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이명박의 ‘비핵·개방·3000’
보수 역시 대북정책을 제시하기는 했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권은 ‘비핵·개방·3000 구상’을, 박근혜 정권은 ‘통일대박론’을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지금 미래통합당(통합당)이 비핵·개방·3000 구상이나 통일대박론을 계승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한마디로 이 문제에 관해 보수의 일관된 입장이 없다는 얘기다. 야당 시절에는 집권여당의 정책에 반대만 해도 된다. 하지만 집권 여당이 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이는 선거를 치르기 위한 공약으로, 혹은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이슈로 급조된 정책으로는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이명박 정권의 비핵·개방·3000 구상의 바탕에는 햇볕정책이 완전한 실패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즉 햇볕정책이 북한 핵실험을 막지 못했고, 원칙 없이 유화적으로 흘렀으며, 그로 인해 남남갈등이 증폭되고, 한미동맹이 이완되며, 세금이 낭비되고 북한 인권이 외면당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햇볕정책의 성과는 모조리 지우고 그 한계만 과장해 부각한 것이다. 이 인식은 너무 편파적이어서, ‘정책적’ 판단이라기보다 ‘정치적’ 공격에 가깝다. 이런 편파적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으니, 그 구상이 애초에 남북관계 관리를 위한 진지한 정책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비핵·개방·3000 구상의 요체는 ‘북한이 비핵화를 하면 현재 300에 불과한 북한 주민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를 3000달러로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다. 사업가 특유의 비즈니스 마인드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북한 지도층은 핵 개발을 체제 생존이 걸린 문제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애초에 경제성장과 교환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둘째, 비핵화는 본질적으로 북·미 관계에 따라 결정될 문제라는 것이다. 미국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한 북한이 스스로 핵을 포기할 리 없다. 그러니 불가능한 일을 조건으로 걸어놓고, 북한 입장에서 볼 때는 턱도 없는 제안을 한 셈이다.
북한 비핵화는 이뤄야 할 ‘목표’이나, 비핵·개방·3000 구상은 이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니 목표가 달성되지 않는 동안 우리 정부가 할 일은 사실상 없는 셈이다. 이명박 정권 시절 남북관계가 진전은커녕 후퇴만 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시절 금강산 관광이 중단됐고,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은 고조됐다. 2010년 3월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천안함이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젊은 병사 46명이 목숨을 잃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연평도 해병대 기지와 민간인 지역이 북한으로부터 포격을 당했다. 이 도발로 군인 2명과 민간인 2명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안보’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을 가리킨다. 비핵화를 ‘전제’로 내걸어 남북관계를 방치한 것이 외려 안보를 위태롭게 한 셈이다. 이 모두가 남북관계를 정책이 아닌 정략 관점에서 바라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햇볕정책 시절에도 1, 2차 연평해전 등 북한의 도발은 있었다. 하지만 안보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으로 규정할 때, 안보 상황은 남북관계가 안정적이던 민주당 정권 시절이 나았던 게 사실이다. 특히 개성공단 설치로 북한군 2개 사단과 1개 포병여단이 후방으로 철수한 것은 우리에게 큰 안보상 이득이었다.
박근혜의 ‘통일대박론’
경기 파주시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폭파 이전의 개성공단.
2014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독일 드레스덴에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이른바 ‘통일대박론’을 발표한다. 인도적 지원과 경제교류, DMZ(비무장지대) 평화공원 등으로 한반도 신뢰를 구축하자는 내용이다. 문제는 그 안에 ‘비핵화’ 얘기가 통째로 빠져 있다는 것. 이명박 정권은 그것을 어떻게 이룰지 생각지 않고 그냥 비핵화를 ‘전제’로 내세웠다가 남북관계를 긴장 속으로 몰아넣은 바 있다. 박근혜 정권은 아예 그 ‘전제’ 자체를 빼버린 것이다. 한껏 대박의 꿈을 부풀리더니 북한이 핵실험을 하자 2016년 2월 갑자기 개성공단에서 철수할 것을 지시했다. 정책이 양극을 오간 셈이다.
보수여론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정권이 통일대박론을 외칠 때 한 보수언론은 이런 기사를 실었다. ‘남북통합 땐 대륙과 연결된 6000조 원 자원강국’ ‘북 관광 4조 투자하면 연 40조 번다’ ‘북 인프라 122조 투자 땐 물류의 실크로드’. 이렇게 대박의 꿈을 부풀리던 언론사가 정권이 바뀌니 딴소리를 한다. ‘판문점 선언 동의받으려면 100조 원 액수부터 정직하게 밝혀야’ ‘북은 고도의 철도 현대화 요구…고속철 건설 땐 56조’ ‘남북은 정상회담, 미는 대북제재 안보리 긴급회의 소집’. 이제는 통일의 꿈을 뭉개는 셈인데, 내가 하면 ‘대박’이요 남이 하면 ‘쪽박’이란 말인가.
남북관계를 관리하기 위한 ‘전략적’ 비전 없이 그때그때 정치적 편의에 따라 ‘전술적’ 기동만 하니 당연히 비일관성이 발생한다. 그 결과 야당 때는 대북강경책으로 일관하다가 정작 집권해 남북관계를 관리할 책임을 떠맡게 되면 뭘 할지를 몰라 냉온 양 탕을 오가는 갈지자 행보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국민은 보수의 대북정책이 대체 뭔지 종잡을 수가 없다. 통일 비용을 치르자는 것인가, 말자는 것인가. 비핵화 노력을 하자는 것인가, 말자는 것인가. 바로 여기서 보수는 남북관계에 관해 생산적 대안 없이 오직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한다는 인상이 발생한다.
비핵화를 예로 들어보자. 보수의 전략은 한미동맹으로 북한을 압박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우리 정부가 할 일은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문제 해결을 온전히 미국 측에 맡기는 것은 주권국가의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압박한다고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 보수는 이 물음에 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우리도 핵무장을 하거나, 미국과 핵을 공유하자는 주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표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핵 개발이든 핵 공유든 미국이 허락할 리도 없다.
보수의 안보정책
며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4곳에서 ‘전국지표조사 심층리포트’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남북관계 및 안보정책에서 민주당이 통합당보다 잘할 것 같다는 응답이 월등히 높았다. 그 차이가 무려 19%로, 비교 대상인 5개 항목 중 격차가 가장 컸다. 이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남북관계 및 안보정책은 보수정당의 대표적 비교우위 영역이었는데, 그마저도 뒤집혀버린 것이다. 과거 선거철마다 불던 ‘북풍’은 보수정당에 유리했으나, 이제 보수정당은 선거철에 행여 북풍이 불까 노심초사한다. 안보나 남북관계를 둘러싼 정치지형이 그새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 보수는 이 변화를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여전히 안보 및 남북관계에서 대북강경 노선으로 일관하는 것을 보면. 과거에는 그것이 지지율에 도움이 됐지만 이제는 외려 보수의 덫이 돼버렸다. 가령 보수당이 거듭나기 위해 대북정책을 수정하려 한다고 해보자. 아마도 과거 관성에 빠진 지지자들부터 들고일어날 것이다. 그 반발이 무서워 어정쩡한 행보를 보이면 ‘산토끼’와 ‘집토끼’를 모두 놓치게 된다. 변화를 위해서는 과감한 행보가 필요하다. 국민에게 수권정당으로 인정받으려면 그들에게 ‘대안’을 보여줘야 한다.
이제 햇볕정책과 경쟁할 만한 보수의 정책 브랜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느 정권이 들어서도 이어서 추진할 장기적 플랜, 부침이 심한 남북관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확고한 원칙을 담고 있어야 한다. 햇볕정책의 전면적 부정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 그 정책의 합리적 핵심을 취하면서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예를 들어 햇볕정책 주창자들은 통일과 북한에 대해 과도한 기대를 갖고 있다. 특히 현 정권 사람들은 종종 NL(민족해방) 이념의 잔재를 드러내곤 한다. 이 환상과 편향을 견제하면서 국민에게 안정감을 줄 만한 남북관계 전략 및 원칙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