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N-6. 오랜 기간 신뢰할 만한 성능을 자랑해온 옛 소련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다. 북한이 이 미사일의 4D10 엔진 설계를 확보해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무수단에 사용해왔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한미 합동군사연습이 한창이던 3월 한 달 ‘갖고 있는 모든 미사일’을 날려대던 평양은, 4월 들어 바로 이 4D10 엔진을 과시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이유는 단 하나, ‘워싱턴 불바다’를 가능케 하는 사거리 1만km 이상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이미 완성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시간표를 정리해보자. 4월 9일 북한 ‘노동신문’은 대형 액체로켓 엔진의 연소실험 사진을 공개했다. 해외 전문가들의 공통된 결론은 이 엔진이 4D10 엔진 2기를 하나로 묶은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크기와 구성은 3월 15일 공개한 사진 속 KN-14(2015년 10월 처음 등장한 KN-08 개량형에 대해 한미 군당국이 새로 붙인 명칭) ICBM의 뒷면 엔진 분사구와 똑 닮았다. 그간 어떤 엔진을 사용하는지 공개되지 않았던, 이 때문에 성능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았던 KN-14 미사일의 ‘기술적 실체’를 드러낸 셈. 국내에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못한 이 연소실험 사진에 해외 전문가들이 “악몽이 현실이 됐다”며 경악한 이유다.
그간 북한이 공개한 미사일은 대부분 구형 스커드 미사일 엔진을 사용했다. 사거리 1300km 수준의 노동은 그 확대형이었고, 위성발사용 우주발사체라 주장하던 은하 계열 장거리로켓은 스커드 엔진 여러 기를 하나로 묶은 추진체를 사용했다. 4D10 엔진 공개는 북한의 미사일 위협, 특히 미 본토를 겨냥하는 위협이 앞서의 미사일과는 완전히 다른 궤도에서 진행돼왔음을 비로소 공식화하려는 시도였다. 여기에 3월 공개한 대기권 재진입 실험과 핵탄두 모형까지 결합하면 메시지는 한층 더 명확해진다. 훨씬 높은 추진력과 신뢰도를 가진 이 엔진 2기를 묶어 KN-14에 사용했고, 탄두 재진입 기술과 핵탄두 소형화도 이미 완성됐으므로, 워싱턴에 핵탄두를 날릴 기술적 관문은 모두 넘어섰다는 게 평양이 전달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였다.
그리고 4월 15일 태양절,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는 바로 이 4D10 엔진 1기로 만든 사거리 3000~4000km 수준 무수단 미사일의 발사 단추를 누른다. 이 미사일이 제대로 날아오른다면, 같은 엔진 2기를 묶은 KN-14 역시 제대로 날아갈 가능성은 비약적으로 커진다. 이렇게 보면 이날 무수단 발사에 담긴 평양의 ‘진짜 속내’는 미군기지가 있는 괌이 사정권 안에 들어왔음을 과시하려는 의도보다, 미 본토를 향하는 ICBM 능력의 신뢰도를 간접적으로 입증하려는 것이었다는 추론이 설득력을 얻는다.
이후 벌어진 일은 알려진 바와 같다. 야심 차게 쏘아 올린 무수단 미사일은 한국군이 보유한 그린파인 레이더와 긴급 배치된 이지스함 SPY-1D 레이더에 궤도가 찍힐 만큼 상승하기도 전에 공중에서 폭발했다. 역시 긴장 속에서 궤적을 추적하던 일본 자위대와 미군 북미대륙방공군사령부(NORAD)의 판단도 다르지 않았다. 소련제 SS-N-6을 고스란히 베껴 매우 신뢰도가 높다는 바로 그 미사일이 미처 날아오르지도 못하고 소멸한 것. 워싱턴을 불바다로 만들 ICBM 성능을 입증해 보이려던 평양의 의도 역시 함께 사그라지고 만다.
만약 4월 15일 무수단 발사가 성공했다면, 일본 열도를 가뿐히 넘어 태평양 한가운데 꽂혔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13일 미국 북한 전문 웹사이트 ‘38노스’는 위성사진 분석을 통해 함북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인근의 차량과 인원 이동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전한다. 한미 국방당국 역시 5차 핵실험이 임박했다는 징후가 있다고 이내 확인했다. 3월부터 이어진 탄두소형화→대기권 재진입 기술→4D10 연소실험→무수단 발사→5차 핵실험은 사실상 한 세트인 셈. 5차 핵실험은 이전과 달리 소형화된 핵탄두 실험이 될 공산이 크다고 한국 군당국이 판단한 배경이다.
애초 평양 의도대로 모든 실험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미 본토에 대한 북한의 핵 공격 능력에 대한 의구심은 국제사회를 통틀어 더는 발붙이기 어려울 만한 상황이었다. 4D10 엔진 연소실험을 판독한 미국 측 미사일 전문가들이 ‘1년 이내 완성, 2020년까지 실전배치’를 거론한 배경이다. 그간 스커드 엔진을 사용하는 장거리 로켓 발사에 집중하느라 완전히 다른 엔진을 사용하는 KN-14의 기술적 발전을 간과한 것이 패착이었고, 따라서 어느새 ‘실체적 위협’으로 떠오른 이 미사일의 완성을 막는 것만이 가장 급선무라는 견해가 미국 내에서 빠르게 확산될 공산이 컸다. 말 그대로 암묵적인 핵 보유국 지위가 멀지 않은 셈이다.
당대회 앞두고 상처 난 ‘최고존엄’
그리고 4월 20일 이수용 북한 외무상의 미국 뉴욕 방문. 공식적인 이유는 유엔본부에서 열리는 파리 기후변화협정 서명식이었지만, 진짜 목적은 미국과의 비공식 대화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무수단 발사가 성공했다면, 5차 핵실험을 통해 소형화된 핵탄두의 기폭마저 성공적으로 입증했다면 미국에 머무는 동안 이 외무상의 위상과 발걸음은 완전히 달랐을 터다. 미국 측이 ‘워싱턴 불바다’가 코앞에 닥쳤다는 다급함에 떠밀려 ICBM 개발을 동결하는 정도의 전제조건만으로 선뜻 대화의 문을 열 경우 평양으로서는 한층 유리한 고지에서 협상에 임할 수 있다. 3월부터 한 달여간 진행된 평양의 미사일 과시 퍼레이드는 바로 여기까지가 목표였다는 의미다.
이렇게 놓고 보면 4월 15일 무수단 발사 실패는 평양으로서는 천추의 한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공들여 쌓아 올린 시간표와 계획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렸고, 다시 준비해 날린다 해도 기술적 신뢰도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5차 핵실험 역시 애초 계획했던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을 공산이 크기는 마찬가지. 오히려 4차 핵실험에서 시도했으나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증강형 핵폭탄 실험을 반복해 6~7kt 수준이던 이전 핵실험보다 훨씬 큰 폭발력을 과시하는 게 국제정치적 충격을 극대화하는 카드이기 때문이다.
일련의 계획이 5월 초 노동당 7차 당대회를 앞두고 마련된 스케줄이었음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공언해왔던 경제발전이 국제사회의 제재로 출구를 찾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핵 무력으로 미국의 무릎을 꿇려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강성대국의 면모를 당대회 즈음에 주민들에게 보여주겠노라는 야심 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셈이다. 물론 평양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은 앞으로도 이어지겠지만, 제대로 엉켜버린 스텝이 김정은의 위상에 남길 생채기는 피할 길이 없다. 그렇게, 때로는 아주 작은 사건이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