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잘해야 대학 간다’는 인식이 팽배하면서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수학에 점점 더 집착하고 있다. 사교육의 큰 축이 영어에서 수학으로 옮아가면서 수학 교구시장도 과열되는 양상이다. 보통 교구수업은 영·유아 시기(생후 12개월부터)에 처음 시작해 초등 4학년까지 이어진다. 초등 입학과 동시에 대입을 목표로 아이를 교육시키는 학부모가 많다 보니 어느 순간 교구 수업은 유아기 때 응당 치러야 하는 코스처럼 돼버렸다.
올해 첫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A씨는 “아이가 학교에서 수학 수업을 못 따라가는 건 아니지만 주변 엄마들 얘기로 2, 3학년 올라가서 도형을 배우면 교구를 접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는 차이가 난다고 해서 늦었지만 이제라도 교구수업을 해볼 생각”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교구 한 세트로 수업을 시작하더라도 이후 ‘확장수업’을 거론하며 세트2~3개 추가 구매를 권유받게 된다. 최근 초등 2학년 자녀에게 처음으로 교구를 사줬다는 주부 B씨는 “전화로 상담할 때는 초등학생이니 최상급 단계 하나만 구매하면 된다고 했는데, 집으로 직접 상담하러 온 분은 ‘가베 세트’(점·선·면·입체로 구성된 조각을 이용해 다양한 모양을 만들 수 있는 교구)는 꼭 하는 게 좋다고 해서 2개를 같이 샀다. 합쳐서 300만 원 넘게 들었다”고 푸념했다.
일반인은 쉽게 지갑을 열기 힘든 고가임에도 너도나도 수학 교구를 구매하는 이유는 ‘수학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키워야 한다’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다. 교구업체 역시 아이의 ‘창의력·사고력 개발’을 최대 무기로 내세워 홍보한다. 한 교구업체 관계자는 “공이 굴러갈 때 나는 소리를 듣고 아이 스스로 길이 감각을 키우는 유아 단계 수업이 있는데, 억지로 숫자를 가르치지 않더라도 아이 스스로 길다 짧다, 크다 작다의 개념을 익히게 된다. 우리 교구를 활용하면 다섯 살배기 아이가 천 단위가 넘는 숫자를 나눗셈으로 계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수학의 기본은 창의력과 사고력이다. 어릴 때부터 그 부분을 건드려준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는 분명 다르다”고 말했다.
일부 업체는 교구 재질의 고급스러움을 자랑하기도 한다. 한 교구업체 관계자는 “핀란드산 자작나무와 가문비나무의 원목을 수입해 한국에서 직접 교구를 생산한다. 최고급 자재를 사용하기 때문에 아이가 입에 넣고 빨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모든 교구가 친환경 자재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페인트칠이나 가공 단계에서 화학물질이 첨가되고 원목인 경우에도 썩지 않도록 오랜 기간 방부제에 담가 놓는 경우가 있다.
교구 효과도 소비자에 따라 만족도가 크게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교구수업을 한 덕에 아이가 수학을 쉽게 익혔다”고 만족하는 학부모가 있는가 하면 “돈만 많이 들었지 효과는 없었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서울 강남구 서초동에 사는 주부 C씨는 “아이가 셋이라 첫째부터 막내까지 교구수업을 했는데, 수학을 다 잘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교구가 좋아도 아이마다 받아들이는 역량이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창의력을 키워주는 게 좋을 것 같다. 교구수업을 하면 아이가 무조건 수학을 잘할 거라는 생각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자기주도학습 전문가인 정철희 학습디자인연구소장 역시 구체물의 효용성에 무게를 싣는다. 그는 “선진교육을 보면 가정이든 학교든 구체물로 수학 개념을 익힌다. 우리가 사는 모든 세상이 수학이다. 집에서는 큰 방과 작은 방을 보며 ‘넓다 좁다’를 익힐 수 있고, 놀이터 시소에 앉아 ‘무겁다 가볍다’를, 화장실에 붙어 있는 타일과 벽지 패턴을 보면서 도형을 배울 수 있다. 심지어 스포츠 경기, 계단 오르기 등의 신체활동에도 수와 연산이 자동으로 따라온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 독일의 한 유치원에서 진행한 실험 결과를 들려줬다.
정철희 소장은 부모 스스로 아이에게 무조건 값비싼 장난감과 교구를 안겨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한다. 정 소장은 “아이 혼자 가만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 눈에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시간 아이 머릿속에서는 무한한 상상의 폭죽이 터질지 모를 일이다. 진짜 수학을 잘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수학’인 대자연 속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이 현명하다. 값비싼 교구로 수리능력이 길러진다고 믿는 건 큰 원을 그릴 줄 아는 아이에게 작은 점만 찍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꼬집었다.
*알립니다. 주간동아 1035호 발행 당시 실렸던 사진은 기사의 일부 내용과 무관해 삭제했습니다.
올해 첫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A씨는 “아이가 학교에서 수학 수업을 못 따라가는 건 아니지만 주변 엄마들 얘기로 2, 3학년 올라가서 도형을 배우면 교구를 접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는 차이가 난다고 해서 늦었지만 이제라도 교구수업을 해볼 생각”이라고 했다.
창의력과 사고력 건드려준다?
학부모들 사이에서 유명한 대형 수학 교구업체는 4~5개로, 교구 스타일과 학습 플랜은 다르지만 모두 ‘고가’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교구수업을 받으려면 먼저 교구세트를 구매해야 한다. 업체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보통 단계별 한 세트 가격이 180만 원에서 210만 원 정도. 연령대별 풀세트를 구매하면 500만 원에서 1000만 원까지 든다. 일주일에 한 번씩 교사가 집으로 찾아오는 교구수업 비용은 별도로, 매달 8만~10만 원 정도다. 1000만 원대 교구를 구매해 생후 12개월부터 초등 4학년 때까지 교구수업을 한다고 가정하면 그 비용이 대략 2200만 원. 대학 등록금과 맞먹는 액수다.처음에는 교구 한 세트로 수업을 시작하더라도 이후 ‘확장수업’을 거론하며 세트2~3개 추가 구매를 권유받게 된다. 최근 초등 2학년 자녀에게 처음으로 교구를 사줬다는 주부 B씨는 “전화로 상담할 때는 초등학생이니 최상급 단계 하나만 구매하면 된다고 했는데, 집으로 직접 상담하러 온 분은 ‘가베 세트’(점·선·면·입체로 구성된 조각을 이용해 다양한 모양을 만들 수 있는 교구)는 꼭 하는 게 좋다고 해서 2개를 같이 샀다. 합쳐서 300만 원 넘게 들었다”고 푸념했다.
일반인은 쉽게 지갑을 열기 힘든 고가임에도 너도나도 수학 교구를 구매하는 이유는 ‘수학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키워야 한다’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다. 교구업체 역시 아이의 ‘창의력·사고력 개발’을 최대 무기로 내세워 홍보한다. 한 교구업체 관계자는 “공이 굴러갈 때 나는 소리를 듣고 아이 스스로 길이 감각을 키우는 유아 단계 수업이 있는데, 억지로 숫자를 가르치지 않더라도 아이 스스로 길다 짧다, 크다 작다의 개념을 익히게 된다. 우리 교구를 활용하면 다섯 살배기 아이가 천 단위가 넘는 숫자를 나눗셈으로 계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수학의 기본은 창의력과 사고력이다. 어릴 때부터 그 부분을 건드려준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는 분명 다르다”고 말했다.
일부 업체는 교구 재질의 고급스러움을 자랑하기도 한다. 한 교구업체 관계자는 “핀란드산 자작나무와 가문비나무의 원목을 수입해 한국에서 직접 교구를 생산한다. 최고급 자재를 사용하기 때문에 아이가 입에 넣고 빨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모든 교구가 친환경 자재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페인트칠이나 가공 단계에서 화학물질이 첨가되고 원목인 경우에도 썩지 않도록 오랜 기간 방부제에 담가 놓는 경우가 있다.
교구 효과도 소비자에 따라 만족도가 크게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교구수업을 한 덕에 아이가 수학을 쉽게 익혔다”고 만족하는 학부모가 있는가 하면 “돈만 많이 들었지 효과는 없었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서울 강남구 서초동에 사는 주부 C씨는 “아이가 셋이라 첫째부터 막내까지 교구수업을 했는데, 수학을 다 잘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교구가 좋아도 아이마다 받아들이는 역량이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창의력을 키워주는 게 좋을 것 같다. 교구수업을 하면 아이가 무조건 수학을 잘할 거라는 생각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과자, 분유통, 가구로도 도형 개념 익힐 수 있어
수학 전문가들 역시 ‘교구맹신론’은 위험하다고 조언한다. 최수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수학사교육포럼 대표는 오히려 교구 등의 반구체물(실제 물건을 대신해 사용하는 매개체)은 사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는 구체물(실제 물건)을 활용해 수학적 개념을 짚어주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최 대표는 “일부 교구업체는 영·유아기 때 교구를 접하지 않으면 수학 두뇌가 발달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위기감을 조성하는데, 그 어떤 것도 입증된 바가 없다. 오히려 인위적으로 만든 반구체물보다 일상생활에서 늘 보는 구체물로 도형을 접할 때 더 효과적이라는 연구 논문도 있다. 아이가 좋아하는 과자, 분유통, 가구 등을 보여주면서도 충분히 도형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자기주도학습 전문가인 정철희 학습디자인연구소장 역시 구체물의 효용성에 무게를 싣는다. 그는 “선진교육을 보면 가정이든 학교든 구체물로 수학 개념을 익힌다. 우리가 사는 모든 세상이 수학이다. 집에서는 큰 방과 작은 방을 보며 ‘넓다 좁다’를 익힐 수 있고, 놀이터 시소에 앉아 ‘무겁다 가볍다’를, 화장실에 붙어 있는 타일과 벽지 패턴을 보면서 도형을 배울 수 있다. 심지어 스포츠 경기, 계단 오르기 등의 신체활동에도 수와 연산이 자동으로 따라온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 독일의 한 유치원에서 진행한 실험 결과를 들려줬다.
“어느 날 갑자기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과 모든 유아 교구재를 없애버렸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당황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 스스로 놀잇감을 만들고 게임 규칙도 만드는 등 금세 창의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였죠. 이후 진행한 창의지수 검사에서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을 때보다 아이들끼리 놀았을 때 점수가 더 높았습니다.”
정철희 소장은 부모 스스로 아이에게 무조건 값비싼 장난감과 교구를 안겨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한다. 정 소장은 “아이 혼자 가만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 눈에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시간 아이 머릿속에서는 무한한 상상의 폭죽이 터질지 모를 일이다. 진짜 수학을 잘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수학’인 대자연 속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이 현명하다. 값비싼 교구로 수리능력이 길러진다고 믿는 건 큰 원을 그릴 줄 아는 아이에게 작은 점만 찍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꼬집었다.
*알립니다. 주간동아 1035호 발행 당시 실렸던 사진은 기사의 일부 내용과 무관해 삭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