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작품 가운데 ‘해무’는 여러모로 독특하다. 먼저 1999년을 배경으로 했다는 점이 그렇고, 제작 규모가 가장 작다는 점도 그렇다. ‘해무’와 다른 영화 세 편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연극을 원작으로 했다는 사실이다. 봉준호 감독이 제작했다는 점에서 연극 ‘날 보러와요’를 영화화한 기념비적인 작품 ‘살인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해무’는 ‘살인의 추억’과 여러모로 닮았다. 가까운 과거에 일어난 사회면 기사를 소재로 삼았다는 것도 그렇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돌아본 게 ‘살인의 추억’이라면, ‘해무’는 1998년 외환위기와 2001년 제7 태창호 사건을 소재로 했다. ‘살인의 추억’에서 화성이 그냥 지명이 아니라 80년대 고도성장기 대한민국의 웅덩이였듯, 영화 ‘해무’속 전진호는 외환위기 시기 대한민국의 표상이 된다.
‘해무’의 가장 큰 장점은 무게중심을 파고들어가는 집중력과 힘이다. 연극적 공포와 카타르시스는 시나리오에 매우 진지한 무게추를 달아준다. 해무가 바다를 덮는 순간까지 압축된 공기가 전진호가 오도 가도 못 하고 꼼짝없이 바다에 갇힌 순간 폭발하는 것이다. 이 무게감을 뜨겁게 이끄는 건 명불허전 배우들이다.
김윤석, 문성근, 김상호, 이희준, 유승목 등전진호 선원들은 서로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개성과 매력을 보여준다. 이들은 각자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체스판 위 말이다. 활어처럼 비릿하면서도 탄력적 욕망을 보여주는 유승목이나 이희준은 화려한 멜로디를 구성한다. 동정으로 부서진 영혼의 성을 보여준 문성근은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연기의 한 끗을 새로 보여준다. 그동안 해왔던 것과 비슷하지만 욕망과 광기 사이 마초적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김윤석은 역시 김윤석이다. 조선족 처녀 한예리도, 막내 선원 박유천도 모두 제몫을 제대로 해낸다.

문제는 관객 호응이다. ‘해무’는 여러모로 탄탄한 영화적 만듦새와 메시지의 충실도를 갖추고 있지만 정말 바다안개처럼 무겁고 두껍다. 감정의 얕은 수면이 아니라 깊은 정서적 공감을 유도하기에, 깊이 잠수할수록 느껴지는 수압처럼 관객에게 부담을 줄 듯싶다. 웰메이드 영화의 압력을 기다린 관객에게는 반가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