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을 새로 사거나 바꾸면 의식을 치르듯 애플리케이션(앱)을 깐다. 카카오톡부터 남들이 쓴다기에 흘깃 훔쳐보고 메모한 앱까지. 깔아야 하는 앱 목록에 자신의 취향을 반영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김영세 이노디자인 회장은 “나는 앱을 깔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깔아도 쓸 시간이 없고.”
김 회장을 두고 누구는 미국에서 산다고 하고, 누구는 한국에서 산다고 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김 회장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6개월씩 머문다. 시차 적응의 고단함은 “힘든 축에 들지 않는다”며 “지금도 여전히 바쁘게 산다”고 했다.‘혁신’. 김 회장을 따라다니는 단어이자 그가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다. 그의 회사 이노디자인은 혁신을 뜻하는 영어 단어 이노베이션에서 따왔다. 1980년대 세운 이 회사는 산업디자인 전문회사로, 의뢰받은 제품마다 변화를 줘 산업계에 충격을 안겼다. 아모레퍼시픽 라네즈 슬라이딩 팩트, 삼성전자 가로본능 휴대전화, 전성기 아이리버의 MP3 플레이어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상품이다. 이 밖에도 서울지하철 4호선 이촌역과 국립중앙박물관을 잇는 지하보도 ‘박물관 나들길’에 롯데월드몰까지 영역을 넘나드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최근에는 스타트업과 제휴를 맺고 제품 디자인을 함께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성남산업진흥재단, 프랑스 3D(3차원) 캐드 소프트웨어 기업 다쏘시스템, 이스라엘 벤처캐피털 요즈마그룹 등과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정말 김 회장은 그의 말대로 앱을 깔 시간조차 없을 만큼 바쁘다. 김 회장은 예순여섯이란 나이가 무색할 만큼 손에서 스마트폰을 떼지 않는다.
“휴대전화는 내게 대단한 무기예요. 이걸로 얻는 정보가 엄청나죠. 비행기에서, 집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나 한가로울 때 이걸 붙잡고 다섯 시간, 열 시간 책을 씁니다. 종이에 그린 아이디어는 사진으로 찍고요.”
스마트폰은 아이디어로 가득한 그의 뇌를 백업하는 기기이자 정보를 얻고 자기 생각을 전파하는 창구인 셈이다.
앱 메모, 사진, e메일, 트위터
스마트폰을 알차게 쓰는 김 회장이지만 사용하는 앱은 단순하고 간단하기 그지없다. 메모와 카메라, 사진, e메일, 트위터. 전화와 문자메시지까지 더해도 쓰는 앱이 10개를 넘지 않는다. 트위터를 빼고 모두 스마트폰에 기본으로 깔린 앱이다. 그 때문에 바탕화면은 새로 샀을 때 모습 그대로다.메모 앱은 김 회장에게 저작 도구다. 올여름 나올 새로운 책의 원고를 스마트폰으로 쓰고 있다. 그가 1980년대 창업을 결심하던 때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인재들의 이야기가 그의 스마트폰 메모 앱에 저장돼 있다. 메모 하나에 A4 30~40쪽 분량. 한번은 저녁에 시작해 다음 날 아침까지 글을 썼단다. 그의 원고를 잠깐 엿봤는데 오탈자가 없다. 김 회장은 컴퓨터보다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것이 더 익숙하다며 웃는다.
메모 앱이 김 회장의 아이디어를 텍스트로 저장하는 도구이면, 카메라와 사진 앱은 이미지로 저장하는 도구다. 그는 디자인을 스케치한 종이에 날짜를 쓴 뒤 그걸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어 저장한다. 이 작업은 주로 비행기 안에서 한다. 항공사 직원들이 알아볼 정도로 김 회장은 비행기를 자주 탄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열 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이 그에겐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귀중한 시간이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반드시 그려야 해요. 참을 수 없거든요.”
김 회장은 거추장스러운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지 않고 그때그때 종이를 구해 스케치하는데, A4 용지를 구하지 못하면 비행기 기내식에 깔려 나오는 종이라도 사용한다. 그의 이런 습관을 아는 한 항공사가 그에게 스케치북을 선물했다. 그는 “승무원에게 늘 종이를 달라고 귀찮게 한 게 자랑거리는 아닌 것 같은데”라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김 회장은 사진으로 찍어 저장한 디자인을 곧바로 한국과 미국 이노디자인 직원에게 발송한다. 스케치한 디자인이 진화해 제품이 되는 과정도 스마트폰에 저장해 수시로 점검한다. 초청 연설과 해외 전시 참여 등으로 사무실을 비울 때가 잦은 그에게 스마트폰은 그야말로 업무의 중심이다.
기본 앱으로 모든 업무를 처리하는 김 회장이 유일하게 깔아 쓰는 앱이 있다. 트위터다.
“디자이너는 트위터를 안 하면 안 됩니다. 세계 최신 뉴스, 기술, 디자인, 유명 인사의 말 한마디가 초 단위로 나옵니다. 최신 정보와 트렌드를 모르면 디자이너가 아니에요.”
트위터로 세계 트렌드 섭렵
트위터는 성장세가 예전만 못하고 정체기에 들어섰다고 평가받지만 여전히 세계 유수 미디어가 트위터에 뉴스를 공급한다. 또한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여러 유명 인사가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는 도구로 트위터를 쓴다. 김 회장도 트위터를 통해 자신이 발표한 내용이나 생각을 퍼뜨린다.“140자를 쓰려고 미친 듯이 고민하죠. 중요한 내용은 메모하듯이 트위터에 올려요. 여기에 쓰면 잊어버리지 않죠. 올리고 나서 보고 또 보고 그 글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요.”
김 회장은 디자이너는 리더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디자인은 제품을 장식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걸 만드는 행위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아이디어를 내놓고 그 아이디어로 제조와 유통 등 산업 전문가를 끌고 가는 게 디자이너라는 얘기다. 책만 읽고 쇼핑몰을 구경해서는 새로 탄생하는 제품을 따라잡을 수 없다. 디자이너는 이미 나온 것을 따라 내놓아선 안 되고, 누구나 예상하는 대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 디자이너다운 디자이너, 리더 같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라도 그는 트위터에서 눈을 뗄 수 없다. 2009년 9월 트위터에 가입해 그가 지금까지 올리고 공유한 글과 소식이 2만 건이 넘는다. 단순하게 계산하면 그는 하루에 10건씩 트위터에 꾸준히 글을 썼다.
김 회장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스마트폰에 그렇게 아이디어를 다 저장해두는데 잃어버리면 정말 큰일이겠다.” 요즘 유행하는 온라인 백업 서비스를 쓰는지 물어보려는 것이었다.
김 회장은 “잃어버리면 안 된다”면서도 “중요한 내용은 직원들과 미리 공유하니 문제없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하며 그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는데 비생산적인 요소를 찾을 수 없었다. 흔히 찍는 음식 사진조차 없다. 그가 인터뷰 중 언급한 중요한 아이디어는 글의 경우 트위터로 모두와 공유했고, 스케치와 이미지는 직원에게 보낸 뒤였다. 아무에게 보여주지 않고 남모르게 혼자만 갖고 있는 것이 없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단말기인데 사생활이 드러나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생산적으로만 쓰는 것이 그의 사생활이라면 사생활이겠다.
스마트폰을 예찬하는 김 회장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 작은 기기를 늘 손에 들고 책까지 쓰는데 불편하지 않으냐고. 그는 “늘 들고 있으니 팔이 아프고 저린다”고 말하면서도 그 순간 “내가 조금 전 강연한 내용을 사람들이 트위터에 올리고 있다”며 트위터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