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좋아하는 미국인 친구에게 미국을 대표하는 와인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진판델(Zinfandel)이라고 대답했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나파밸리(Napa Valley)의 카베르네 소비뇽이라는 대답을 기대하던 나는 잠시 의아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세계에서 진판델을 가장 사랑하고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기 때문이다.
진판델은 14년 전까지만 해도 유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포도 품종이었다. 1820년대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어떤 품종인지 명확한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판델은 마치 캘리포니아가 제 고향인 양 왕성한 생명력과 풍성한 과실로 오랫동안 이어지던 미국인의 와인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줬다. 특히 1970년대 초 진판델로 만든 로제 와인, 화이트 진판델(White Zinfandel)은 큰 붐을 일으켰다. 화이트 진판델은 포도즙이 너무 붉어지기 전 껍질을 분리해 연한 분홍색을 얻고, 포도즙의 당분이 전부 알코올로 변하기 전 발효를 멈추게 해서 만든 와인이다. 기존 진판델 와인과 달리 알코올 도수가 낮고 상큼한 과일향을 듬뿍 담은 달콤한 스타일이다.
소비자는 편하게 마실 수 있는 화이트 진판델을 좋아했지만 와인 평론가들은 “맛이 너무 단순하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빠르게 성장하는 카베르네 소비뇽의 인기 또한 진판델의 입지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진판델이 포도밭에서 축출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미국 소비자의 화이트 진판델에 대한 부단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리고 1990년대 말 살아남은 진판델은 고목이 돼 화이트 진판델과는 완전히 다른 고급스러운 레드 와인, 올드 바인 진판델(Old Vine Zinfandel)로 다시 한 번 미국 와인시장을 제패했다.
포도는 대개 수령이 15~20년 되면 노년기로 접어들지만 진판델은 그 나이에도 여전히 청소년이다. 30년이 채 안 된 진판델은 넝쿨만 왕성하게 뻗을 뿐 포도의 복합미는 떨어진다. 30~50년쯤 돼 중년에 접어들어야 포도의 맛과 향이 좋아지고, 더 나이가 들면 수확량은 급격히 줄지만 과실 맛은 월등히 좋아진다. 올드 바인 진판델은 수령이 50년 넘는 진판델로 만든다. 블루베리, 체리, 자두가 뒤섞인 농밀한 과일향에 커피, 담배, 후추의 매콤함이 어우러져 있고,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태양을 머금은 듯한 묵직함이 매력적이다. 수많은 고급 와인과 수입 와인 속에서 소비자가 화이트 진판델을 외면했다면 와이너리들은 가차 없이 진판델을 뽑아내고 다른 품종을 심었을 테고, 우리는 결코 올드 바인 진판델의 멋진 맛과 향을 즐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2002년 드디어 진판델의 유래가 밝혀졌다. DNA 검사 결과 진판델은 크로아티아에서 거의 멸종 상태인 츠를레나크 카슈텔란스키(Crljenak Kasˇtelanski), 그리고 이탈리아 풀리아(Puglia) 지방에서 명맥을 유지하는 프리미티보(Primitivo)와 같은 품종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진판델의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진판델은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자랑스러운 미국인의 와인이기 때문이다. 화이트 진판델처럼 단순한 와인이든, 올드 바인 진판델처럼 고급스러운 와인이든 모두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진판델의 200년 역사는 편견 없이 와인을 즐길 때 와인이 우리에게 얼마나 더 큰 기쁨을 줄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