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은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 그것이 문제로다’는 존재론적 명제 앞에서 고뇌했다. 오늘 우리는 ‘과연 텔레비전을 볼 것이냐, 말 것이냐(TV or not TV)’라는 문명론적 화두를 놓고 씨름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과거 춥고 배고팠던 시절, 텔레비전은 보물 같은 존재였다. ‘가정환경 조사서’의 맨 첫머리에 자랑스럽게 오르던 것이 바로 텔레비전이었다. 친구 집 문틈에서 바라본 ‘황금박쥐,’ 그리고 동네 만화방에서 지켜본 ‘한-일전 축구,’ 그것은 화려했던 소년시절의 빼놓을 수 없는 동반자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집 지붕에도 텔레비전 안테나가 세워지던 그 날, 바람은 어찌 그리도 달콤했던가. 인생은 어찌 그리도 아름다웠던가.
그랬던 텔레비전이 이제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흉물이 되고 만 것이다. 집에서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보려고 하면, 정말 대단한 인내가 필요해진다. 보지 못하게 하면 더 보고 싶어하리라는 요량에서 그냥 모른 척하지만 10분을 참기가 어렵다. 끝내는 ‘너희들 저런 것을 꼭 보아야 하겠느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만다. 아이들 몸에 좋다면 가리지 않고 먹이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꿈과 희망을 주고, 사랑 주고 사랑 받는 국민의 방송’이라면 왜 텔레비전을 못 보게 하겠는가. 수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텔레비전과 절연(絶緣)시키기 위해 전의를 불사른다면, 이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반 TV론자’들의 주장에 전부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영상문화가 본질적으로 사람의 이지적 판단을 약화시키고 상상력을 퇴화할 개연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텔레비전이 활자매체와는 다른 차원에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할 가능성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어차피 세상이 영상매체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면, 이런 흐름을 거역할 도리도 없다. 싫든 좋든 ‘적과의 동침’이 불가피하다면 외면만이 능사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한국의 텔레비전 방송이 인내의 임계수위(臨界水位)를 넘어서는 현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영상매체의 본령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 그간의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때로는 싫다는 아이들을 억지로 불러 보여주고 싶던 프로그램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말 조짐들이 곳곳에서, 그것도 너무나 자주 눈에 띈다. 시청률이라는 황금의 덫에 빠진 나머지 인기만 올릴 수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고질병을 치유하기는커녕 악화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어느 방송에서 여고 3학년 학생의 체벌문제를 기사로 다루었다. 얼마나 심하게 때렸던지 맞은 부위가 육안으로도 뚜렷이 구별되었다. 그러나 텔레비전 화면이 다 큰 처녀들 엉덩이를 확대해서 차례차례 자세하게 보여주는 상황에 이르면 이것이 뉴스인지, 포르노인지 구분이 안 된다. 도대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비일비재 일어난다. 귀하디 귀한 공중파를 연예인 신변 잡담에, 말도 안 되는 불륜 드라마로 칠갑을 하는데, 아무리 아우성을 쳐도 시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청률 덫에 빠져 도를 넘어선 ‘공중파 낭비’ 계속
이런 방송을 우리 나라 성인이 하루 평균 3시간씩 본다고 한다. 휴식 시간의 대부분을 텔레비전과 더불어 보낸다. 아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보고 듣는 것이 텔레비전 방송이니, 텔레비전이 우리의 의식을 규정하고 삶의 내용과 방향을 결정짓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전 국민을 ‘바보들의 행진’으로 끌어들이고 경박한 저질문화의 추종자로 만들어 버리니, ‘텔레비전과의 전쟁’을 선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형편에 요즘 텔레비전들이 작심한 듯 신문 개혁과 관련한 특집 방송을 줄줄이 내보낸다. 신문이 개혁되어야 할 당위성을 깨닫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적어도 텔레비전이 나서서 문제를 제기할 형편은 못 된다. 자성(自省)할 시간도 모자랄 판인데 신문 개혁 운운할 여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권의 나팔수라서, 아니면 신문을 눌러 광고시장을 독점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저런다고 하는 ‘오해’를 왜 자초하는가.
과거 춥고 배고팠던 시절, 텔레비전은 보물 같은 존재였다. ‘가정환경 조사서’의 맨 첫머리에 자랑스럽게 오르던 것이 바로 텔레비전이었다. 친구 집 문틈에서 바라본 ‘황금박쥐,’ 그리고 동네 만화방에서 지켜본 ‘한-일전 축구,’ 그것은 화려했던 소년시절의 빼놓을 수 없는 동반자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집 지붕에도 텔레비전 안테나가 세워지던 그 날, 바람은 어찌 그리도 달콤했던가. 인생은 어찌 그리도 아름다웠던가.
그랬던 텔레비전이 이제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흉물이 되고 만 것이다. 집에서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보려고 하면, 정말 대단한 인내가 필요해진다. 보지 못하게 하면 더 보고 싶어하리라는 요량에서 그냥 모른 척하지만 10분을 참기가 어렵다. 끝내는 ‘너희들 저런 것을 꼭 보아야 하겠느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만다. 아이들 몸에 좋다면 가리지 않고 먹이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꿈과 희망을 주고, 사랑 주고 사랑 받는 국민의 방송’이라면 왜 텔레비전을 못 보게 하겠는가. 수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텔레비전과 절연(絶緣)시키기 위해 전의를 불사른다면, 이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반 TV론자’들의 주장에 전부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영상문화가 본질적으로 사람의 이지적 판단을 약화시키고 상상력을 퇴화할 개연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텔레비전이 활자매체와는 다른 차원에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할 가능성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어차피 세상이 영상매체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면, 이런 흐름을 거역할 도리도 없다. 싫든 좋든 ‘적과의 동침’이 불가피하다면 외면만이 능사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한국의 텔레비전 방송이 인내의 임계수위(臨界水位)를 넘어서는 현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영상매체의 본령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 그간의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때로는 싫다는 아이들을 억지로 불러 보여주고 싶던 프로그램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말 조짐들이 곳곳에서, 그것도 너무나 자주 눈에 띈다. 시청률이라는 황금의 덫에 빠진 나머지 인기만 올릴 수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고질병을 치유하기는커녕 악화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어느 방송에서 여고 3학년 학생의 체벌문제를 기사로 다루었다. 얼마나 심하게 때렸던지 맞은 부위가 육안으로도 뚜렷이 구별되었다. 그러나 텔레비전 화면이 다 큰 처녀들 엉덩이를 확대해서 차례차례 자세하게 보여주는 상황에 이르면 이것이 뉴스인지, 포르노인지 구분이 안 된다. 도대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비일비재 일어난다. 귀하디 귀한 공중파를 연예인 신변 잡담에, 말도 안 되는 불륜 드라마로 칠갑을 하는데, 아무리 아우성을 쳐도 시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청률 덫에 빠져 도를 넘어선 ‘공중파 낭비’ 계속
이런 방송을 우리 나라 성인이 하루 평균 3시간씩 본다고 한다. 휴식 시간의 대부분을 텔레비전과 더불어 보낸다. 아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보고 듣는 것이 텔레비전 방송이니, 텔레비전이 우리의 의식을 규정하고 삶의 내용과 방향을 결정짓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전 국민을 ‘바보들의 행진’으로 끌어들이고 경박한 저질문화의 추종자로 만들어 버리니, ‘텔레비전과의 전쟁’을 선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형편에 요즘 텔레비전들이 작심한 듯 신문 개혁과 관련한 특집 방송을 줄줄이 내보낸다. 신문이 개혁되어야 할 당위성을 깨닫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적어도 텔레비전이 나서서 문제를 제기할 형편은 못 된다. 자성(自省)할 시간도 모자랄 판인데 신문 개혁 운운할 여력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권의 나팔수라서, 아니면 신문을 눌러 광고시장을 독점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저런다고 하는 ‘오해’를 왜 자초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