성이나 관심이 깊은 국회의원 수가 대폭 줄어든 상황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 그러나 대다수 여의도 정치권 인사는 관련 현안이 득표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민심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라고 풀이한다. 해당 분야 전문가를 떠들썩하게 영입해 세를 과시하던 이전 총선과 달리 이번에는 당선이 불분명한 비례대표 하위순번을 배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총선 직후 일부 안보부처 당국자는 대승을 거둔 야권이 개성공단 폐쇄 등 박근혜 정부의 대북 강경노선을 본격적으로 견제하고 나설 것이라는 예측을 내놨지만, 정작 야권 정책통 인사들의 속내는 사뭇 다르다. 대화와 협상을 기조로 하는 유화적 대북정책에 대해 국민적 지지도가 높지 않다 보니 아예 관련 이슈가 주요 의제로 떠오르는 일 자체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 이러한 분위기는 더민주당과 국민의당 모두 1년 8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선거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가까스로 끌어들인 보수층 유권자의 표심을 ‘햇볕정책 부활’이라는 원론적 구호로 까먹고 싶지 않다는 속내가 강하게 묻어난다.
“10월 첫 국감 유명무실해질 수도”
상황을 여기까지 정리해놓고 나면, 20대 총선이 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에 이렇다 할 변수가 될 공산은 커 보이지 않는다. 청와대 스스로 변화를 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는 데다 야권 내에서도 역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설 기미는 찾을 수 없기 때문. 반면 이러한 기류가 안보 현안에 대한 정책토론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순한 정치적 유불리로만 따질 수는 없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한 전직 고위당국자는 “20대 국회의 외교안보 실종 사태는 관련 현안이 국민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방증”이라며 “우려할 만한 사안”이라고 말했다.당장 관련 상임위 배정을 희망하는 의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초선의원으로 채워질 공산이 크고, 그나마 구성 자체가 5월 30일 20대 국회 개원 후에도 한참 밀릴 수 있다는 관측마저 나온다. 한 야권 관계자는 “10월 국정감사 직전에서야 상임위 구성이 완료돼 부랴부랴 준비하느라 안보 분야 국감이 사실상 유명무실해질 수도 있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방위산업 비리와 대형 무기도입사업 등 감시 및 견제가 필수적인 분야에서마저 국회의 기능이 흔들릴 수 있다는 염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