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수궁 돌담길의 서각가 조규현(46) 씨는 올해로 13년째 덕수궁을 파수꾼처럼 지키고 있다. 그는 아홉 살 때 미군 트럭에 치여 오른팔을 잃었다. 함께 길을 걷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오른팔을 잃은 젊은이는 할 일도, 갈 곳도 없었다. 가출과 방랑. 한쪽 팔로 125cc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20대를 길거리에서 보냈다. 춘천으로 대구로, 전국을 오토바이 하나로 휘젓고 다니면서 신문팔이에서부터 구두닦이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다가 만난 것이 서각.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인 1985년이었다. 우연히 춘천에서 맞닥뜨린 ‘멋진’ 서예작품에 매료된 후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서예를 배우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서각을 하게 됐어요. 어릴 때부터 만드는 재주가 있었는데 이게 다 운명인 거죠. 스승님께 1년 정도 배웠고, 10년 넘게 독학했습니다. 그러나 오른팔이 없는 제가 서각을 배우는 건 쉽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망치 끝이 살을 파고들어 작업을 10분도 계속할 수 없었죠. 하지만 지금은 서각을 하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한했을 때 그는 여왕의 얼굴을 담은 자신의 서각작품을 영국문화원을 통해 여왕에게 전달했다. “한국을 방문한 국빈에게 부족하지만 뭔가 선물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앞으로도 힘닿는 한 서각을 계속할 계획이다. 할 수만 있다면 서각을 하다가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 장애인 복지대학을 만드는 게 꿈이라는 그는 “가난하고 몸이 불편한 사람을 위해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해 좋은 작품을 만들 것이다”라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