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적 소지자로 공정거래위원회 동일인(총수) 지정을 피한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 [사진 제공 · 쿠팡]
동일인 지정을 앞두고 가장 이슈가 된 기업은 현대자동차와 효성, 쿠팡이다. 특히 쿠팡은 김범석 의장이 미국 국적이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동일인 지정에서 빠질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그러자 정치권 및 시민단체 등은 “검은머리 외국인에 대한 특혜”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관가에서는 “공정위가 처음으로 외국인 동일인을 지정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쿠팡은 지난해 자산 총액이 3조1000억 원에서 올해 5조8000억 원으로 늘면서 새롭게 대기업집단에 포함됐다. 따라서 이번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의 관건은 미국인인 김 의장이 동일인으로 지정될지 여부였다. 앞서 쿠팡 측은 ‘외국인이 동일인에 지정된 전례가 없다’는 점을 들어 “총수 지정은 부당하다”는 뜻을 밝혔다. 실제로 지난해 ‘총수 없는 대기업’으로 지정된 9개 기업 중 한국GM과 S-Oil은 ‘외국법인 지배’를 근거로 동일인 지정을 피했다.
누구는 피하려 안달, 누구는 마지못해 원해
올해 새롭게 동일인(총수)으로 지정된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왼쪽)과 조현준 효성 회장. [뉴시스]
따라서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은 “김 의장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동일인 지정에서 배제되는 건 특혜”라고 주장했다. 특히 2017년 동일인으로 지정된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글로벌투자책임자)와 비교하는 이가 많다. 당시 네이버는 이해진 창업자의 지분 보유율이 4%가량밖에 되지 않고 회사 경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며 동일인 지정을 이 창업자 개인이 아닌 ‘법인’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정위는 “1% 미만의 소수 주주 지분이 전체 지분의 약 50%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4% 지분도 영향력이 크고, 이 창업자가 대주주 중 유일하게 경영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며 이 창업자를 동일인으로 지정했다. 이러한 전례에 비춰볼 때 공정위는 이번에도 김범석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해마다 5월이면 공정위는 자산 총액이 5조 원 이상인 곳은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10조 원 이상인 곳은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으로 각각 지정한다. 이로써 한 해 기업 순위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새로 포함된 곳과 빠진 곳은 어디인지 알 수 있다. 동일인으로 지정되면 ‘배우자, 6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이 보유한 계열사 지분 내역 공시’라는 의무를 지게 된다. 또 회사 현황과 주주·임원 구성 등이 포함된 공정위 제출 ‘지정자료’에 대한 책임도 갖게 된다. 만약 해당 자료를 허위로 제출하면 기업을 대표하는 동일인이 고발 조치를 당한다.
쿠팡처럼 동일인 지정을 피하려 애쓰는 기업이 있는 반면, 일부 기업은 오너 경영의 상징성 등을 고려해 총수 지정에 적극적이다. 대표적으로 현대차와 효성을 들 수 있다. 두 기업은 드디어 올해 동일인이 고령의 명예회장에서 현 회장으로 새로 지정됐다. 현대차 동일인은 정몽구 명예회장에서 정의선 회장으로, 효성 동일인은 조석래 명예회장에서 조현준 회장으로 바뀌었다. 정의선, 조현준 회장은 각각 2020, 2017년 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특히 정의선 회장은 이미 몇 해 전부터 경영 전면에 나서 승계가 당연시돼왔다. 효성도 조현준 회장 취임 후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공정위에 동일인 지정을 신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동안 공정위는 동일인이 사망하거나, 삼성 또는 롯데처럼 동일인이 병환으로 실질적인 경영권 행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만 동일인 변경을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기존 총수가 자녀에게 회장직을 물려주더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이유로 동일인 변경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번에 신규로 지정된 공시대상기업집단 수는 지난해(64개)보다 7개 증가했고, 소속 회사 수는 지난해(2284개)보다 328개 증가했다. 쿠팡 외에도 한국항공우주산업, 현대해상화재보험, 중앙, 반도홀딩스, 대방건설, 엠디엠, 아이에스지주 등이다.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새로 포함된 기업은 셀트리온, 네이버, 넥슨, 넷마블, 호반건설, SM, DB 등 7곳이다.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소속 회사는 그 외에 상호 출자 금지, 순환 출자 금지, 채무보증 금지, 금융보험사 의결권 제한 등이 추가로 적용된다.
“한국에만 있는 갈라파고스 규제”
재계는 이번 쿠팡 사례를 통해 공정위의 형평성을 문제 삼는 동시에 대기업집단 지정제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4월 27일 발표문을 통해 “제도 도입 근거인 경제력 집중 억제의 필요성이 현재는 거의 사라졌고, 과도한 규제로 오히려 우리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이 악화됐다”며 대기업집단 지정제도를 전면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경련 관계자는 “공정거래법 제정 당시인 1980년대만 해도 경제 개방도가 낮아 일부 기업이 시장 독점을 통해 국내시장을 장악하고 독점적 이윤을 추구하는 게 가능했지만, 지금은 외국기업이 언제든 우리나라 시장에 진입할 수 있기 때문에 일부 국내기업의 시장 독점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대기업집단에 가해지는 규제가 오히려 외국기업과의 역차별을 불러온다는 얘기다. 이어 그는 “대기업집단 지정제도는 한국에만 있는 갈라파고스 규제로, 우리 기업이 세계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포털에서 ‘투벤저스’를 검색해 포스트를 팔로잉하시면 다채로운 투자 정보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