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와인 고르기가 더 어려운 것은 같은 재배지역이더라도 조그맣게 나눠진 밭의 토양성분에 따라 와인 맛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특성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상급 와인으로 보르도 포메롤 지역이 낳은 20세기의 기적이라고 일컫는 페트뤼스(Petrus)의 경우, 이 와인이 생산되는 밭은 포메롤 지역의 다른 밭과 달리 철분이 많은 점토질이다. 이 땅이 메를로(Merlot·포도 품종의 하나)와 결합해 절묘한 조화를 이뤄낸 것이다.

이처럼 유럽 지역의 와인들은 포도나무 품종과 재배지역을 보고 고르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좀 다르다. 와인 생산량의 96%가 캘리포니아에 집중돼 있는 기후적 특성 때문이다. 토양도 유럽처럼 복잡하지 않다. 당연히 향취가 복잡해질 수 있는 여지가 상당히 줄어든다. 와인업자들도 토양은 부차적으로만 생각한다. 미국산 와인이 포도 품종을 라벨에 크게 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판매되는 전체 와인의 75%는 유럽이나 남미산이 아닌 미국산이다.

캘리포니아 와인 생산지는 로스앤젤레스 위쪽의 샌타바버라부터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소노마까지 매우 좁은 지역에 한정돼 있다. 이 지역에 850개 이상의 포도농장(회사)이 흩어져 있다. 이 가운데 오늘날 미국의 1급 레스토랑에서 가장 호평받고 있는 것은 켄들잭슨(Kendall-Jackson)의 블렌딩 와인. 와인 마스터들도 놀란 새로운 개념의 ‘콜라주 와인’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켄들잭슨은 법률가 출신으로 와인 애호가였던 제시 잭슨이 1982년에 설립한 와인 회사. 역사로만 보면 유럽에 비길 바가 아니다. 그러나 켄들잭슨은 회사 설립 이듬해인 1983년 4개의 와인 품평대회에서 대상을 휩쓸면서 미국을 대표하는 와인 회사가 되었다. 켄들잭슨이 이처럼 짧은 시간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좋은 포도의 생산이 가장 큰 이유. 켄들잭슨의 지역판매 담당 이사인 스티브 메신거씨는 “켄들잭슨의 포도밭은 캘리포니아 포도밭 중 가장 비싼 지역이다. 다른 지역은 포도 1톤을 생산하는 데 300달러밖에 들지 않지만, 우리는 1톤에 2000달러가 들어간다”고 설명한다.

와인 마니아라면 직접 캘리포니아로 날아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와인 배합을 통해 전 세계에서 단 하나인 ‘자신만의 와인’을 만들 수도 있다.
와인 평론가들은 흔히 캘리포니아 블렌딩 와인을 ‘신개척지의 맛’이라 평가한다. 유럽산 와인이 오랜 전통과 고정된 포도밭에서 생산된 와인이라면, 미국 와인은 포도 원액을 배합해 새롭게 만든, 마치 신대륙을 개척한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유럽산 와인은 그해 기후에 따라 와인의 품질이 확연하게 달라진다. 포도를 추수할 시기에 비가 오거나 일조량 등에 따라 포도의 품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캘리포니아는 추수 시기에 거의 비가 오지 않는다. 기후에 영향 받을 가능성이 그만큼 적다. 따라서 와인의 품질도 고를 수밖에 없다. 유럽산 와인이 ‘고르는’ 재미가 있다면, 미국산 와인은 어느 것이든 평균 점수는 된다는 안정감이 있다고나 할까. 물론 마니아들이 즐기는 ‘복잡 미묘함’과 ‘신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느끼는 재미는 줄어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