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 작품에는 아기를 보는 소녀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 작품은 세로가 긴 화폭으로, 그림 가운데에 배경도 없이 아기를 업은 소녀만 오롯이 서 있습니다. 소녀는 흰색 포대기로 아기를 둘러업고 아기를 받치기 위해 손은 뒷짐을 진 채 정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둥근 얼굴에 앞 머리카락을 눈썹 위로 가지런히 자른 단발머리 소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엷은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흰색 상의와 거무스름한 긴 치마, 치마 아래로 드러난 가냘픈 종아리, 그리고 검정 고무신의 코가 살짝 들려 있는 것까지 어느 시절을 연상케 하는 낯익은 모습입니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고아가 됐거나 부모가 있다 해도 먹고사는 일로 너무 바빠 ‘애가 애를 보는’ 일이 흔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개 큰언니가 일 나간 엄마를 대신해 젖먹이 동생을 키우곤 했습니다. 아이 보는 일은 힘이 들지만, 그림 속 소녀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박수근의 절제된 선묘가 아이가 그린 그림 같으면서도, 조용히 웃음을 머금고 있는 소녀의 해맑은 표정이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검고 가는 선으로 단순화해 그린 소녀의 표정이 무척 다정해 대상을 향한 화가의 따뜻한 마음까지 보이는 듯합니다.
박수근 작품 속 소녀들은 대부분 단발머리입니다. 실제 당시 소녀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1990년대 후반 개최된 한 미술 전시회에서 이 작품을 본 화가 한젬마가 자신의 머리를 소녀와 똑같은 모양으로 바꿨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림 속 포대기 또한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요즘 엄마들은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지만 과거에는 무명천 하나만 있으면 얼마든지 아기를 둘러업고 자유로운 두 손으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처네, 포대기라고 하는 아기띠가 요즘은 선진국에서 오히려 인기라고 합니다. 엄마와 아기가 정서적으로 교감하기 쉽고, 휴대하기 간편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그림 속에서 소녀의 등에 업힌 젖먹이 동생은 머리 윗부분만 살짝 보입니다. 누나 또는 언니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세상이 궁금했던 걸까요.
소녀는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있습니다. 요즘은 시골 장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고무신입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하얀 고무신은 외출할 때만 신는 귀한 신발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소녀처럼 검정 고무신을 신었죠. 소녀의 옷은 포대기 밑으로 살짝 빠져나온 치마를 빼고는 온통 흰색입니다. 박수근은 흰색을 사랑한 화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후원자인 마거릿 밀러에게 보낸 편지에 ‘그림이 팔리면 그림 값의 절반으로 흰색 물감을 사서 보내달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그의 그림을 정밀 분석한 결과 마무리 단계에서 흰색을 사용해 그림 전체에 아연 성분이 포함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작가는 선함, 진실함을 상징하는 흰색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작품에 투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박수근은 주로 서민의 일상생활을 화폭에 담아 ‘가난한 이웃을 사랑한 화가’로도 불립니다. 가난해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고 미군 초상화를 그려주며 살아가던 그의 작품에 주목한 것은 외국인들이었습니다. 특히 주한 미국대사관 문정관의 부인인 마리아 헨더슨과 프리랜서 여기자 마거릿 밀러는 후원자로서 그의 그림 판매를 도왔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의 그림은 40~250달러에 불과했고 화가는 평생 가난과 싸웠습니다. 2007년 미술품 경매에서 박수근의 ‘빨래터’가 45억2000만 원에 팔린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