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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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들렀다 오래 머물게 되는 태국 빠이 

[재이의 여행블루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북부 숲속 마을… 장기 여행자의 핫 플레이스

  • 재이 여행작가

    입력2026-03-22 0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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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발 1200m 높이에 자리한 반자보 마을.  GETTYIMAGES

    해발 1200m 높이에 자리한 반자보 마을. GETTYIMAGES

    태국 북부에는 ‘여행자의 무덤’이라는 별칭을 가진 작은 마을이 있다. 여행자가 한 번 방문하면 좀처럼 떠나지 못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별칭을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다소 과장된 표현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빠이(Pai)에 며칠간 머무르다 보면 결코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빠이는 태국 북부 매홍손주 산맥 사이 계곡에 자리한 시골 마을이다. 그러나 전 세계 배낭여행자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특별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바쁘게 이동하면서 명소를 탐방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머물며 하루를 보내게 만드는 분위기. 그래서 잠시 들를 생각이던 여행자가 어느새 계획을 바꿔 오래 머물게 되는 곳, 빠이는 그런 도시다. 

    762개 굽이 길 끝에서 만나는 시골 마을

    빠이로 가는 길부터가 이 마을의 성격을 암시한다. 치앙마이에서 빠이로 향하는 1095번 도로는 여행자 사이에서 유명하다. 762개나 되는 굽이 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산맥을 타고 오르내리는 도로는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고 3시간 가까이 숲과 계곡 사이를 달린다. 이 때문에 멀미로 고생하는 여행자도 적잖다. 하지만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그 수고를 잊게 만든다. 울창한 숲, 깊은 계곡, 산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 이 길 끝에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커질 즈음, 빠이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분위기는 의외로 차분하다. 빠이는 고급 리조트나 번화한 관광 거리가 있는 여행지가 아니다. 중심 거리는 걸어서 충분히 둘러볼 수 있을 만큼 작고 소박하다. 카페들도 아침 느지막한 시간이 돼야 하나 둘 문을 연다. 여행자들도 그때쯤부터 슬금슬금 나타나 커피 한 잔을 들고 거리를 걷는다. 

    빠이에서는 여행자가 오토바이를 빌려 들판과 협곡 사이를 천천히 달리는 모습도 익숙한 풍경이다. 북부 태국의 자연 풍경, 히피 문화에서 이어진 자유로운 분위기, 그리고 장기 여행자들이 만들어낸 공동체 온기가 이 마을을 특별하게 만든다. 자연 속에서 조용히 머물고 싶은 사람, 새로운 이들을 만나고 싶은 사람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 등 다양한 색깔을 가진 여행자가 모여 같은 속도로 살아가게 된다.  



    느린 하루를 보내고 나면 밤도 자연스럽게 깊어진다. 모처럼 깊이 잠든 뒤 새벽에 눈을 떴다면 라후족(동남아시아와 중국 윈난성 일대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이 오래전부터 살아온 반자보 마을로 향해보자. 해발 1200m 높이에 자리한 이곳에서는 계곡과 산 능선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동쪽 하늘이 천천히 밝아오면 산 사이로 안개가 흐르고 능선 위로 햇빛이 번지기 시작한다. 전망대 아래 국숫집에 앉아 따뜻한 국수를 먹으면서 바라보는 이 풍광은 평생 기억 속에 남을 장면이 된다. 

    태국의 ‘그랜드 캐니언’으로 불리는 빠이 캐니언. GETTYIMAGES

    태국의 ‘그랜드 캐니언’으로 불리는 빠이 캐니언. GETTYIMAGES

    오후가 되면 여행자들은 태국판 ‘그랜드 캐니언’으로 불리는 빠이 캐니언을 찾는다. 숲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붉은 흙 능선이 이어지는 협곡이 나타난다. 능선 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고 양쪽으로는 깊은 계곡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지만 곧 주변 풍경에 시선이 머문다. 붉은 흙 능선과 초록빛 숲이 만들어내는 대비가 인상적이다. 해 질 무렵이 되면 능선 위에는 더 많은 여행자가 모여 앉는다. 태양이 산 너머로 천천히 내려가면 붉은 능선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계곡에는 부드러운 어둠이 내려앉는다. 

    좀 더 한적한 풍경을 보고 싶다면 논 사이로 이어지는 뱀부브리지도 좋다. 약 800m 길이인 대나무 다리는 들판과 개울 사이를 연결한다. 양옆으로는 초록빛 논이 펼쳐지고 멀리 산 능선이 배경처럼 자리한다. 빠이는 이런 풍경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마을이다. 느리고 평온한 농촌 풍경이 여행자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계획 없이도 자연스럽게 채워지는 하루 

    해가 지면 마을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빠이의 중심 거리 워킹 스트리트에 자리한 노점과 가게가 하나 둘 불을 밝히면서 야시장이 시작된다. 꼬치구이와 팟타이, 팬케이크에서는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퍼진다. 기타 연주와 거리 음악이 골목 사이로 흘러나오고, 카페에서는 라이브 음악이 시작된다. 작은 거리이지만 밤이 되면 다양한 나라의 언어와 문화가 자연스럽게 뒤섞여 활기가 돈다. 

    빠이의 또 다른 매력은 사람들이다. 이곳에는 예술가와 장기 여행자가 많다. 화가, 사진작가, 음악가, 작가들이 마을 곳곳 카페와 작업실에서 작업을 이어가며 살아간다. 그래서 골목을 걷다 보면 아기자기한 갤러리와 수공예 상점, 매력적인 카페 공간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토요일 아침에는 지역 주민과 장기 체류자들이 함께하는 공동체 시장도 열린다.  

    빠이에서는 일정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 눈이 자연스레 떠질 때 일어나 새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스쿠터에 몸을 실어 폭포나 온천을 찾아 나서며, 능선에 앉아 붉은 노을을 바라보고, 밤이 되면 전 세계 문화를 공유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나눈다. 특별한 계획이 없어도 하루가 자연스럽게 채워진다.  

    재이 여행작가는… 세계 100여 개국을 여행하며 세상을 향한 시선을 넓히기 시작했다. 지금은 삶의 대부분을 보낸 도시 생활을 마감하고 제주로 이주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다양한 여행 콘텐츠를 생산하는 노마드 인생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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