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의 공식 홈페이지(www.bok.or. kr)에 들어가보면 초기 화면에 움직이는 양궁 과녁이 하나 등장한다. 그리고 이 과녁에는 ‘2001년 물가안정 목표 3.0±1%’라는 올해 물가 목표치가 깜박거리며 계속 나타난다. 그만큼 한국은행이 올해 물가안정 목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미 한국은행 스스로도 이런 목표치를 포기한 지 오래다. 한국은행 전철환 총재도 외부 강연 등을 통해 잇달아 올해 물가상승률이 4%를 상회할 것임을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4%대의 경제성장률 예상이 나오는 마당에 4%대의 예상 인플레율을 놓고 보면 일부 전문가들이 ‘저성장-고물가’라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우려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국은행의 이런 인식과는 달리 재경부를 비롯한 정부 관료들은 한은이 금리를 내려서라도 경기를 부양할 필요성이 있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다. 표면적으로는 구조조정 우선과 제한적 경기대응을 주장하고 있지만 내심으로는 부진한 구조조정에 계속 매달리기보다 경기 부양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으면 하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특히 정부 쪽의 이런 의중을 대변하듯 한국개발연구원(KDI) 수장으로 취임한 강봉균 전 재경부 장관도 언론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잇달아 금리 인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한다. 재경부의 정책 수립에 대해 적절한 충고와 견제를 해오던 KDI가 오히려 정부의 의중을 먼저 대변하고 나오는 형국이다. 재경부와 한은이 물밑에서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치고 여기에 KDI까지 맞장구를 치는 모양새가 빚어지는 것이다.
“금리 내려서라도” “차라리 재정 확대”
최근 경기 해법을 둘러싸고도 재경부와 한은은 서로 다른 견해를 내놓는다. 한은이 금리 인하에는 물가 불안을 이유로 선을 긋고 재정 확대 쪽에 무게를 두는 반면, 재경부는 한은의 금리정책에 기대를 건다. 진념 부총리는 일본식 만성 적자를 경계하면서 재정 확대에 부정적인 반면, 전철환 한은 총재는 ‘극심한 재정적자로 정책 수단이 고갈한 일본에 비해 우리는 정책 수단의 여지가 있다’는 말로 금리정책 사용에 제동을 건다.
경기 해법을 둘러싼 재경부와 한은의 이견은 물가문제에 대한 인식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한은은 최근 물가 인상폭이 당초 예상을 뛰어넘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총수요 관리 필요성을 언급하였지만 정부 쪽은 물가 인상 요인의 내용을 거론하며 총수요 압력이 크지 않다는 점을 내세운다. 경기 부양을 바라는 민간 경제연구소들도 대부분 정부측의 견해에 동조한다.
물가 인상을 둘러싼 논란의 내용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다. 지난해 9월 이후 경기 둔화에 따라 수요측면에서의 물가 상승 압력은 크지 않은 형편이다. 최근 물가 불안 조짐이 나타나는 원인은 대부분 의보 수가 조정 등 공공요금 인상분과 대학 등록금 인상, 유가와 환율 등 대외 변수 등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특히 공공요금 인상이 물가 인상에 기여한 부분은 45%나 차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수요 측면에서 발생하는(demand-pull)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비용 측면에서 발생하는 (cost-push) 인플레이션이기 때문에 통화당국이 다소 금리를 내리더라도 총수요에 크게 영향을 주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KREI)도 하반기로 갈수록 원화 환율이 안정되어 공공요금 인상효과를 희석할 것으로 보이는데다 총수요가 이미 위축할대로 위축한 상태이기 때문에 추가 물가 상승은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경제연구원 거시경제연구센터 허찬국 박사는 “최근 물가 인상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공공요금 인상의 경우 일회적 요인일 뿐 지속적 추가 물가 인상 요인이 아닌 만큼 금리 인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허박사는 “소비가 최근 들어 다소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아직도 내수는 취약한 것이 사실이며 내수 기반을 받쳐준다는 의미에서도 금리를 조절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상명대 백웅기 교수(경제학)는 “통화정책의 효과는 2년 뒤에나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현재 경제 주체들의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가 매우 높은 상태이기 때문에 금리 인하는 곧바로 공공요금 추가 인상이나 임금 인상 요구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반론을 폈다. 물가 인상을 우려하는 한은 쪽의 요구에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KDI도 지난 17일 경제 전망치를 발표하면서 당분간 현재의 금리 수준을 중심으로 미세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백교수는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은 한은의 통화정책이 중심을 잡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의 반론도 있다. 최근 자금시장 상황이 유동성 부족에 기인한 것이 아닌 이상, 금리를 내린다고 해서 당장 실물 쪽으로 자금이 흐르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한은 관계자는 “자금시장 경색의 원인이 구조조정 미흡 등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에서 기인한 것인 만큼 설령 금리를 인하한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가 나타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우회적 표현을 썼지만 한은 관계자들은 재경부의 의중에 불쾌감을 감추지 않는다.
한편 한국은행은 최근 재경부, 금감위와 금융감독기구 개편문제를 둘러싸고도 심한 의견 대립을 빚은 바 있다. 금융감독기구 개편 논란이 금감원과 금감위 통합 여부나 증권선물위원회 산하에 조사정책국 신설 여부 등의 문제로 초점이 모아지면서 별로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금융기관에 대한 한국은행의 단독 검사권 요구를 놓고 마찰을 빚은 것이다. 한국은행측은 제대로 된 통화신용정책 수립을 위해서는 은행의 자산 내용을 소상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단독검사권을 요구한 반면, 재경부는 이에 대해 유보적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재경부는 협의과정에서 제재권한이 없는 단순한 검사권을 주는 방안을 제시해 한은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결국 최종 개편안에서는 금감원의 인력 부족 등으로 공동검사가 어려울 경우 한국은행에 검사를 위탁한다는 정도를 반영하는 수준에 그쳤다. KDI 강문수 박사는 이를 두고 “콜시장 참여자가 정보를 주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이 제대로 먹힐 리 없다”고 전제한 뒤 “과거에도 공동검사 조항이 있었지만 사실상 금감위나 금감원이 거부하면 검사를 못 나갔던 상황을 감안할 때 이번 개편안은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정부와 중앙은행의 갈등이나 이견은 외국에서도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또 경제학계에서는 재정정책이냐 통화정책이냐의 논란이 고전에 속한다. 그럼에도 최근 경기 해법을 둘러싼 정부와 한은의 갈등이 관심을 끄는 것은 우리 경제가 아직 구조조정 과정에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경제정책은 시기를 놓치면 ‘약발’을 기대할 수 없다. 논쟁만 벌이는 사이 경기 대응에 실기(失機)하면 그 몫은 결국 국민의 몫이 된다. 최근 경제 전문가들이 ‘일본형 장기 불황’을 자주 언급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은행의 이런 인식과는 달리 재경부를 비롯한 정부 관료들은 한은이 금리를 내려서라도 경기를 부양할 필요성이 있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다. 표면적으로는 구조조정 우선과 제한적 경기대응을 주장하고 있지만 내심으로는 부진한 구조조정에 계속 매달리기보다 경기 부양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으면 하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특히 정부 쪽의 이런 의중을 대변하듯 한국개발연구원(KDI) 수장으로 취임한 강봉균 전 재경부 장관도 언론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잇달아 금리 인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한다. 재경부의 정책 수립에 대해 적절한 충고와 견제를 해오던 KDI가 오히려 정부의 의중을 먼저 대변하고 나오는 형국이다. 재경부와 한은이 물밑에서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치고 여기에 KDI까지 맞장구를 치는 모양새가 빚어지는 것이다.
“금리 내려서라도” “차라리 재정 확대”
최근 경기 해법을 둘러싸고도 재경부와 한은은 서로 다른 견해를 내놓는다. 한은이 금리 인하에는 물가 불안을 이유로 선을 긋고 재정 확대 쪽에 무게를 두는 반면, 재경부는 한은의 금리정책에 기대를 건다. 진념 부총리는 일본식 만성 적자를 경계하면서 재정 확대에 부정적인 반면, 전철환 한은 총재는 ‘극심한 재정적자로 정책 수단이 고갈한 일본에 비해 우리는 정책 수단의 여지가 있다’는 말로 금리정책 사용에 제동을 건다.
경기 해법을 둘러싼 재경부와 한은의 이견은 물가문제에 대한 인식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한은은 최근 물가 인상폭이 당초 예상을 뛰어넘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총수요 관리 필요성을 언급하였지만 정부 쪽은 물가 인상 요인의 내용을 거론하며 총수요 압력이 크지 않다는 점을 내세운다. 경기 부양을 바라는 민간 경제연구소들도 대부분 정부측의 견해에 동조한다.
물가 인상을 둘러싼 논란의 내용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다. 지난해 9월 이후 경기 둔화에 따라 수요측면에서의 물가 상승 압력은 크지 않은 형편이다. 최근 물가 불안 조짐이 나타나는 원인은 대부분 의보 수가 조정 등 공공요금 인상분과 대학 등록금 인상, 유가와 환율 등 대외 변수 등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특히 공공요금 인상이 물가 인상에 기여한 부분은 45%나 차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수요 측면에서 발생하는(demand-pull)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비용 측면에서 발생하는 (cost-push) 인플레이션이기 때문에 통화당국이 다소 금리를 내리더라도 총수요에 크게 영향을 주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KREI)도 하반기로 갈수록 원화 환율이 안정되어 공공요금 인상효과를 희석할 것으로 보이는데다 총수요가 이미 위축할대로 위축한 상태이기 때문에 추가 물가 상승은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경제연구원 거시경제연구센터 허찬국 박사는 “최근 물가 인상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공공요금 인상의 경우 일회적 요인일 뿐 지속적 추가 물가 인상 요인이 아닌 만큼 금리 인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허박사는 “소비가 최근 들어 다소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아직도 내수는 취약한 것이 사실이며 내수 기반을 받쳐준다는 의미에서도 금리를 조절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상명대 백웅기 교수(경제학)는 “통화정책의 효과는 2년 뒤에나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현재 경제 주체들의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가 매우 높은 상태이기 때문에 금리 인하는 곧바로 공공요금 추가 인상이나 임금 인상 요구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반론을 폈다. 물가 인상을 우려하는 한은 쪽의 요구에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KDI도 지난 17일 경제 전망치를 발표하면서 당분간 현재의 금리 수준을 중심으로 미세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백교수는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은 한은의 통화정책이 중심을 잡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의 반론도 있다. 최근 자금시장 상황이 유동성 부족에 기인한 것이 아닌 이상, 금리를 내린다고 해서 당장 실물 쪽으로 자금이 흐르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한은 관계자는 “자금시장 경색의 원인이 구조조정 미흡 등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에서 기인한 것인 만큼 설령 금리를 인하한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가 나타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우회적 표현을 썼지만 한은 관계자들은 재경부의 의중에 불쾌감을 감추지 않는다.
한편 한국은행은 최근 재경부, 금감위와 금융감독기구 개편문제를 둘러싸고도 심한 의견 대립을 빚은 바 있다. 금융감독기구 개편 논란이 금감원과 금감위 통합 여부나 증권선물위원회 산하에 조사정책국 신설 여부 등의 문제로 초점이 모아지면서 별로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금융기관에 대한 한국은행의 단독 검사권 요구를 놓고 마찰을 빚은 것이다. 한국은행측은 제대로 된 통화신용정책 수립을 위해서는 은행의 자산 내용을 소상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단독검사권을 요구한 반면, 재경부는 이에 대해 유보적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재경부는 협의과정에서 제재권한이 없는 단순한 검사권을 주는 방안을 제시해 한은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결국 최종 개편안에서는 금감원의 인력 부족 등으로 공동검사가 어려울 경우 한국은행에 검사를 위탁한다는 정도를 반영하는 수준에 그쳤다. KDI 강문수 박사는 이를 두고 “콜시장 참여자가 정보를 주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이 제대로 먹힐 리 없다”고 전제한 뒤 “과거에도 공동검사 조항이 있었지만 사실상 금감위나 금감원이 거부하면 검사를 못 나갔던 상황을 감안할 때 이번 개편안은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정부와 중앙은행의 갈등이나 이견은 외국에서도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또 경제학계에서는 재정정책이냐 통화정책이냐의 논란이 고전에 속한다. 그럼에도 최근 경기 해법을 둘러싼 정부와 한은의 갈등이 관심을 끄는 것은 우리 경제가 아직 구조조정 과정에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경제정책은 시기를 놓치면 ‘약발’을 기대할 수 없다. 논쟁만 벌이는 사이 경기 대응에 실기(失機)하면 그 몫은 결국 국민의 몫이 된다. 최근 경제 전문가들이 ‘일본형 장기 불황’을 자주 언급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