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 원칙만 따진다면 미국인 작가가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쓰지 말라는 법 없고, 그것을 스필버그가 할리우드 영화로 제작하지 말라는 법 없다. 여기에 장쯔이나 공리를 포함한 중국인 배우들이 출연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중요한 건 내용과 스타일과 질, 태도다. 하지만 세상에 원리 원칙만으로 해결되는 일들이 그렇게 흔하던가?
‘게이샤의 추억’은 아이디어 단계부터 등잔 밑에 파여 있는 함정에 빠지는 영화다. 다시 말해 이 영화가 개봉된 뒤 쏟아지는 비판과 비난들은 영화가 기획될 때부터 나왔고, 또한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이 경우 최선의 방어는 영화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차선의 방어는 그 비판을 넘어설 만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 하지만 이 영화의 감독인 롭 마샬이나 제작자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 어느 쪽도 택하지 않았다.
이건 나쁜 일일까? 글쎄. ‘게이샤의 추억’이 장점 없는 영화인 것만은 아니다. 비주얼은 근사하고 주연 여배우들은 아름답다. 이야기엔 좀더 순진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오래된 로맨스의 정갈한 느낌이 흐르고, 요요 마와 이츠하크 펄만이 참여한 존 윌리엄스의 음악도 괜찮다.
종종 ‘이건 우리가 아는 일본이 아니야!’라거나 ‘양자경이 게이샤 역을 맡다니 말도 안 돼!’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들이 영어로 이야기를 시작한 뒤부터 리얼리티는 포기했을 것이다. 하긴 진짜 일본인들과 진짜 게이샤들의 이야기를 알고 싶다면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를 보면 된다. 롭 마샬이 치중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서구적 관점’이다. 물론 원칙적으로 따진다면 말이다.
‘게이샤의 추억’은 연쇄적으로 ‘원칙적으로’라는 말에 걸려 넘어진다. 이야기 자체만 따진다면, 이 영화가 다루는 ‘폐쇄된 세계 속에 갇혀 살아온 한 여성의 회고록’은 충분히 이야기되고 사람들에게 들려질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건 원칙의 문제이고, 일단 영화가 현실 세계와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그 소박한 순결함은 순식간에 더렵혀진다.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에 대한 일반적인 고정관념은 너무나도 교과서적으로 재구성되고, 그 결과 영화는 동양 여성에 대한 순진무구한 스테레오 타입들로 구성된 아주 피상적인 작품으로 끝나고 만다.
‘게이샤의 추억’은 그 자체로는 피상적인 영화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복잡한 영화이기도 하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이 영화를 편한 할리우드 오락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미 공격적으로 던져진 스테레오 타입들도 힘겹지만 지난 세월 우리가 일본에 대해 쌓아올린 복잡한 감정을 해석하는 일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이샤의 추억’이 그 감정을 정리할 시간을 마련해줄 수 있을까? 어림없다. 그러기엔 이 영화는 너무 생각이 없다.
‘게이샤의 추억’은 아이디어 단계부터 등잔 밑에 파여 있는 함정에 빠지는 영화다. 다시 말해 이 영화가 개봉된 뒤 쏟아지는 비판과 비난들은 영화가 기획될 때부터 나왔고, 또한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이 경우 최선의 방어는 영화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차선의 방어는 그 비판을 넘어설 만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 하지만 이 영화의 감독인 롭 마샬이나 제작자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 어느 쪽도 택하지 않았다.
이건 나쁜 일일까? 글쎄. ‘게이샤의 추억’이 장점 없는 영화인 것만은 아니다. 비주얼은 근사하고 주연 여배우들은 아름답다. 이야기엔 좀더 순진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오래된 로맨스의 정갈한 느낌이 흐르고, 요요 마와 이츠하크 펄만이 참여한 존 윌리엄스의 음악도 괜찮다.
종종 ‘이건 우리가 아는 일본이 아니야!’라거나 ‘양자경이 게이샤 역을 맡다니 말도 안 돼!’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들이 영어로 이야기를 시작한 뒤부터 리얼리티는 포기했을 것이다. 하긴 진짜 일본인들과 진짜 게이샤들의 이야기를 알고 싶다면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를 보면 된다. 롭 마샬이 치중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서구적 관점’이다. 물론 원칙적으로 따진다면 말이다.
‘게이샤의 추억’은 연쇄적으로 ‘원칙적으로’라는 말에 걸려 넘어진다. 이야기 자체만 따진다면, 이 영화가 다루는 ‘폐쇄된 세계 속에 갇혀 살아온 한 여성의 회고록’은 충분히 이야기되고 사람들에게 들려질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건 원칙의 문제이고, 일단 영화가 현실 세계와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그 소박한 순결함은 순식간에 더렵혀진다.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에 대한 일반적인 고정관념은 너무나도 교과서적으로 재구성되고, 그 결과 영화는 동양 여성에 대한 순진무구한 스테레오 타입들로 구성된 아주 피상적인 작품으로 끝나고 만다.
‘게이샤의 추억’은 그 자체로는 피상적인 영화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복잡한 영화이기도 하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이 영화를 편한 할리우드 오락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미 공격적으로 던져진 스테레오 타입들도 힘겹지만 지난 세월 우리가 일본에 대해 쌓아올린 복잡한 감정을 해석하는 일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이샤의 추억’이 그 감정을 정리할 시간을 마련해줄 수 있을까? 어림없다. 그러기엔 이 영화는 너무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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