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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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교수의 넋 싣고 미국 하늘서 ‘훨훨’

국산 소형항공기 ‘반디호’ 성공기 … 항우연, 추락사고로 조종사 잃어가며 9년 만에 결실

  •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6-11-15 13: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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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교수의 넋 싣고 미국 하늘서 ‘훨훨’
    2006년 3월22일(미국 현지 시각), 워싱턴DC 인근의 비행장 ‘몽고메리 에어파크’의 날씨는 초봄치고 좀 쌀쌀했다. 바람도 평소보다 강했다. 비행장 한쪽에선 태극마크를 단 소형항공기 ‘반디호(연구용 시제기 1호)’의 비공개 시험비행이 한창 준비 중이었다. 반디호에 내려진 특명은 1540kg을 싣고 6100m 상공까지 올라가는 것.

    미국 비행기 수입업체인 ‘프록시 애비에이션(Proxy Aviation)’사의 사장과 부사장 등 관계자 6~7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안석민 박사의 손과 눈은 반디호의 이곳저곳을 훑고 다녔다. 혹시 어디 이상은 없는지 꼼꼼히 살피기 위해서였다.

    오후 1시, 드디어 반디호가 활주로에 올랐다. 기내에는 연료 대신 1540kg의 물을 가득 담은 연료통이 실렸다. 당초 설계된 최대 중량 1225kg보다 무려 315kg이 더 실린 것. 여기에 조종사와 조수석에 한 사람씩 더 올라탔다.

    시험비행에 참석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반디호에 쏠렸다. ‘과연 뜰 수 있을까?’ 안 박사는 속으로 조바심이 났다. 경쟁 기종인 미국 벨로시티(Velocity)사의 ‘벨로시티’는 고개(기체 앞부분)도 들지 못한 채 실패한 일이었다.

    시동이 걸리고 프로펠러가 힘차게 돌면서 반디호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00m, 200m, 300m, 400m…. 점차 속도가 붙었다. 그런데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지면서 쉽게 공중으로 뜰 것 같지 않았다. 안 박사는 손에 땀을 쥐었다.



    미 수입업체에 정식 판매

    속도가 더 붙고 670~680m 지점을 통과하는 순간, 드디어 반디호의 바퀴가 땅을 박차고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안 박사가 예상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이륙한 것이다. 순수 한국 기술로 만들어진 소형비행기가 처음으로 미국의 창공을 나는 순간이었다. 안 박사는 당시를 회상하면 지금도 감격스럽다고 했다.

    “그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놀라워하던 미국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10년 가까이 노력한 일이 이제야 결실 맺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반디호는 목표 상공인 6100m까지 무난히 올랐다. 이날 성공적인 시험비행으로 미국 프록시사와 반디호의 제작, 판매를 맡은 신영중공업(대표 홍의석)은 4월26일 정식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10월31일 신영중공업은 반디호 한 대를 프록시사에 정식으로 판매했다. 국내 민간항공기로는 최초로 해외에 수출한 것. 홍의석 사장은 “요즘 프록시사와 향후 2년간 총 60대의 추가 수출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반디호가 탄생해 세계 최대의 소형항공기 시장인 미국에 진출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인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교수의 넋 싣고 미국 하늘서 ‘훨훨’

    2004년 8월27일 시험비행 도중 추락사고로 사망한 한국항공대 은희봉(왼쪽), 황명신 교수를 기리는 추모상이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한쪽에 세워져 있다.

    항공우주연구원 항공사업단(이대성 단장) 내에 안 박사를 책임연구원으로 한 ‘선미익(canard)형 항공기’ 기술개발연구팀이 꾸려졌다. 선미익형 항공기란 일반적으로 동체 뒤 꼬리부분에 달려 있는 수평날개가 동체 앞쪽에 달린 항공기를 말한다. 연구팀은 당초 순수한 기술개발 차원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이대성 단장의 설명이다.

    “대형항공기를 개발하려면 수십조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설령 개발했다 하더라도 우리보다 훨씬 앞선 선진국의 기술과 경쟁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선진국에서도 소형항공기 분야는 시장이 넓은 데 비해 기술개발은 다소 미진한 상태였다. 그래서 소형항공기를 선택했고, 이왕 할 거면 선진기술인 선미익형 항공기 기술을 개발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선미익형 항공기의 장점은 저속으로 비행할 때 안전성이 우수하다는 것. 그 덕에 이·착륙 시 안전사고 발생률도 크게 줄일 수 있다.

    기술개발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당장 연구에 필요한 데이터가 없었다.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해외에서 선미익형 항공기를 들여온 뒤 시험비행을 통해 각종 데이터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직접 만든 회사보다 그 항공기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게 됐다.

    항공우주연구원이 자체 활주로나 시험조종사를 보유하지 못한 점도 걸림돌이었다. 특히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은 연구용 시제기를 목숨 걸고 운전해줄 조종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이 문제는 한국항공대의 황명신, 은희봉 교수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과제수행평가위원회가 문제를 삼았다. “이 기술을 개발해서 어디에 사용할 것이냐”고 문제를 제기한 것. 다행히 기술개발의 필요성에 대한 연구원들의 설명이 받아들여져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연료 이상 탓 남극점 도전 때 불시착하기도

    어렵사리 진행한 연구는 2001년 9월21일, 한국항공대 활주로에서 반디호의 초도비행 성공으로 결실을 보았다. 여기까지가 반디호 연구개발 1단계다.

    국내 최초의 선미익형 항공기 반디호는 훌륭했다. 2002년 8월 미국 오시코시 에어쇼에 참가해 관람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에 힘입어 초도비행에 나섰던 항공대 황명신, 은희봉 교수의 “충분히 상용화할 수 있다”는 조언에 따라 연구팀은 2단계 상용화 작업에 돌입했다.

    여러 방면으로 미국 시장 진출을 모색하던 연구팀에 희소식이 날아든 것은 2003년 11월. 미국의 유명한 탐험조종사인 ‘거스 매클라우드’가 반디호로 남미대륙 횡단과 남극점에 도전해보겠다는 연락을 해온 것. 성공만 한다면 미국 시장 진출에 청신호가 켜지는 셈이었다.

    두 교수의 넋 싣고 미국 하늘서 ‘훨훨’

    ‘반디호’ 개발의 주역인 항공사업단 이대성 단장(오른쪽)과 안석민 박사.

    하지만 거스의 비행은 순탄치 못했다. 남미대륙을 거쳐 남극점 도전을 두 차례 시도한 후 되돌아오는 길에 시동이 꺼져 불시착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 당시 상황에 대한 안 박사의 기억이다.

    “새벽 2시에 거스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남미를 거슬러 미국으로 되돌아가는 길인데, 반디호 엔진이 섰다는 거예요. 어디냐고 물으니까 6000ft 상공이라더군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죠. 할 말이 없었어요. 빨리 내려오라는 말밖에는….”

    다음 날 반디호 추락 소식으로 세상이 온통 시끄러웠다. 수소문한 결과 거스는 무사히 비상착륙한 상태였고, 반디호에도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2~3일 뒤 엔진이 멈춘 원인은 기체 결함이 아니라 물이 섞인 연료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 덕에 거스와 반디호는 오히려 미국에서 유명세를 타게 됐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해 8월, 연구팀에 난데없는 비보(悲報)가 날아들었다. 한가족 같았던 항공대 황명신, 은희봉 교수가 항공우주연구원의 다른 팀에서 개발 중이던 ‘보라호’를 시험비행하다가 추락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 그 충격으로 연구는 한동안 중단됐다. 시험비행을 맡길 만한 사람도 없었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1년 정도 지난 2005년 9월 한서대 항공운항학과 박수복, 한경근 교수 등이 시험조종사로 참여하면서 상용화 작업은 겨우 다시 시작됐다.

    안 박사는 “항공대 두 교수의 죽음이 헛되는 것 같아서 사업을 접을 수 없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다행히 한서대 교수들이 나서줘 다시 상용화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작지만 세상을 비춰라’는 의미를 가진다는 ‘반디호’. 미국을 넘어 지구촌 곳곳의 하늘을 날면서 세상을 비출 그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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