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단측의 일방적인 총장 연임 결정에 교수와 직원이 반발하며 시작된 숭실대의 학내분규가 개강을 맞아 더 심각한 양상으로 번졌다. 당초 9월1일로 예정된 2학기 개강은 교내 전산망 문제로 일주일 연기한 상태. 사상초유라는 교수들의 집단 단식농성과 12일로 예정된 학생총회 등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사태의 발단은 재단측이 지난해 12월 교수·학생 등이 중심이 된 총장추천위원회가 추천한 복수 후보 대신 어윤배 총장을 재신임하면서 비롯하였다. 그동안은 총장추천위가 추천한 후보 2인 중 1인을 이사회가 지명하는 것이 관례였다.
단식교수들 집단사표도 각오

9개월째 계속된 분규로 학교는 만신창이가 된 상황. 우선 주요 단과대 학장, 학과장 자리가 공석인 것을 비롯해 학교의 행정체계가 거의 마비된 상태다. 학사일정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여름방학 동안 예정된 편입생 모집 역시 취소되었다. 9월13일부터 시작하는 2차 수시모집 전형일정 역시 11월로 연기한 상태. 지난 봄 수시모집에서 0.2 대 1의 처참한 경쟁률을 기록하는 등 ‘디지털 브레인’이라는 컨셉트로 정보화대학을 표방한 숭실대의 이미지 역시 크게 손상되었다.

직원노동조합은 어총장의 업무 수행방식과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원칙 없는 조직개편과 보직 임기 조정의 남발, 무원칙한 정실 인사, 교내 공사나 계약에서 실무 담당자의 의견을 무시하고 임의대로 처리하는 독단적 업무추진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더욱이 노동조합을 대학 발전의 걸림돌이라 말하는 등 교섭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 역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고동환 전국대학노조 숭실대 지부장의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 대해 어윤배 총장은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학내 구성원 다수가 내 업무 스타일에 불만이 있다는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여론조사 결과가 나쁘게 나온다고 해서 대통령이 물러나야 합니까?” 관계법령에 규정된 대로 대학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총장에 재신임되었으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96년 선거 당시 단임 약속도 전 총장처럼 연임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말이었지 반드시 물러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운영방식이 독선적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결과가 평가해 주리라는 입장이다. 자신의 ‘개혁정책’에 반대하는 일부 교수와 극단적인 노조가 사태를 주도하고 있다고 어총장은 단언했다.
교수협의회는 이번 단식농성으로도 사태의 진전이 없을 경우 집단사표 제출 등의 방법으로 더욱 수위를 높인다는 계획. 어윤배 총장의 사퇴가 전제되어야 다른 해결방안의 모색이 가능하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이는 어윤배 총장 역시 마찬가지다. 일단 모든 교직원이 업무에 복귀하고 시위 및 파업 책임자의 법적 책임 문제가 선행된 후에야 자신의 거취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고 어총장은 말한다.
현재로서는 조기에 이러한 상황이 해결될 여지는 적어 보인다. 지난해 4월 학생들의 총장 퇴근저지 사건, 2학기 개강 연기에 대한 책임소재 공방 등으로 총장과 구성원 사이의 불신은 극에 달한 상태. 특히 최근 발생한 전산망 다운이 ‘불순세력의 해킹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며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 총장측에 대해 공투위는 ‘전형적인 흑색선전’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해결의 실마리를 쥔 재단이사회(이사장 곽선희 목사) 역시 사태 해결 의지가 적어 보인다. 문제가 불거진 뒤 8개월 만에 이 문제를 처음 논의하기 위해 지난 8월10일 소집한 재단이사회는 어총장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교수협의회는 재단측이 면담 요청을 피하고 있다고 말한다. 곽이사장이 시무하는 서울 소망교회 등에서 여러 차례 항의시위를 했지만 묵묵부답이라는 것. 곽이사장측은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 줄 것이다”며 공식적인 언급을 피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결국 가장 큰 문제는 학교 안에서의 갈등을 해결하거나 중재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교육부 등 관계당국 역시 이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게 사실이고요. 대학자율이라는 명분은 세웠지만 그에 걸맞은 운영체계가 없다는 것이 모든 사립대가 안고 있는 비극의 원인입니다.”
교내 곳곳에 ‘총장퇴진’ 현수막이 나부끼는 가운데 숭실대 사태는 더 큰 나락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