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데 하루키라는 수식어만큼 선정적인 것은 없다. 그러니까 그의 이름은 하나의 브랜드다. 하루키를 읽는다는 게 한때 유행인 적이 있었고, 동아시아에서 하루키는 반시계 방향의 흐름을 만들었다.
일본, 한국, 중국,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하루키는 그저 작가가 아니라 일종의 현상이었다. 현상은 ‘자본주의’라고 일컫는 시장경제 체제의 확장 속도 및 방향과 일치했다. 대한민국에서 이념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 그 헛헛함을 하루키가 위로했고, 베이징대학에 섹스와 알코올이 넘칠 때 하루키가 함께했다. 그야말로 하루키는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주목할 것은 이 현상이 비단 동양, 아시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현재 뉴욕에서 작가가 되겠다고 선언한 지망생들 중 많은 수는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소설가가 되리라 마음먹었다고 고백한다.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과 수필 여러 곳에서 미국의 소설을 읽으며 일본적이지 않은 소설 쓰기를 연마했다고 밝혔다. 뒤집어놓고 보면, 미국 소설을 보며 소설을 공부한 하루키의 소설을 다시 미국 독자가 읽고 그 이채로움에 감동한다. 이쯤 되면 왜 하루키를 무국적 시대의 글로벌 작가라고 부르는지도 이해가 갈 법하다.
하루키는 1990년대 문화와 함께 환기됐다. 왕자웨이(王家衛), 재즈,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맥락 가운데서 하루키는 ‘쿨’이라는 당대적 용어를 실용화하는 데 일조했다. ‘상실의 시대’ 속 주인공들은 ‘진지하지만 심각하지 않기’를 모토로 내세웠고, 전공투(全共鬪) 이후 세대적 상실감을 첫사랑의 훼손과 같은 선상에 두고 고민했다. 발칙하지만 세련된 문화적 방관이 그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상실의 시대’와 하루키가 동일어로 떠오르는 까닭은 아마도 그 세계의 질감이 놀랄 만큼 낯설면서도 매력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1984’ 패러디, 역사적 시간 객관화
그런 하루키가 오랜만에 신작 장편소설을 냈다. 제목은 ‘1Q84’. 출간 당시 일본에서 화제가 됐고 국내에 수입되는 과정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고가의 선인세로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이런저런 논란과 화제 끝에 소개된 ‘1Q84’는 일종의 추리극이며 환상소설이다. 하루키는 핍진함이라는 리얼리즘 소설의 문법을 가뿐히 넘나들면서도 한편 일본의 현대사 핵심에 놓인 ‘사건’을 소설화해낸다. 그것은 바로 집단의 광기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은, 일본이 숨기고 싶어하는 미스터리한 사건이며 일본 무의식의 중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옴진리교 사건이다.
‘1Q84’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패러디하고 있다. 조지 오웰이 아주 먼 이후라고 상정해서 그려낸 SF적 공간이 바로 1984년이다. 오웰은 인류가 시간이 흘러 1984년쯤 되는 시간에 다다르면 ‘빅브라더’라고 부르는 감시와 통제 체제에 갇혀 허덕일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자유는 감금으로 인해 소진하고 말 것이다’라는 묵시론적 계시가 이 작품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말했다시피 오웰에게 1984년은 먼 미래였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리고 하루키에게 1984년은 이미 20년 넘게 지난 과거다. 이제 1984년은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그리는 SF의 시공간이 아니라, 자의식을 통해 객관화할 수 있는 역사의 시간이다. 그리고 하루키의 작품 ‘1Q84’는 이 역사적 시간의 객관화라는 점에서 중요한 암시를 전달한다. 그것은 위대한 주관화야말로 엄밀한 객관화라는 전언으로 압축된다.
하루키가 돌아보는 1984년은 추종해야 할 거대 담론을 잃고 개인의 정체 모를 욕망에 시달리는 혼돈의 시공간이다. 소설 1권에서 아오마메는 바늘 하나로 살인에 성공한다. 살인한 이는 고위직의 상류층 남자로 아내를 상습적으로 구타했다. 남자의 구타는 병적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도착적이다. 구타를 당한 아내의 사진에 대한 묘사 속에는, 심하게 뒤틀린 남자의 욕망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리고 이 남자의 욕망이란 사실 정처를 모른 채 일본을 떠돌던 도착적 욕망과 허무주의적 폭력을 대신한다. 일본은 그때 욕망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었던 셈이다. 윤리적 심판자인 아오마메의 이야기는 대필작가로 설득당하는 덴고의 이야기와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나간다.
한 장은 아오마메, 다음 한 장은 덴고의 순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는 중첩점을 찾아가기까지 한참 동안 나름의 궤도를 그려간다. 마치 아무 연관 없는 사건처럼 매혹적 청부살인업자와 대필작가의 삶은 패치워크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덴고가 대신 집필하는 소설의 어떤 부분과 현실의 일부가 교차하면서 두 이야기는 복잡하게 서로를 간섭하고 침투한다.
과거가 아닌 현재로 부상하다
하루키의 ‘1Q84’는 외형적으로 추리소설을 표방한다. 살인사건, 실종사건이 일어나고 현실적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독자를 궁금증의 구석으로 몰아넣고 하나씩 단서와 실마리를 제공하는 하루키의 솜씨는 가히 놀랍다. 수많은 독자가 매혹될 수밖에 없는 매력적 단서와 속도감 있는 문체가 잠언투의 문장에 포복하고 있다. 하루키의 소설세계에서 추리소설적 구조는 낯설지 않다.
‘양을 쫓는 모험’을 비롯해 많은 작품은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추리소설적 스타일 위에서 진행됐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스타일이 아니라 주제적 측면이라는 이야기다. 우리가 ‘1Q84’를 통해 주목해야 할 것은 추리소설이라는 매우 대중적인 스타일 속에 1980년대에 대한 하루키만의 주관이 잠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루키는 뒤돌아보면, 1980년대를 광기의 ‘리더에게 자발적으로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퇴폐적 좌절의 시기’로 명명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지나간 과거로, 신문과 역사책의 기록 속 한 시기로 화석화한 ‘1984년’을 여전히 유효한 질문(Question)의 맥락 속으로 끌고 온다. 하루키로 인해 일본에서 1984년은 과거가 아닌 현재로 부상하게 됐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우리에게 1980년대는 민주화와 이념,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용광로 가운데서 젊음을 불태웠던 시절로 기억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기를 너무도 낭만적으로 신화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386세대 자기 진실성의 알리바이로 1980년대를 회고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 시기의 현재화를 거부하는 것은 아닐까? 하루키가 중요한 작가인 것은 바로 이 점이다. 하루키는 언제나 현재적 작가다.
일본, 한국, 중국,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하루키는 그저 작가가 아니라 일종의 현상이었다. 현상은 ‘자본주의’라고 일컫는 시장경제 체제의 확장 속도 및 방향과 일치했다. 대한민국에서 이념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 그 헛헛함을 하루키가 위로했고, 베이징대학에 섹스와 알코올이 넘칠 때 하루키가 함께했다. 그야말로 하루키는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주목할 것은 이 현상이 비단 동양, 아시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현재 뉴욕에서 작가가 되겠다고 선언한 지망생들 중 많은 수는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소설가가 되리라 마음먹었다고 고백한다.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과 수필 여러 곳에서 미국의 소설을 읽으며 일본적이지 않은 소설 쓰기를 연마했다고 밝혔다. 뒤집어놓고 보면, 미국 소설을 보며 소설을 공부한 하루키의 소설을 다시 미국 독자가 읽고 그 이채로움에 감동한다. 이쯤 되면 왜 하루키를 무국적 시대의 글로벌 작가라고 부르는지도 이해가 갈 법하다.
하루키는 1990년대 문화와 함께 환기됐다. 왕자웨이(王家衛), 재즈,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맥락 가운데서 하루키는 ‘쿨’이라는 당대적 용어를 실용화하는 데 일조했다. ‘상실의 시대’ 속 주인공들은 ‘진지하지만 심각하지 않기’를 모토로 내세웠고, 전공투(全共鬪) 이후 세대적 상실감을 첫사랑의 훼손과 같은 선상에 두고 고민했다. 발칙하지만 세련된 문화적 방관이 그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상실의 시대’와 하루키가 동일어로 떠오르는 까닭은 아마도 그 세계의 질감이 놀랄 만큼 낯설면서도 매력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1984’ 패러디, 역사적 시간 객관화
그런 하루키가 오랜만에 신작 장편소설을 냈다. 제목은 ‘1Q84’. 출간 당시 일본에서 화제가 됐고 국내에 수입되는 과정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고가의 선인세로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이런저런 논란과 화제 끝에 소개된 ‘1Q84’는 일종의 추리극이며 환상소설이다. 하루키는 핍진함이라는 리얼리즘 소설의 문법을 가뿐히 넘나들면서도 한편 일본의 현대사 핵심에 놓인 ‘사건’을 소설화해낸다. 그것은 바로 집단의 광기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은, 일본이 숨기고 싶어하는 미스터리한 사건이며 일본 무의식의 중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옴진리교 사건이다.
‘1Q84’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패러디하고 있다. 조지 오웰이 아주 먼 이후라고 상정해서 그려낸 SF적 공간이 바로 1984년이다. 오웰은 인류가 시간이 흘러 1984년쯤 되는 시간에 다다르면 ‘빅브라더’라고 부르는 감시와 통제 체제에 갇혀 허덕일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자유는 감금으로 인해 소진하고 말 것이다’라는 묵시론적 계시가 이 작품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말했다시피 오웰에게 1984년은 먼 미래였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리고 하루키에게 1984년은 이미 20년 넘게 지난 과거다. 이제 1984년은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그리는 SF의 시공간이 아니라, 자의식을 통해 객관화할 수 있는 역사의 시간이다. 그리고 하루키의 작품 ‘1Q84’는 이 역사적 시간의 객관화라는 점에서 중요한 암시를 전달한다. 그것은 위대한 주관화야말로 엄밀한 객관화라는 전언으로 압축된다.
‘무국적 시대의 글로벌 작가’답게 하루키 열풍은 한국에서도 거세다.
그리고 이 남자의 욕망이란 사실 정처를 모른 채 일본을 떠돌던 도착적 욕망과 허무주의적 폭력을 대신한다. 일본은 그때 욕망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었던 셈이다. 윤리적 심판자인 아오마메의 이야기는 대필작가로 설득당하는 덴고의 이야기와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나간다.
한 장은 아오마메, 다음 한 장은 덴고의 순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는 중첩점을 찾아가기까지 한참 동안 나름의 궤도를 그려간다. 마치 아무 연관 없는 사건처럼 매혹적 청부살인업자와 대필작가의 삶은 패치워크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덴고가 대신 집필하는 소설의 어떤 부분과 현실의 일부가 교차하면서 두 이야기는 복잡하게 서로를 간섭하고 침투한다.
과거가 아닌 현재로 부상하다
하루키의 ‘1Q84’는 외형적으로 추리소설을 표방한다. 살인사건, 실종사건이 일어나고 현실적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독자를 궁금증의 구석으로 몰아넣고 하나씩 단서와 실마리를 제공하는 하루키의 솜씨는 가히 놀랍다. 수많은 독자가 매혹될 수밖에 없는 매력적 단서와 속도감 있는 문체가 잠언투의 문장에 포복하고 있다. 하루키의 소설세계에서 추리소설적 구조는 낯설지 않다.
‘양을 쫓는 모험’을 비롯해 많은 작품은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추리소설적 스타일 위에서 진행됐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스타일이 아니라 주제적 측면이라는 이야기다. 우리가 ‘1Q84’를 통해 주목해야 할 것은 추리소설이라는 매우 대중적인 스타일 속에 1980년대에 대한 하루키만의 주관이 잠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루키는 뒤돌아보면, 1980년대를 광기의 ‘리더에게 자발적으로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퇴폐적 좌절의 시기’로 명명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지나간 과거로, 신문과 역사책의 기록 속 한 시기로 화석화한 ‘1984년’을 여전히 유효한 질문(Question)의 맥락 속으로 끌고 온다. 하루키로 인해 일본에서 1984년은 과거가 아닌 현재로 부상하게 됐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우리에게 1980년대는 민주화와 이념,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용광로 가운데서 젊음을 불태웠던 시절로 기억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기를 너무도 낭만적으로 신화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386세대 자기 진실성의 알리바이로 1980년대를 회고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 시기의 현재화를 거부하는 것은 아닐까? 하루키가 중요한 작가인 것은 바로 이 점이다. 하루키는 언제나 현재적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