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0여 년 간 ‘대패밥’ 먹으며 고건축물을 찾아 전국을 떠돈 끝에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로 인정 받은 전흥수씨(64세). 그가 관장으로 있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의 한국고건축박물관을 찾았을 때 1차 개관한 박물관 한켠에는 짓다 만 고가옥 한 채가 기와를 반쯤 얹은 채 앙상한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5년의 공사기간에 100억 원이 넘는 사재를 쏟아부었지만 애초 전씨가 구상한 박물관은 아직 완전한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하였다. “경비가 부족해 공사가 지연되었습니다. 곧 담장도 쌓고 마무리해야죠….” 지병인 고혈압으로 갑작스레 불편해진 몸을 이끌고 취재진을 맞은 전씨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배움이라곤 4년 간 절 공부한 게 전부다”는 전씨가 대목장이자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로, 고건축박물관 관장으로 거듭나기까지 걸어온 길은 결코 간단치 않다. 600여 년 간 조상 대대로 터를 잡아온 충남 예산군 덕산면 대동리에서 9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 전씨. “목수인 아버지는 의외로 학자 기질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당신이 직접 몸을 놀리시기보다 사람에게 이리저리 지시하는 걸 좋아하셨죠. 그러다 보니 목수로 무슨 돈을 벌겠습니까. 양식이 떨어지면 그때 가서 절 일을 봐주곤 하면서 평생 수덕사를 맴도셨죠.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장사로 돈벌이를 했습니다.” 너나할것없이 가난하던 시절 열 명이 넘는 대식구를 거느린 목수 집안이 굶지 않고 입에 풀칠하기란 쉽지 않았다.
“열두 살 되던 해에 보릿고개로 집에 양식이 떨어지자 아버지가 저를 수덕사 행자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절이란 곳이 영 내 기질하곤 맞질 않았어요. 성질이 급하다 보니 스님이든 누구든 날 나무라는 사람이 있으면 물불 안 가리고 대들었죠. 한창 개구쟁이짓 할 어린 나이에 절간 행자생활이란 게 오죽 답답하겠습니까. 도저히 못 참고 절을 뛰쳐 나오면 아버지가 날 잡아다 다시 절에 끌고 가고, 또 스님이 집까지 찾으러 와 잡혀가고… 그렇게 대여섯 번쯤 절을 들락날락한 것 같습니다.”
지긋지긋한 절간 생활을 피할 방법은 스님과 아버지의 손아귀를 벗어나 멀리 도망치는 길밖에 없었다. 10대 나이로 변변한 학벌도 없이 무작정 서울로 올라간 전씨가 취직한 곳은 포목공장이었다. 답답하고 따분하긴 절간과 매일반인 공장생활에 진력이 날 무렵, 자신과 마찬가지로 ‘입 하나 덜기 위해’ 절에 보내진 남동생이 끝내 머리를 깎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춘기 어린 나이로 못 배운 설움과 가난의 고통을 한꺼번에 껴안아야 한 전씨는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종로와 청량리 일대를 주름잡는 주먹패 생활에 빠졌다. 결국 그는 짧은 수감생활을 끝내고 빈손으로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막상 고향에 내려왔지만 달리 할 게 뭐 있겠습니까. 아버지 밑에서 목수일을 배우기 시작했죠. 배우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포기하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거기다 천대 받는 가난한 목수로 평생 살아야 하나 싶어 회의도 들었죠.”
그즈음 전씨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소중한 인연을 만난다. “사찰 보수공사를 하며 아버지와 인연을 맺은 대목장 김중회 선생을 만났죠.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원래 그 분이 경상도 스님이셨어요. 그 분한테서 좋은 나무를 고르는 방법부터 고건축의 기초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사찰을 보수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스승님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일을 돕기도 하고 배우면서 고건축의 아름다움에 눈떴어요.”
아무리 든든한 대목장이 스승으로 버티고 있다 해도 엄격한 계급사회인 목수장이 생활에서 그가 특혜를 받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눈썰미가 밝고 손재주가 많은 분이셨어요. 그 피를 닮았는지 남보다 목수일을 빨리 배웠습니다. 당시만 해도 일일이 누가 가르쳐 주기보다 어깨 너머로 기술을 배운 시절이었죠.” 선배 목수보다 빨리 기술을 터득했다는 이유로 시기와 미움의 대상이 된 전씨는 걸핏하면 동료 목수들에게서 주먹세례를 당했다. “대웅전 한 채를 신축하려면 기둥과 서까래 등으로 모양과 쓰임새를 달리하는 60~80여 종의 나무를 깎아야 합니다. 서럽고 힘든 시절, 한낱 재료에 지나지 않던 목재가 목수의 대패질과 끌질을 통해 차곡차곡 쌓이면서 법당으로 태어나는 걸 보면 무척 감격스럽고 기뻤습니다. 거기에 흠뻑 빠져 지금까지 왔지요.”
“15년은 지나야 자를 잡는다”는 고건축 세계의 불문율을 그는 10년 만에 깨뜨렸다. 채 서른이 안 된 나이에 전씨는 자신의 손으로 첫 건물 지을 기회를 얻었다. “구파발에 있는 삼천사 법당이었어요. 막상 내 손으로 건물을 짓는다고 생각하자 기쁜 마음보다 겁이 났습니다. 일 배울 때 나무를 조금만 잘못 깎아 못 쓰게 만들면 눈물이 쏙 빠질 만큼 혼쭐나곤 했으니까 혹시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죠. 공사가 끝날 때까지 제대로 다리 뻗고 잠잘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 그의 손에 의해 태어난 삼천사 법당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나중에 절 규모가 커지면서 헐어내고 법당과 삼신각을 다시 지었어요. 내가 처음 지은 법당을 내 손으로 밀어 버리자니 마음이 몹시 착잡했습니다.”
지금까지 전씨가 신축·보수한 주요 고건축물만 해도 창덕궁 가정당, 월정사 산신각, 법주사 용화당, 화엄사 요사채를 비롯해 100채가 넘는다. 건평으로 따지면 4만 평이 훨씬 넘는 규모. 그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 수덕사 법당 양식을 그대로 재현한 수덕사 황화루다. 일반 건축물과 달리 오랜 세월의 무게를 지닌 고건축물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재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한때는 선조의 품격 높은 기예를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두려움과 중압감에 시달려 나무를 쳐다보는 일조차 두려운 적도 있었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일이 안 풀리고 좌절감에 시달릴 때마다 전씨는 일을 놓고 사찰 대웅전을 찾아가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다. “마음을 비우고 단아한 고찰 모습을 둘러보노라면 저절로 평정심이 생기죠. 그러면 다시 대패 잡을 힘을 얻습니다.”
전씨에게 필생 소원은 목수인생 40년에 ‘내 손’과 ‘내 재산’으로 후세를 위해 뭔가 남기는 일이었다. 그 꿈을 고건축박물관으로 이룬 셈이다. “나중에 박물관을 사회에 기증할 생각입니다. 소중한 국가 재산이 될 수 있도록.” 덧붙여 그는 “절대 자식에게 유산은 남기지 않을 겁니다. 유산이 있으면 형제간 반드시 싸움이 일어나요”라며 단호히 말했다.
이미 파괴되고 소실된 유산은 어쩔 수 없지만 지금 남아 있는 문화유적만이라도 잘 보존해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자신과 같은 기능인의 사명이라고 굳게 믿는 전씨. 그는 “살다 간 흔적을 남기기 위해” 30년 전부터 고건축물 모형들을 하나하나 깎아 왔고, 오랜 집념이 박물관으로 남았다. 생과 죽음의 갈림이 하루에도 수없이 교차하는 인간 삶에서 죽어서까지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축복 받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바람대로 ‘대목장 전흥수’는 우리 건축사에 뚜렷한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배움이라곤 4년 간 절 공부한 게 전부다”는 전씨가 대목장이자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로, 고건축박물관 관장으로 거듭나기까지 걸어온 길은 결코 간단치 않다. 600여 년 간 조상 대대로 터를 잡아온 충남 예산군 덕산면 대동리에서 9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 전씨. “목수인 아버지는 의외로 학자 기질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당신이 직접 몸을 놀리시기보다 사람에게 이리저리 지시하는 걸 좋아하셨죠. 그러다 보니 목수로 무슨 돈을 벌겠습니까. 양식이 떨어지면 그때 가서 절 일을 봐주곤 하면서 평생 수덕사를 맴도셨죠.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장사로 돈벌이를 했습니다.” 너나할것없이 가난하던 시절 열 명이 넘는 대식구를 거느린 목수 집안이 굶지 않고 입에 풀칠하기란 쉽지 않았다.
“열두 살 되던 해에 보릿고개로 집에 양식이 떨어지자 아버지가 저를 수덕사 행자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절이란 곳이 영 내 기질하곤 맞질 않았어요. 성질이 급하다 보니 스님이든 누구든 날 나무라는 사람이 있으면 물불 안 가리고 대들었죠. 한창 개구쟁이짓 할 어린 나이에 절간 행자생활이란 게 오죽 답답하겠습니까. 도저히 못 참고 절을 뛰쳐 나오면 아버지가 날 잡아다 다시 절에 끌고 가고, 또 스님이 집까지 찾으러 와 잡혀가고… 그렇게 대여섯 번쯤 절을 들락날락한 것 같습니다.”
지긋지긋한 절간 생활을 피할 방법은 스님과 아버지의 손아귀를 벗어나 멀리 도망치는 길밖에 없었다. 10대 나이로 변변한 학벌도 없이 무작정 서울로 올라간 전씨가 취직한 곳은 포목공장이었다. 답답하고 따분하긴 절간과 매일반인 공장생활에 진력이 날 무렵, 자신과 마찬가지로 ‘입 하나 덜기 위해’ 절에 보내진 남동생이 끝내 머리를 깎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춘기 어린 나이로 못 배운 설움과 가난의 고통을 한꺼번에 껴안아야 한 전씨는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종로와 청량리 일대를 주름잡는 주먹패 생활에 빠졌다. 결국 그는 짧은 수감생활을 끝내고 빈손으로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막상 고향에 내려왔지만 달리 할 게 뭐 있겠습니까. 아버지 밑에서 목수일을 배우기 시작했죠. 배우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포기하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거기다 천대 받는 가난한 목수로 평생 살아야 하나 싶어 회의도 들었죠.”
그즈음 전씨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소중한 인연을 만난다. “사찰 보수공사를 하며 아버지와 인연을 맺은 대목장 김중회 선생을 만났죠.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원래 그 분이 경상도 스님이셨어요. 그 분한테서 좋은 나무를 고르는 방법부터 고건축의 기초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사찰을 보수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스승님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일을 돕기도 하고 배우면서 고건축의 아름다움에 눈떴어요.”
아무리 든든한 대목장이 스승으로 버티고 있다 해도 엄격한 계급사회인 목수장이 생활에서 그가 특혜를 받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눈썰미가 밝고 손재주가 많은 분이셨어요. 그 피를 닮았는지 남보다 목수일을 빨리 배웠습니다. 당시만 해도 일일이 누가 가르쳐 주기보다 어깨 너머로 기술을 배운 시절이었죠.” 선배 목수보다 빨리 기술을 터득했다는 이유로 시기와 미움의 대상이 된 전씨는 걸핏하면 동료 목수들에게서 주먹세례를 당했다. “대웅전 한 채를 신축하려면 기둥과 서까래 등으로 모양과 쓰임새를 달리하는 60~80여 종의 나무를 깎아야 합니다. 서럽고 힘든 시절, 한낱 재료에 지나지 않던 목재가 목수의 대패질과 끌질을 통해 차곡차곡 쌓이면서 법당으로 태어나는 걸 보면 무척 감격스럽고 기뻤습니다. 거기에 흠뻑 빠져 지금까지 왔지요.”
“15년은 지나야 자를 잡는다”는 고건축 세계의 불문율을 그는 10년 만에 깨뜨렸다. 채 서른이 안 된 나이에 전씨는 자신의 손으로 첫 건물 지을 기회를 얻었다. “구파발에 있는 삼천사 법당이었어요. 막상 내 손으로 건물을 짓는다고 생각하자 기쁜 마음보다 겁이 났습니다. 일 배울 때 나무를 조금만 잘못 깎아 못 쓰게 만들면 눈물이 쏙 빠질 만큼 혼쭐나곤 했으니까 혹시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죠. 공사가 끝날 때까지 제대로 다리 뻗고 잠잘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 그의 손에 의해 태어난 삼천사 법당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나중에 절 규모가 커지면서 헐어내고 법당과 삼신각을 다시 지었어요. 내가 처음 지은 법당을 내 손으로 밀어 버리자니 마음이 몹시 착잡했습니다.”
지금까지 전씨가 신축·보수한 주요 고건축물만 해도 창덕궁 가정당, 월정사 산신각, 법주사 용화당, 화엄사 요사채를 비롯해 100채가 넘는다. 건평으로 따지면 4만 평이 훨씬 넘는 규모. 그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 수덕사 법당 양식을 그대로 재현한 수덕사 황화루다. 일반 건축물과 달리 오랜 세월의 무게를 지닌 고건축물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재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한때는 선조의 품격 높은 기예를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는 두려움과 중압감에 시달려 나무를 쳐다보는 일조차 두려운 적도 있었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일이 안 풀리고 좌절감에 시달릴 때마다 전씨는 일을 놓고 사찰 대웅전을 찾아가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다. “마음을 비우고 단아한 고찰 모습을 둘러보노라면 저절로 평정심이 생기죠. 그러면 다시 대패 잡을 힘을 얻습니다.”
전씨에게 필생 소원은 목수인생 40년에 ‘내 손’과 ‘내 재산’으로 후세를 위해 뭔가 남기는 일이었다. 그 꿈을 고건축박물관으로 이룬 셈이다. “나중에 박물관을 사회에 기증할 생각입니다. 소중한 국가 재산이 될 수 있도록.” 덧붙여 그는 “절대 자식에게 유산은 남기지 않을 겁니다. 유산이 있으면 형제간 반드시 싸움이 일어나요”라며 단호히 말했다.
이미 파괴되고 소실된 유산은 어쩔 수 없지만 지금 남아 있는 문화유적만이라도 잘 보존해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자신과 같은 기능인의 사명이라고 굳게 믿는 전씨. 그는 “살다 간 흔적을 남기기 위해” 30년 전부터 고건축물 모형들을 하나하나 깎아 왔고, 오랜 집념이 박물관으로 남았다. 생과 죽음의 갈림이 하루에도 수없이 교차하는 인간 삶에서 죽어서까지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축복 받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바람대로 ‘대목장 전흥수’는 우리 건축사에 뚜렷한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